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9. 개혁세력의 성장 - ② 선우도량

승풍진작·지계 앞세운 ‘결사’로 종단 개혁 이끌어

▲ 선우도량이 내세운 교육개혁안은 훗날 개혁종단의 교육제도를 만드는 근간이 됐다. 특히 선우도량은 1992년 8월 ‘가려뽑은 아함경’을 발간하고 전국 승가대학을 돌며 강연을 열기도 했다. 왼쪽부터 현응·법성·도법 스님이 학인들을 상대로 강연을 하고 있다.

“오늘 우리가 직면한 불교의 현실은 올바른 수행의 부재로부터 그 원인을 찾는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위로하고, 기뻐하고, 나누는 실천행으로 새로운 승풍을 바로 세워야 한다. 이 일은 반드시 우리의 손으로 이루어야 하리라.”(선우도량 창립취지문, 1990.11)

해방 이후 현대 조계종사는 혼란의 연속이었다. 1950~60년대 비구·취처승간의 갈등을 시작으로 1970~80년대 종권을 둘러싼 대립까지 조계종은 숨 가쁜 세월을 건너왔다. 1990년대 들어서도 권력과 이권을 좇는 일부 스님들간의 대립과 반목은 좀처럼 잦아들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기득권층의 횡포는 갈수록 커졌다. 불교의 정치예속화는 심화됐고 부정과 비리사건이 승단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한국불교의 위상은 한없이 추락했다. 조계종을 바라보는 세간의 시선도 곱지 않았다. 당시 상황에 대해 전 조계종 기본선원장 지환 스님은 “두들겨도 소리가 나지 않는 찢어진 북과 같고, 방향감각을 잃고 표류하고 있는 배와 같으며,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좋을지 모를 중환자 같다”(선우도량 창간호, 1991.8)고 개탄하기도 했다.

종단 비리·부패 만연하자
소장파 스님들 개혁 고민
제도 아닌 의식변화 중시
결사모임 ‘선우도량’ 창립

매년 2회 ‘수련결사’ 운영
‘계율’ 등 주제로 열띤토론
종단 내 대안세력으로 부상

교육개혁 우선적으로 관심
93년 ‘승가교육개혁안’ 발표
범종추 참여하자 전면 나서
98년 이후 쇄락한 건 한계

우려가 커질수록 종단내부에서 개혁에 대한 여망도 커져갔다. 그러나 종단구성원에 대한 인적쇄신이 이뤄지지 않은 일시적인 제도개혁만으로 종단의 근본적인 변화를 이룰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출가자에 대한 교육부재는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출가자의 교육부재는 1950~60년대 정화운동의 산물이었다. 취처승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였던 비구승들은 급조된 비구들을 대거 정화운동에 뛰어들게 했다. 비록 이들의 활약으로 취처승들을 몰아냈지만 교육받지 못한 비구들의 성장은 종단에 어두운 그늘을 드리게 했다. 출가정신은 퇴색했고, 승단 곳곳에서 적지 않은 문제점들이 속출됐다.

도법·지환·명진·현봉·수경 등 30~50대의 소장·중진 스님 10여명이 종단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대안을 모색한 것도 이 무렵이다. 이들은 1989년 하안거 결제를 앞둔 어느 날, 김제 금산사에서 모임을 갖고 한국불교의 변화를 위한 치열한 토론을 벌였다. ‘깨달음을 법칙으로 삼고 수행을 최고의 가치로 확신하는 출가정신은 분명한가’ ‘청정·화합·헌신의 승풍은 살아 있는가’ ‘이웃들과 관계 속에서 수행이 충분히 이뤄졌는가’ ‘민족전통종교로서의 위상이 확고하며 산업사회에서 올바른 역할을 해내고 있는가’ 등 끊임없는 반문과 성찰을 통해 이들이 얻은 해답은 하나였다. “한국불교의 개혁은 제도의 변화만으로 완수될 수 없으며, 철저한 자기변화와 의식의 변화가 수반되지 않고서는 결코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이었다.

