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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유숙, ‘오수삼매’

기자명 조정육

깊게 잠드는 자만이 충실히 깨어있을 수 있다

“부처님께서는 비록 눈은 잠으로 음식을 삼는다고 하셨지만 저는 차마 잘 수 없습니다.” -증일아함경

태산 같은 잠의 무게감을
실감나게 표현한 ‘오수삼매’
오직 현재만을 살아간다면
근심 없이 잠들 수 있어

실명위기 처한 아나율에게
잠잘 것 권유하는 부처님
마침내 천안통 얻었지만
물질 식별하는 육안 잃어

▲ 유숙, ‘오수삼매’, 종이에 먹, 40.4×28cm, 간송미술관.

내가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그와 함께 있을 때 나는 더없이 행복하다. 내가 그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느낄 만큼 오로지 나한테만 집중해주기 때문이다. 나와 함께 있을 때 그는 내가 전부다. 오직 나 한 사람만을 사랑하기 위해 사는 사람 같다. 저 사람에게 나는 매우 중요한 사람이구나. 존중받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나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와 함께 있지 않을 때 그는 나대신 그의 앞에 있는 사람에게 집중한다. 다른 사람이 그의 전부인 것처럼 헌신하는 태도를 하고서 말이다. 마치 나 같은 존재는 싹 잊어버린 듯하다. 아니 그의 앞에 있는 사람 외에는 세상 그 누구도 모르는 사람 같다. 그 대상이 여자든 남자든 상관없다. 할머니든 어린아이든 묻지 않는다. 그와 함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가 중요하게 여기는 대상은 사람뿐이 아니다. 일도 중요하다. 알고 보니 그는 매순간에 헌신적인 사람이었다. 공부할 때는 공부에, 밥 먹을 때는 먹는 일에, 얘기할 때는 얘기에 몰입한다. 잠 잘 때는 오로지 잠에 몰두할 것이다. 참 신기한 사람이다.  

“늙은 스님네가 앉아서 조는 것이 좋아 머리를 깎게 되었습니다.”

해안(海眼:1901-1974) 스님은 경봉(鏡峰:1892-1982) 스님과 함께 ‘동(東) 경봉, 서(西) 해안’으로 불리며 선풍을 떨친 근현대 호남의 대표적인 선사다. 그런 분이 출가동기를 밝히면서 하신 말씀이 늙은 스님이 조는 것이 좋아서였단다. 노스님이 좋아 보였던 이유를 덧붙였다. “홍안백발(紅顔白髮)의 노승이 삽살개 눈썹을 하고 전면(前面) 어간(御間)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머리를 조아려 꾸벅꾸벅 조는 모습은 어느 선인도(仙人圖)에서나 볼 수 있는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이었다.”

나는 이 글을 읽자마자 유숙(劉淑:1827-1873)의 ‘오수삼매(午睡三昧)’가 떠올랐다. 오수(午睡)는 낮잠이다. 그러니 ‘오수삼매’는 낮잠에 깊이 빠졌다는 뜻이다. 얼마나 깊이 잠들었으면 삼매에 든 것처럼 보였을까. 삼매에 들면 누가 ‘띰어 가도’ 모른다. 오수삼매에 든 사람도 그렇다. 봄이 되니 노곤하다. 점심을 먹고 나면 쏟아지는 졸음을 주체할 수가 없다.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것이 졸릴 때의 눈꺼풀이다. 밀려드는 졸음은 천하장사도 당해낼 수 없다. 스님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어디를 가던 길이었을까. 스님이 짚신을 신은 채 앉은 자리에서 깜빡 잠이 들었다. 무릎에 두 손을 올려놓고 잠시 쉰다는 것이 스르르 눈이 풀린 모양이다. 화가는 잠에 취한 스님을 표현하려고 어깨 부분을 먹으로 진하게 그렸다. 덕분에 바위처럼 무거운 졸음이 짓누르는 것 같다. 진한 먹으로 그린 가사장삼은 누군가 잠자는 스님 위로 이불을 덮어준 것처럼 풍성하다. 눈썹까지 세밀하게 그린 얼굴과 먹의 농담변화를 결합한 승복이 묘한 대조를 이루면서 태산 같은 잠의 무게가 더욱 실감난다. 나는 ‘오수삼매’처럼 잠에 빠진 이를 투철하게 묘사한 그림을 본 적이 없다.

