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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전도(顚倒) 된 생각

기자명 혜국 스님

“참됨 구하려 하지 말고 오직 망령된 견해만 쉴지니…”

▲ 조주 스님의 사리탑이 봉안되어 있는 백림선사.

“수유반조(須臾返照)하면 승각전공(勝脚前空)이라.”

잠깐사이 돌이켜 비춰보면 앞의 공(空)함보다 뛰어남이라, 사실 진리에서는 잠깐과 영원을 둘로 보지 않습니다. 잠깐사이 돌이켜 비춰봤다는 얘기는 “눈을 뜨면 즉, 마음의 눈을 뜨면 앞의 공(空)함보다 뛰어남이라” 이런 말입니다. 우리는 영원이라고 하면 긴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잠깐은 매우 짧은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시간이라는 실체가 있다면 그렇게 볼 수 있겠지만 시간은 고정된 실체가 없습니다. 모두가 우리 생각놀음에 속고 있는 겁니다. 길다, 짧다고 하는 그 생각마저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파도 저절로 사라지니
파도 없애려 하지말고
바람만 잠재우면 그만

바닷물서 파도 일어나듯
공에서 모든생각 일어나
공은 불평등 자체 없어

꿈에서 깨어난 그 상태
생각서 벗어난 그 상태
바로 공(空)이라 일컬어

수유반조(須臾返照)란 생각의 속임수에서 벗어남을 말합니다. 그러니 전공(前空)보다 뛰어남이라고 이름을 붙인 겁니다. 여기에서 전공(前空)이라 함은 목전공(目前空)을 말함인데 눈앞에 모든 것이 공했다 아니다 하는 분별이 남아있는 공입니다. 내 자신이 공했다면 전공(前空)이니 후공(後空)이니 말할 사람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있고 공(空)이 있다는 것은 이미 양변에 떨어졌다는 얘기입니다. 상대성에 속은 거지요. 그래서 삼조 스님은 잠깐 동안 바로 비추는 일이 자성(自性)을 바로 깨치는 일이라는 사실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돈오(頓悟)라고 하신 겁니다. 홀연히 자성(自性)을 보는 데는 시간자체가 없기 때문이니 그냥 몰록이라고 하셨을 뿐 법(法)자체에는 돈오(頓悟)니 점수(漸修)니 따로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그래서 “잠깐 돌이켜 비춰보면 앞의 공(空)함보다 뛰어나리라”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겁니다. 그만큼 자성을 돌이켜 보는 일이 수승함을 강조하는 말씀이겠지요.

“전공전변(前空轉變)은 개유망견(皆由妄見)”이니 “앞의 공(空)함이 전변(轉變)함은 모두 망견(妄見) 때문이니”라고 이어집니다. 사실 망견 아닌 게 없을 만큼 우리는 망견에 많이 속고 있습니다. 망견이란 허망 되게 본다는 말로서 잘못 본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자면 코끼리는 무게가 무겁다고 생각하고 토끼나 또는 강아지 무게는 가볍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바로 망견입니다. 눈에 보이는 환영, 모양에서 볼 때는 코끼리는 무겁고 강아지는 가볍다고 생각되지만 생명의 무게에서 볼 때 생명의 무게는 꼭 같습니다. 그러한 면이 불교의 심오함이고 참으로 훌륭함입니다. 부처님께서 과거 전생의 수행자로 수행할 때 매에게 쫓긴 비둘기가 부처님을 찾아 날아 들어옵니다. 부처님은 두말 안하고 비둘기를 숨겨줍니다. 뒤따라 날아온 매가 “그 비둘기는 내가 먹어야할 양식이다. 그 비둘기를 나에게 돌려주라”고 하니 부처님께서는 못하겠다고 합니다.

“어떻게 나를 믿고 살려달라고 나를 찾아온 비둘기를 잡아먹으라고 내줄 수가 있느냐? 나는 못하겠다.”

그러니 매가 “그럼 비둘기 생명만 소중하고 내생명은 소중하지 않느냐?”고 하니 부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러면 비둘기 무게만큼 내 허벅지 살을 끊어주면 되겠느냐?”고 하십니다. 이러한 말이 우리가 들을 땐 추상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오직 중생을 위해서, 진리를 위해서 살아가시는 그러한 보살들은 능히 하고도 남을 일입니다.

