조계사, 인도네팔 불교성지순례기 ③
조계사, 인도네팔 불교성지순례기 ③
  • 이재형 기자
  • 승인 2014.03.26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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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발자취 따르며 한국불교 미래를 가늠하다

▲ 갑옷처럼 견고한 바라문문화에서 불교가 인도 전역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불교사상의 우월성과 카스트문화 등에 대한 저항정신이 크게 작용했다. 사진은 화엄경, 유마경 등의 배경이 됐던 바이살리. 아쇼카대왕의 석주가 가장 잘 남아있는 성지이기도 하다.

길은 떠남이자 만남이다. 반들반들 윤이 나는 신작로일지라도 늘 새로운 곳으로 이끌어준다. 또한 여행자로 하여금 종종 깊은 사색에 잠기게 한다. 부처님 발자취가 스며있는 인도의 길은 두말할 나위 없다. 2600여년 전 부처님이 걸으며 보았을 풍경이나 오늘날 순례자들 앞에 펼쳐진 풍경들. 맨발의 부처님이 눈 맑은 제자들과 걸었을 그 길 위에 우리는 서있다.

조계사 순례단은 라지기르 죽림정사로 향했다. 마가다국 왕사성 부근에 위치했던 이곳은 불교 최초의 사원으로 유명하다. 칼란다 장자가 보시한 죽림에 빔비사라왕이 직접 나서서 정사를 지었다. 대나무 숲에 둘러싸인 이곳에서 부처님은 선정에 들었고 대중에게 설법하고는 했다. 지금은 절터였음을 추측케 하는 대나무 숲과 연못만이 옛 정취를 전하고 있다.

부처님 일생은 지혜와 자비의 길
곳곳에 수많은 선지식 흔적 남아

인도불교 역사무대서 사라진 건
이슬람 침략보다 대중과의 괴리

인도불교 전철 밟지 않으려면
청정한 승가·대중과 호흡 관건

라지기르 남단에 위치한 영축산으로 향했다. 성도 후 부처님이 ‘법화경’과 ‘보적경’ 등 경전을 설했던 곳이다. 젊은 사람들이야 완만한 길이겠지만 연로한 보살님들에게는 쉽지 않은 길이다. 힘들어하는 노보살님 앞에 어느새 가마꾼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그들은 하루에 몇 번이나 이 길을 오르내릴까. 정상 가까이에 이르자 독수리가 앉아있는 형상의 바위가 순례단의 눈에 들어왔다. 경전에는 부처님이 기사굴 산중에 머물 때 1250인과 함께 했다고 기록돼 있지만 이제는 흔적만 남아있다. 우리는 기도에 이어 ‘법화경 약찬게’를 천천히 읽어나갔다. 이역만리에서 온 순례자들이 부르는 숱한 보살들의 명호 속에 서녘의 노을도 서서히 붉어져 갔다.

다음날 순례단은 나란다사원으로 향했다. 파트나시 남쪽 바라기온 지역에 있는 이곳은 세계 최고(最古)의 대학으로 잘 알려져 있다. 5세기초 굽타왕조에 의해 창건된 이 절은 전성기인 6~7세기 때 1만여 명이 공부했을 정도로 세계 학문의 중심지였다. 교수진도 2000여 명에 이르렀고 배우는 과목도 불교를 비롯해 베다학, 우파니샤드학, 의학, 공학, 천문, 지리, 음악, 수학, 주술 등 다양했다. 세계 최고의 명문대학인 이곳에 입학하려 내로라하는 각국의 스님들이 이곳을 찾았다. 타클라마칸사막과 파미르고원을 넘어온 현장법사도 이곳에서 5년간 수학했으며, 신라의 스님들도 이곳에서 공부를 했다.

▲ 인도불교사의 오랜 영광과 비극이 공존하고 있는 나란다사원.

나란다사원은 1200년까지 학문적인 명성을 날렸지만 이슬람의 침입으로 폐허가 됐다. 수많은 스님들이 이곳에서 무슬림의 칼에 순교했으며, 지혜의 보고인 경전과 논서들도 모조리 불타버렸다. 나란다사원의 비극은 곧 인도불교의 종언으로 이어졌다. 13세기 이후 인도사에서 불교라는 종교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이다.