옛 그림 중에는 잠자는 사람을 그린 그림이 매우 다양하다. 시원한 서재에서 잠든 선비, 나무를 베고 누운 은자, 물결치는 바다에서 갈대를 밟고 앉아 잠든 동자, 배 위에서 구부린 채 쪽잠을 자는 어부, 소꼴을 먹이며 잠든 목동 등등 틈만 나면 눈을 붙이려는 사람들로 그림세계는 혼잡하다. 그들 모두 잠에 관한한 전문가들이다. 그러나 잠의 깊이와 강도에 있어서는 보는 사람까지 졸리게 만드는 ‘오수삼매’가 단연 최고다.

그런데 수행자가 수행을 해야지 이렇게 잠에 빠져 있어도 될까. ‘오수삼매’를 보면서 두 번째 든 생각이었다. 해안 스님의 출가동기도 왠지 걱정스러웠다. 걱정과 근심으로 잠을 잘 수 없는 불면증을 경험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잠이란 그저 피곤하면 저절로 잘 수 있는 생리적 현상인 줄 알았다. 그러나 아무리 잠을 자고 싶어도 잠 들 수 없는 것을 겪고 나서는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 선(禪)의 경지가 얼마나 심오한 지 비로소 깨달았다. 깨어있는 시간을 잘 보낸 사람만이 편안히 잘 수 있다. 과거와 미래의 근심으로 얼룩진 사람은 쉽게 잠들지 못한다. 내가 좋아하는 그 친구처럼 오직 현재에 충실한 사람만이 깊이 잠들 수 있다. 부처님도 자신을 ‘나는 세상에서 잠을 잘 자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다. 어떻게 해야 잠을 잘 잘 수 있는가. ‘증일아함경’에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숙면의 비법이 이렇게 적혀 있다.

“감각적 욕망에 오염되지 않고, 청량하고 집착이 없고, 완전한 적멸을 성취한 거룩한 님은 언제나 잘 자네. 모든 집착을 부수고, 마음의 고통을 극복하고, 마음의 적멸을 성취한 님은 고요히 잘 자네.”

잠을 잘 자는 것은 좋지만 잠도 잠 나름이다. 깨어있는 시간에도 어영부영 지내다 저녁 되면 또 다시 늘어지게 잠을 자는 것은 인생을 낭비하는 잘못된 습관이다. 부처님의 10대 제자 중 천안(天眼) 제일로 알려진 아나율 존자가 그런 경우였다. 그는 처음 출가했을 때 수행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썩 내키지 않은 출가를 했기 때문에 열심히 수행을 하지 않았던 탓이다. 그런 어느 날 부처님께서 출가자와 재가 신도들을 상대로 기원정사에서 법을 설하는 중에 아나율이 부처님 앞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그것을 본 부처님께서 아나율을 호되게 꾸짖으며 말씀하셨다.

“너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출가했느냐? 사문이 그렇게 열심히 수행하지 않으면 출가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순간 아나율은 심히 부끄러움을 느껴 졸지 않고 정진하겠다고 맹세했다. 그는 일주일 동안 용맹정진에 들어갔다. 그 결과 아나율은 사물을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눈이 아파 실명 위기에 처했다. 부처님께서 명의(名醫) 지바카에게 아나율을 치료하라고 명하셨다. 그런데 지바카는 ‘아나율이 조금이라도 잠을 잔다면 치료할 수 있으나 잠을 자지 않기 때문에 치료할 수 없다’고 했다. 부처님께서 아나율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잠을 자야 한다. 사람은 먹어야 살아갈 수 있고, 먹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눈은 잠으로 음식을 삼고, 귀는 소리로 음식을 삼으며, 코는 냄새로 음식을 삼고, 혀는 맛으로 음식을 삼으며, 몸은 감촉으로 음식을 삼고, 뜻은 법으로 음식을 삼는다. 그리고 지금 나의 열반에도 음식이 있다.”