“그럼 그렇게 하자. 단 비둘기 무게만큼 달라.”

그렇게 해서 허벅지살을 비둘기만큼 끊어서 저울에 달았습니다. 그런데 비둘기 보다 훨씬 더 많이 올려놨는데도 비둘기 쪽이 무거운 겁니다. 나중에는 끊어놓을 수 있는 모든 살을 끊어놔도 비둘기가 더 무겁게 나오는 겁니다. 할 수 없이 부처님 전신인 그 수행자가 자신의 몸을 저울에 올리니까 그때서야 비둘기와 그 수행자가 평행을 이루는 겁니다. 그 말은 비둘기 생명의 무게나 사람의 생명 무게나 코끼리 생명의 무게나 꼭 같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세계에서 볼 때는 모든 시비 분별은 마음을 깨닫지 못해서 주인이 주인 노릇을 못하는 데서 생기는 일이 됩니다. 망견(妄見)이란 결국 그 평등(平等)한 마음, 청정(淸淨)한 마음을 버려두고 번뇌 망상하자는 대로 감정의 노예노릇 한다는 얘기입니다. 결국 마음 깨닫지 못해서 생긴 일이니 그 마음을 깨달아야 한다는 그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망견(妄見)이라는 그림자는 있는 것 같지만 실제는 없는 것이거든요. 성성적적(惺惺寂寂)한 그 마음을 바다라고 한다면 망견(妄見) 즉 파도는 번뇌(煩惱) 망상(妄想)입니다. 그런데 그 파도는 본래 없는 것이거든요. 바람 때문에 마치 파도라는 실제가 있는 것처럼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망견에 속은 거지요. 그러나 한번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파도란 바람에 의해서 바닷물이 변형된 모습이지 파도란 세계는 없는 것 아닙니까? 그냥 그대로 공이거든요. 실상을 바로 보면 그냥 고해 속에서 바로 열반적정(涅槃寂靜)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번뇌(煩惱) 즉 보리(菩提)라, 보리와 번뇌를 같이 보는 겁니다. 마음, 마음, 마음이여! 모양도 빛깔도 없는 이 마음을 어찌 찾는단 말입니까? 마음을 찾는다는 말은, 마음을 깨달아야 한다는 말은, 모양 없는 그 마음을 찾으려 하지 말고 그 마음을 바로 쓰는 길이 곧 마음을 깨닫는 길입니다. 마음을 바로 쓴다는 말은 그냥 감정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잘 쓰는 그런 말이 아니라 무념위종(無念爲宗)이요, 무상위체(無相爲體)요, 무주위본(無住爲本)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밉다고 미워하는 그 마음을 역력하게 아는 각성(覺性)이나 사랑스럽다고 사랑하는 마음을 아는 각성(覺性)이나 그 역력한 마음에는 사랑과 미움이, 둘이 없습니다. 진공(眞空)에 둘이 있을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그림자인 마음을 실체로 잘못 생각하고 미워하는 그림자를 따라가고 사랑한다는 그림자를 따라가는 고로 바로 생멸(生滅)이라, 윤회(輪廻)가 시작되는 겁니다.

2002년도 행복지수조사에서 보면 가난하기로 유명한 방글라데시가 1위를 했다고 합니다. 2011년에는 히말라야 밑에 조그마한 부탄이라는 나라가 1위를 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방글라데시를 도와주어야한다고 구호품을 보낸 적이 있는데 생각해보면 참 알 수 없는 일 아닙니까. 그들은 행복하고 세상이 살만하다고 참으로 환희에 차서 사는데 그런 이들에게 도와주고 있다는 우리는 불행하고 세상이 힘들어서 자살률이 점점 높아가는 이러한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참 알 수 없는 일이거든요. 행복한 사람에게 불행한 사람이 도움을 받아야 그게 정상일텐데 세상이 힘들어 자살까지 하는 불행한 사람들이 행복한 이들을 제대로 도와줄 수 있는 걸까, 알 수가 없는 일입니다. 전부 망견에서 생기는 일이라고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황벽 스님 같은 분은 그러한 망견(妄見) 생사윤회(生死輪廻)에서 벗어나기가 어디 쉬운 일이랴, 정말 한번 죽을힘을 다하여 수행을 하라. 찬 기운이 뼛속까지 사무친 뒤에라야 매화 향기가 코끝을 찌르리라. 이러한 황벽 스님의 가르침은 현재 우리들에게 가장 새겨들어야 할 말씀 중 하나입니다.