변화에 대한 간절함 속에서 실낱같은 희망을 찾은 이들은 ‘개인의 수행과 교단의 문제’에 대한 불교적 해법을 제시하기 위해 ‘수행결사모임’을 구성하기로 뜻을 모았다. 이후 2년간 5차에 걸친 준비모임을 통해 제방 곳곳에서 개혁을 갈망하는 스님들을 규합했다. 그리곤 1990년 11월14일 마침내 결사조직인 ‘선우도량’을 창립시켰다. 이날 예산 수덕사에서 열린 창립대회에는 도법·지홍·현각·원행·범진·원타·정연·원명·지환·현봉·천월·수경·법성·종광·여연·범하·영명·현응·명진·돈연·무관·인각·유광·영진 스님 등 80여명이 동참했다. 초대 상임대표로 도법 스님을 선출하고 조직도 구성했다.

선우도량은 출범과 동시에 ‘승풍진작과 계율실천을 통해 오늘날에 맞는 승가상 정립’을 기치로 내걸었다. 끊임없는 참회와 수행정진으로 수행자 개개인의 의식혁명이 이뤄지지 않고서는 변화와 개혁이 실현될 수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선우도량은 결제 때마다 함께 모여 스스로의 수행을 점검했다. ‘한국불교가 처한 당면과제’를 주제로 대안모색을 위한 탁마의 장도 열었다. 1991년 3월 수덕사에서 시작한 수련결사가 그것이었다. 선우도량은 매년 2차례 수련결사를 열어 불교 사상과 실천 문제를 두고 열띤 토론을 이어갔다. ‘계율’ ‘행자교육’ ‘깨달음’ ‘청규’ ‘수행론’ 등을 주제로 출가자가 추구해야 할 삶의 가치를 정립했다. 모임이 거듭될수록 수련결사에 대한 종단 안팎의 관심도 커졌다. 수련결사를 찾는 스님들의 수가 늘면서 선우도량은 종단의 대안세력으로 급부상했다.

‘94년 불교개혁운동의 반성적 점검’(김봉준, 불교평론 8호)에 따르면 과거 승가운동의 주된 방향이 민주화와 통일운동을 중심으로 전개된 반면, 1990년대라는 시대사적 전환기를 맞아 성찰과 반성이라는 관점에서 선우도량이 제기한 방향성은 당시 신선한 자극이 됐다.

선우도량은 출가자 교육문제에도 적극 뛰어들었다. 1991년 11월 자체적으로 교육위원회를 발족하고 전국승가대학 강사들을 초청해 출가자의 교육문제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를 진행했다. 2년간 교육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를 통해 선우도량은 교육개혁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할 수 있었다.

또 강원 교과과정 개편을 위해 1992년 8월 ‘가려뽑은 아함경’을 발간했다. ‘부처님 생애’를 새롭게 편집했으며 강원 기본교재인 ‘치문’을 한글화하기도 했다. 그러나 교육개혁은 교재 몇 권을 바꾸는 것만으로 이뤄질 수 없었다. 종단의 교육제도를 체계적으로 개혁할 필요가 있었다. 3차례의 월례세미나를 열었고, 전국 강원교직자들과의 모임을 이어갔다. 그 결과 선우도량은 1993년 11월 ‘한국불교 승가교육 개혁안’을 자료집으로 제작, 전국에 배포했다.

‘교육개혁안’에 따르면 선우도량은 ‘수행과 전법 실천’을 승가교육의 기본목표로 설정하고 의무교육제도 도입을 제안했다. 의무교육은 안정적 교육체제 정착을 위한 선결과제였다. 실제 1992년 조계종 총무원의 종무보고서에 따르면 전체 승려의 14.1%가 기본교육을 기피하거나 아무런 교육도 받지 않은 상태였다. 여기에 기본교육과정을 거치지 않고 선원에 입방한 초심자를 포함하면 기본교육 미이수자가 최소 30%를 넘는 수준이었다.

선우도량은 교육체계도 기초·기본·전문교육으로 나눠 행자교육원과 승가대학, 학림을 설치해 각각의 역할을 담당하도록 했다. 이 같은 선우도량의 ‘교육개혁안’은 1994년 출범한 개혁종단이 교육제도의 골격을 만드는 토대가 됐다.