1700년 동안 이어지던 불교가 인도에서 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불교성지 곳곳에서 여실히 알 수 있듯 7세기 말부터 서서히 시작된 이슬람 침입이 결정타였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슬람의 종교탄압은 불교뿐 아니라 힌두교와 자이나교에도 동일하게 자행됐다. 그들 종교는 지금껏 이어지는데 왜 유독 불교만 종언을 고해야 했던 걸까. 조선조 500년의 모진 불교탄압에도 한국의 불교는 살아남아 지금 건재하지 않은가. 많은 학자들은 그 이유로 이슬람의 폐불과 더불어 인도불교의 힌두교화를 꼽는다. 교리와 의례에서 불교의 정체성을 잃고 힌두화됐다는 것이다. 그런 요소가 있음은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인도불교 사상사에서 다양한 흐름이 있었지만 어느 시대 어느 교단이 핵심교리인 ‘무아’ ‘연기’ 사상을 완전히 등진 적이 있을까. 후기 인도불교를 받아들인 티베트의 경우 밀교를 지향하지만 중관이나 유식, 논리학의 전통이 여전히 강하다. 그런 점에서 힌두교화 됐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선뜻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그러한 변화가 민중들과 교감하려는 불교계의 노력으로도 읽힐 수 있는 대목이다.

일각에서는 불교가 인도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힌두교 속에 남아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 증거로 부처님이 비쉬누의 9번째 화신이라는 점을 꼽는다. 하지만 설득력이 떨어지기는 마찬가지다. 오늘날 힌두사상에서는 불교사상의 핵심인 무아사상 등을 찾아볼 수 없을 뿐 아니라 승가라는 평등공동체도 찾아보기 어렵다. 비쉬누 화신이라지만 알고 보면 부처님의 부정적인 면모가 부각된 악마적인 요소의 화신일 뿐이다.
그 해답은 거꾸로 바라문교가 주도했던 인도에서 어떻게 신흥종교인 불교가 전역으로 확산될 수 있었는가를 돌아보면 찾을 수도 있을 듯싶다. 지금도 그렇지만 고대 인도는 카스트제도가 갑옷처럼 견고했던 사회다. 출생신분에 의해 한 사람의 운명이 결정됐다. 그런 만큼 차별도 극심했다. 천민계급 사람이 베다를 보면 눈을 멀게 했고, 베다를 입에 담으면 혀를 뽑았다. 여성도 인권의 사각지대였다. 심지어 남편이 죽으면 함께 화장시키는 문화가 근대까지도 이어질 정도였다.

그 시대에 부처님은 모든 생명이 불성을 지닌 평등한 존재임을 선언했다. 누구나 깨달아 아라한이 되고 부처님이 될 수 있다고 천명한 것이다. 그것은 인류사 최초의 인권선언이자 카스트제도에 대한 전면적인 도전이었다. 부처님은 자신이 꿈꾸던 세계를 승가를 통해 구현시켜나갔다. 승가에는 계급이 없었으며, 여성도 뭇 중생의 귀의처인 승가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카스트에 신음하던 이들과 상인들은 열렬히 환호했다. 새로운 정치이데올로기를 필요로 하던 크샤트리아계급들도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평등사상이 당시 불교 성장의 원동력이 됐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여기에 불교의 사상적인 우월성과 탁월한 논리력도 큰 경쟁력이었다. 논쟁 문화가 발달한 인도에서 상대의 논리를 꺾는 것은 단순히 교리적인 우월성을 입증하는 차원을 넘어선다. 지배계층과 민중들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었던 것이다. 당시 아무리 뛰어난 논사나 수행자라도 부처님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들은 승복했고 그에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승가에 속속 귀의했다. 그러한 불교논리학의 전통은 용수를 비롯해 세친, 무착, 진나, 법칭, 월칭 등 수많은 기라성 같은 불교논사들로 이어졌다. 인도불교에서 숱한 논서들이 나왔던 것도 이론을 번잡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연적인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인도불교의 멸망은 교리의 우월성이 아닌 평등성의 상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슬람이 과격하지만 일단 알라신을 믿는다면 그 안에서는 카스트의 횡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러나 불교는 이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을 못했고, 오히려 왕권이나 부호들로부터 막대한 지원을 받으며 힌두나 기득권의 저항문화라는 특수성을 상실한 것이 면역성을 잃고 이슬람의 탄압에 쉽게 스러졌던 결정타로 작용했을 수 있다. 20세기 중엽, 인도에서 천민출신의 암베드카르가 힌두의 차별문화에 맞서 불교로 개종운동을 벌인 것도 불교의 평등사상이 갖는 사회적인 중요성을 입증한다. 그런 점에서 나란다사원은 인도불교사의 영광과 비극이 공존하는 상징적인 유적이었다.