파도가 바닷물에서 일어나듯이 모든 생각은 공(空)에서 일어납니다. 공(空)에는 불평등이 없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상태, 생각의 감옥에서 벗어난 상태를 공(空)이라고 이름 합니다. 착각에서 벗어나는 길, 그 길이 곧 불교요, 인류를 구하는 길입니다. 너와 나, 인간과 우주가 둘이 아닌 사실을 깨닫고 서로 상생(相生)의 길로 간다면 지금 지구상의 자원을 가지고 지금 인구의 70배가 먹고도 남는답니다. 서로 더 많이 차지하려고 투쟁의 길로 가기 때문에 지금 현재 인구가 쓰기도 모자라 굶주리는 나라가 많다는 사실을 볼 때 평등(平等)의 공(空), 실상(實相)의 공(空)을 체득하는 길이 참으로 인류를 구하는 길임을 깊이 믿어야 하겠습니다.

그 다음 “불용구진(不用求眞)이요 유수식견(唯須息見)이라”, 참됨을 구하려 하지 말고 오직 망령된 견해만 쉴지니라,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입니까? 이 얼마나 향기 나는 공(空)의 언어입니까? 파도를 없애려고 하지 말고 바람만 잠재워라. 파도는 저절로 없어진다는 이런 가르침을 들을 수 있는 복이 어찌 작은 복이겠습니까? 스승들이 당신 생명을 다 바치고 애쓰고 애쓴 수행에서 직접 체험하고 대자비로 하신 말씀이니까요. 참됨을 구한다는 것은 참됨을 모르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참으로 참됨은 연기공성(緣起空性)이요, 중도(中道)라 참됨이 없기 때문에 그 이름을 참됨이라고 하신 것이거든요.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여러분들 가운데 누가 눈(目)을 찾아 나섰다고 합시다. 눈(目)으로 눈(目)을 볼 수가 없어서 눈이 없다고 눈을 찾아 달라고 오만데 찾아다니다가 집에 돌아와서 거울 앞에 섰다고 합시다. 이 사람 이마에 눈이 그냥 있거든요. 이 사람이 눈을 찾았다고 좋아한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잃어버렸던 눈이라면 찾았다고 하겠지만 본래 잃어버린 일이 없었지 않습니까? 그러니 찾았다는 말이 성립될 수가 없거든요. 본래 잃어버린 일이 없었으니 뒤늦게나마 착각에서 깨어난 것이거든요. 그래서 참됨이 아니라 이름이 참됨이라 하신 겁니다. ‘금강경’에서도 반야바라밀이 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라고 하신 겁니다. 그것이 무엇이었던 간에 구하는 마음 즉, 욕망이 앞서는 한은 참됨이 아닙니다. 그런 까닭에 참됨을 구하려 하지 말고 망령(妄靈)된 견해(見解)만 쉬라고 하신 겁니다. 잃어버린 일이 없는 눈을 찾으려는 그 마음을 쉬라는 말입니다. 그러려면 우주와 내가 둘이 아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안에 완벽하게 갖추어진 그 세계를, 그래서 임제 스님은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부처를 구하면 부처를 잃게 되고 조사(祖師)를 구하면 조사(祖師)를 잃게 되고 도(道)를 구하면 도(道)를 잃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표현한 임제 스님의 말씀도 말에 떨어져버리면 부처도 구하지 말아야하고 조사도 구하지 말아야 하고 도(道) 역시 구할게 없다는 말로 잘못 듣게 됩니다. 이렇게 들었다면 그것은 참으로 전도(顚倒) 된 생각으로 들은 것입니다.

이 말씀은 생각의 세계를 벗어나 부처니 조사니 도라는 말이 흔적까지도 초월해서 양변을 떠난 중도연기(中道緣起)를 바로 깨달아야 한다고 고구정녕(苦口丁寧) 가르치는 소중한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됨을 구하려고 마음을 일으킬게 아니라 오직 일어나는 모든 망령된 견해만 쉴지니라”고 하신 겁니다.

 

[1239호 / 2014년 4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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