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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삼각산 흥천사

기자명 김택근

담장 허물고 절이 먼저 절하니 주민들이 웃었다

▲ 고층아파트에 둘러싸여 있던 삼각산 흥천사가 조금씩 옛 도랑의 정갈한 모습을 되찾아 가고 있다. 경내에까지 무분별하게 들어서 있던 무허가 주택들을 정비하고 높게 쳐진 담장을 허물자 도량이 다시 산의 품에 안겼다. 정념 스님이 주지로 부임한지 채 3년도 안되는 짧은 시간 동안 일어난 흥천사의 변화는 그야말로 괄목할 만 하다. 하지만 주민 곁으로 더욱 가까이 다가 가겠다는 정념 스님의 진짜 불사는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산자락을 인간의 집터로 내주고 북한산(삼각산)은 뒤로 물러앉았다. 구불구불 골목길은 주택과 고층아파트를 헤치며 산을 오른다. 제법 가파른 길을 따라 언덕을 오르면 홀연 넓은 경내가 펼쳐진다. 북한산 남쪽 끝자락인 서울 성북구 돈암동 595번지, 그 곳에 흥천사(주지 정념 스님)가 있다. 경내에는 불사가 한창이었다. 주위를 살피니 회색 아파트들이 절을 굽어보고 있다. 개발의 끊임없는 유혹을 물리치고, 고찰의 향기를 머금고 있는 흥천사가 문득 고마웠다.

흥천사는 원래 조선시대 태조 이성계의 명으로 세워진 신덕왕후 강씨의 능찰이었다. 태조는 강씨를 무척 사랑했다. 두 사람의 나이차는 21살이었다. 무장(武將)의 아내로 묵묵히 곁을 지켰던 본처 신의왕후와는 사뭇 달랐다. 권문세가의 딸인 강씨의 손길은 섬세했고 정치력까지 갖추고 있었다. 이성계는 강씨만을 찾았다. 그러던 왕후가 죽었다. 태조는 죽어서도 곁에 두고 싶었다. 왕궁에서 가까운 언덕 서부 황화방(서울시 중구 정동)에 왕후를 눕히라 하고 정릉이라 이름 붙였다.

이듬해 묘역 동쪽에 신덕왕후의 능침사찰을 짓도록 했다. 흥천사는 태조 6년(1397년) 8월에 완공, 그 위용을 드러냈다. 사찰은 170칸이 넘었고 단청이 영롱했다. 왕은 흥천사의 범종소리를 듣고서야 수저를 들었다. 이어서 태조 7년 절 북쪽에 5층 규모의 사리전(舍利殿)을 세우고 통도사에서 사리불을 모셔와 봉안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가장 화려했으니 경복궁 근정전의 위엄을 뛰어 넘었다고 한다.

태조가 죽자 태종은 곧바로 계비 강씨 무덤을 성 밖 북한산 기슭으로 이장했다. 이방원은 강씨에 대한 원한이 사무쳤다. 강씨의 입김 때문에 본처 소생 왕자들은 소외되고 강씨의 아들(방석)이 세자로 책봉됐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는 왕자의 난을 불러왔고, 난을 일으킨 이방원은 패륜을 저지른 한을 품고 평생을 살아야 했다. 이방원은 봉분을 깎아 평지로 만들어 정릉의 흔적을 지워버리라 했다. 묘역 내 석물은 해체하여 청계천 나무다리를 돌다리로 보수하도록 했다. 백성들은 돌다리를 지나다니며 강씨의 위엄을 밟았다.

정릉은 도성 밖으로 쫓겨났지만 흥천사는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었다. “흥천사를 만세에 전하라”는 이성계의 유언을 거역할 수 없었다. 이미 흥천사는 도성 내 명소였고 왕실의 주요 행사는 흥천사에서 치렀다. 그러나 사림 세력은 ‘도성 안의 사찰’을 끊임없이 견제하고 탄압했다.

태조가 세운 신덕왕후 능찰
계모에 원한 사무친 이방원도
흥천사 만은 훼손하지 못해

유생들 방화로 소실된 후
대원군 앞장서 도량 복원

통합종단 이후 복마전 무대
2011년 정념 스님 주지 부임
도량 정화불사로 ‘환골탈태’
24시간 열린 도량 변모 준비

후세에 부끄럽지 않으려
두렵고 조심하는 마음이
주민과 절 사이에 길 열어

숭유억불 정책 속에서도 근근이 법등을 밝히던 흥천사는 연산군 10년(1504)에 화재로 전각이 거의 타 버렸다. 사리전 만이 남아 있었다. 그 사리전마저 중종 5년(1510)에 유생들이 몰려와 불을 질렀다. 한 밤의 불길에 온 도성이 환했다고 한다. 흥천사는 그렇게 사라졌다. 이제 그 터마저 정확히 알 수 없다. 흥천사의 동종(보물 1460호)만이 동대문, 광화문 등 도성 안 곳곳을 떠돌며 구슬프게 울다가 지금은 덕수궁에서 쉬고 있다.