선우도량은 교육개혁안을 종단에 제출하며 즉각적인 시행을 요구했다. 그러나 종단 집행부의 반응은 차가웠다. 기득권 연장을 당연시하던 종단 집행부로서는 스님들의 의식변화가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종단 집행부는 끝내 선우도량의 교육개혁안을 수용하지 않았다.

당시 선우도량 교육위원이자 사무처장이었던 현응 스님은 “승가교육문제는 승단의 사활이 걸려 있는 절체절명의 과제로써 더 이상 미룰 일이 아니었다”며 “그럼에도 종단 집행부는 승가교육문제를 해결할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선우도량이 종단개혁의 전면에 뛰어든 것도 이런 요인이 크게 작용했다. 이 무렵 사회민주화와 통일운동을 견인했던 진보세력들이 종단 내부문제에 관심을 돌리기 시작하면서 종단개혁 논의가 무르익고 있었다. 진보세력들은 1992년 발족된 실천불교전국승가회(실천승가회)를 중심으로 제도개혁에 대한 목소리를 높였다. 급기야 1994년 1월 의현 총무원장이 연루된 ‘상무대 비리사건’이 불거지면서 진보세력들은 개혁을 위한 단일화를 제안했다. ‘범종단개혁추진위(범종추)’ 구성 논의가 그것이었다.

그러나 선우도량은 당시 유보적인 입장을 보였다. 종단개혁에는 뜻을 같이 하지만, 방식에 있어서는 생각이 달랐다. 출가자 개개인의 의식변화를 통한 개혁이 가장 불교적인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당시 선우도량 상임대표 도법 스님은 “범종추 구성 자체를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선우도량이 전면에 나서는 것에는 생각이 달랐다. 직접적인 제도개혁보다는 출가자의 사상적 의식변화를 개혁의 목표로 내세운 선우도량이 전면에 나서는 것은 맞지 않는다고 판단했다”고 술회했다. 그러나 이 같은 선우도량의 행보에 개혁세력 내부에서도 불만이 적지 않았다. 실제 1995년 3월 남원 실상사에서 열린 제8차 수련결사에서 실천승가회 초대의장 청화 스님은 “범종추가 창립되기 이전까지 선우도량은 교단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진 섬이었다. 처음부터 뜻을 함께한 것이 아니라 승가나 재가단체에서 뚝 떨어진 고립된 섬으로 있다가 뒤늦게 필요가치를 인정해 도중에 뛰어든 것이었다. 이 부분에 대한 냉정한 자기반성이 있어야 한다”(선우도량 7호, 1995.7)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1994년 3월 의현 스님의 3선 강행은 선우도량이 개혁의 전면에 나설 수밖에 없도록 했다. 선우도량은 범종추 출범에 앞서 ‘단식 정진과 비폭력, 종권 불참여’를 개혁운동의 전제로 내걸었다. 순수성이 담보되지 않으면 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실천승가회의 강한 실천의지와 선우도량의 전통회복 열망이 결합되면서 마침내 의현 총무원장 체제는 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개혁종단 출범 이후에도 선우도량의 활동은 꾸준히 이어졌다. 남원 실상사를 중심으로 정기적인 수련결사를 이어갔고, 수행법을 주제로 선우논강을 진행했다. 그러나 도법·지환·혜담 등 1기 집행부 스님들이 2선으로 후퇴하면서 선우도량도 쇄락의 길을 걸었다. 1998년 2월 제14차 모임을 끝으로 수련결사는 막을 내렸다.

‘결사’라는 실천운동을 통해 불교개혁을 추진했던 선우도량은 한국불교에 적지 않은 변화를 이끌었다. ‘본질적 개혁은 제도가 아니라 교육을 통한 승가의 의식변화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선우도량의 개혁론은 현대한국불교가 추구해야 할 이상이었다. 오랜 기간 수련결사 등을 통해 이뤄낸 교육체계와 종헌종법의 골격은 훗날 조계종의 교육과 포교, 행정의 틀을 만드는 토대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종단개혁의 뚜렷한 주체로서 여전히 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음에도 선우도량이 스스로의 변화와 역동성을 상실함으로써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239호 / 2014년 4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 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