아나율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열반은 무엇으로 음식을 삼습니까?”
“열반은 부지런함을 음식으로 삼는다.”
“부처님께서는 비록 눈은 잠으로 음식을 삼는다고 하셨지만 저는 차마 잘 수 없습니다.”

아나율은 부처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계속 정진하여 결국 실명하게 되었다. 비록 아나율이 물질을 식별하는 육안(肉眼)은 잃었지만,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꿰뚫어볼 수 있는 천안(天眼)을 얻었다.

아나율의 선택이 꼭 옳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스승의 꾸지람을 서운하게 생각하지 않고 잘못된 습관을 바로잡고자 한 자세는 대단하다 못해 숙연하다. 게으름 피우는 제자를 걱정한 얘기는 공자에게도 있었다. 제자인 재여가 낮잠을 자자 공자가 말했다.

“썩은 나무로는 조각할 수 없고, 더러운 흙으로 쌓은 담장에는 흙손질을 할 수 없다. 너에 대해 내가 무엇을 탓하겠느냐?”

그렇다면 육안을 잃고 천안을 얻은 아나율은 어떻게 생활했을까. 당연히 불편했을 것이다. ‘증일아함경’에는 그가 육안을 잃고 나서 어떻게 생활했는지 알려주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적혀 있다.

어느 날 아나율이 옷을 꿰매려고 바늘에 실을 꿰는데, 앞을 보지 못하는 아나율로서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아나율이 중얼거렸다.

“나를 위해 바늘에 실을 꿰어줄 사람이 누구 없을까?”

세존께서 천이통(天耳通)으로 그 소리를 듣고 아나율의 처소로 찾아오셨다.

“실과 바늘을 내게 다오. 내가 꿰어 주리라.”

부처님께서 바늘에 실을 꿰어 아나율에게 건네주자 아나율이 말했다.

“부처님께서는 이런 복을 짓지 않아도 복덕과 공덕을 구족하신 분인데,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세상에서 복을 구하는 사람으로 나보다 더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여래는 여섯 가지 법에 있어서 만족할 줄을 모른다. 첫째는 보시오, 둘째는 교훈이며, 셋째는 인욕이요, 넷째는 법답게 진리를 설하는 것과 이치에 맞게 설명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중생을 보호하는 것이요, 여섯째는 최상의 도를 구하는 것이다.”

아나율이 여쭈었다.

“여래의 몸은 법신(法身)인데 다시 법을 또 구하려 하십니까? 여래께서는 이미 생사의 바다를 건너 애착에서 벗어났는데, 지금 또 애써 복덕을 닦으시는군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아나율아. 네 말과 같다. 여래도 여섯 가지 법에 있어서 만족할 줄 모른다. 만약 중생들이 죄악의 근본인 몸과 말과 생각으로 짓는 업을 안다면 결코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중생들은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삼악도에 떨어진다. 나는 그들을 위해 복을 지어야 한다. 이 세상의 모든 힘 가운데 복의 힘이 으뜸이다. 그러니 아나율아, 너도 열심히 정진해서 여섯 가지 법을 얻도록 하여라. 비구들이여, 그대들도 마땅히 이와 같이 공부해야 한다.”

이래저래 잠이 많이 오는 계절이다. 잠이 오면 잘 자자. 잘 자기 위해서는 깨어 있을 때 충실히 살아야 한다. 잘 자야 일도 할 수 있고 공부도 할 수 있고 복도 지을 수 있다. 잠이 보약이다.

조정육 sixgardn@hanmail.net


[1238호 / 2014년 3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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