순례단은 바이살리로 발길을 옮겼다. 인도 비하르주 파트나에서 북동쪽으로 43km 떨어진 이곳은 부처님 당시 상업의 중심지였다. 마하파자파티가 사캬족 여인 500명과 출가를 청한 곳이며, 화엄경과 유마경의 배경이기도 하다. 또 아쇼카대왕이 세운 많은 석주 가운데 가장 온전한 형태가 유지되는 성지다.

▲ 부처님의 마지막 유훈이 생생한 쿠시나가르의 부처님 열반상.

우리는 이어 부처님이 열반에 든 쿠시나가르의 열반당을 순례했다. 근세에 두 미얀마 스님이 세웠다는 이곳에는 세계 각지에서 온 불자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아난다야, 내 삶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대들을 남기고 나는 먼저 홀로 떠날 것이다. 내가 간 뒤에도 부지런히 정진하고 계율을 잘 지켜야 할 것이다”라는 부처님의 유훈이 귓가에 맴돌았다. 부처님의 마지막을 지켜야 했던 아난다의 깊은 슬픔도 손에 잡힐 듯 다가왔다.

팔대성지의 마지막은 부처님이 탄생한 네팔 룸비니였다. 사카족 왕비인 마야부인은 아기를 낳기 위해 고향으로 가던 중 산기를 느끼고 이곳 무우수 나무에서 싯다르타는 낳았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이 탄생한 것이다. 그 위대한 분이 이 사바세계에 옴으로써 비로소 중생은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 성불에 이를 수 있게 됐다.

▲ 가장 위대한 분, 부처님이 탄생한 룸비니사원.

부처님이 80평생을 통해 보여주었던 지혜와 자비의 길. 그 진리의 등불을 세세생생 잇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한국불교가 인도불교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 그것은 승가가 청정성을 유지하고, 대중과 늘 호흡하며, 모든 불자들이 부처님의 삶을 닮아가려는 지속적인 노력에서 비롯될 것이다. 그러한 노력이 씨앗이 되어 정토세상도 활짝 피어날 수 있으리라.

조계사 주지 도문 스님의 축원이 풍경소리처럼 룸비니동산에 은은히 울려 퍼졌다.

“저희들의 모든 공덕 온 법계에 회향하오니 부처님의 대자대비로 온갖 고난 어루만지시어 마음의 평화를 이루게 하옵소서. 오늘 성지순례 동참 대중에게 부처님의 가피 내리시어 세세생생 날 때마다 보살도를 행하면서 일체 중생을 제도하게 하여 부처님의 크신 은혜에 보답하게 하옵소서. 나무시아본사 석가모니불.”

인도=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 법화경 배경이 된 라지기르 영취산. 조계사 성지순례 참가대중의 표정이 연꽃처럼 맑다.

조계사 성지순례 참가대중
도문 스님, 명조 스님, 이근혜, 문현지, 양재영, 최진승, 박금문, 서지원, 강덕희, 윤영희, 김도경, 함덕화, 이상태, 김선희, 최현경, 김성애, 김옥열, 김순철, 최진순, 임연선, 김명희, 노영조, 한경희, 전명숙, 김정희, 노남수, 노장미, 임영시, 김설희, 최병용, 유중임, 송점심, 김부연, 이유순, 정윤희, 정옥란, 이춘애, 김종례, 김금임, 문경수, 문윤지, 김은영, 김연숙, 황대인, 최복순, 손순현, 송내자, 이상윤, 박순덕, 김이삼자, 이경옥, 이화경, 김익희, 박옥선, 신현희, 전금순, 한계진, 김덕희, 김정희, 오옥진, 맹정숙, 양춘자, 이보, 최미숙, 천옥선, 현춘자, 손충복, 김정득, 이금자, 김외심, 조유진, 조경민, 차점순, 김용자, 양경자, 신영식, 전창분, 박옥희, 박부득, 이지현, 임재춘, 남아현, 서연주.


[1238호 / 2014년 3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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