한편 삼각산으로 옮겨간 정릉은 신흥암이라는 조그만 암자가 지키고 있었다. 산자락에 엎드려 있던 정릉은 현종 10년(1669)에서야 능을 보수했다. 그때 암자가 너무 능 가까이 있다고 해서 합취정(合翠亭) 터로 이건하고 중창하여 신흥사(新興寺)라 했다. 그 후 정조 18년(1794)에 현재의 위치로 다시 옮겼다. 그러다 고종 2년(1865)에 흥선 대원군이 앞장서 전국에서 시주를 받아 절을 중창했다. 불에 타 사라진지 355년이 지나 다시 역사에 흥천사가 등장한 것이다. 대원군은 ‘흥천사(興天寺)’라는 편액을 내렸고 이는 지금도 대방에 걸려 있다. 이후 왕족과 사대부, 상궁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고종의 아들 영친왕도 5살 때 찾아와 글씨를 남겼다.

▲ 흥천사에 보관돼 있는 탱화. 일제시대 제작된 이 탱화에는 당시의 혼란한 사회상이 그대로 담겨 있다.

흥천사는 한국전쟁 중에서도 무사했다. 근처 아리랑고개에서 치열한 교전이 있었지만 흥천사는 화를 입지 않았다. 극락보전(서울시 유형문화재 66호)과 명부전(67호)이 살아남았다. 전쟁 이후에도 왕실과의 인연은 끝나지 않았다. 마지막 임금 순종의 황후인 순정효황후 윤씨가 흥천사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피난지에서 돌아와 보니 윤씨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윤씨는 쌀 한 홉으로 하루를 지냈는데 그 한 홉에서도 한 줌씩 떼어 향을 사서 사르며 기도했다고 한다. 조선 최초의 왕후인 강씨의 유택을 지킨 절이 조선 최후의 왕후인 윤씨의 여생을 지켜주었으니 이는 우연이 아닐 것이다.

▲ 기울어져가는 극락보전에 응급조치로 나무기둥을 세웠다. 아직도 도량 곳곳에는 보수와 정비의 손길이 필요하다.

왕실의 원찰이었지만 조계종 통합종단 출범이후 불미스러운 일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마치 북한산에서 여우들이 내려온 것 같았다. 복마전이나 다름이 없었다. 실로 어디서부터 손을 봐야 할지 몰랐다. 종단에서는 주지스님을 찾았다. 삿된 것들을 몰아낼 적임자를 물색했다. 그리고 이내 정념 스님에 주목했다. 정념 스님은 불에 탄 낙산사를 완벽하게 복원해서 그 명성이 종단 안팎에 쌓여 있었다. 그러나 정념 스님의 ‘낙산사 불사’에는 특별한 만큼 눈물겨운 사연도 많았다.

2005년 4월5일 식목일 오후에 낙산사에 대형 산불이 일어났다. 화마는 초속 30미터의 강풍을 타고 홍예문을 사르고 삽시간에 경내로 쳐들어왔다. 붉은 혀는 원통보전을 비롯하여 전각들을 차례로 삼켰다. 종각의 불은 물을 뿌리는 소방차마저 태워버렸다.

막 한 달 전에 주지로 부임한 정념 스님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다 생각난 듯 의상대로 달려갔다. 어떻게든 홍련암은 살려내야 했다. 홍련암은 의상대사의 낙산사 창건설화가 스며있었다. 홍련암이 있어 낙산사가 있었다. 정념 스님은 기도했다.

“부처님, 저희 죄가 깊습니다. 하지만 제발 홍련암만은 살려주십시오. 홍련암만 살아있다면 모든 것을 다시 세우겠습니다. 부처님.”

스님의 뒤를 쫓아온, 화기를 품은 바람이 스님의 뺨을 때렸다. 정념 스님은 흐느껴 울었다. 순간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바다 쪽에서 맞바람이 불어왔다. 이내 화마가 홀연 빠져나갔다. 홍련암을 노려보던 바람들도 사라졌다. 정념스님은 홍련암으로 달려갔다.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홍련암은 그렇게 살아남았다. 그날 함께 살아남은 것은 7층 석탑과 별무늬 꽃담장 뿐이었다.

그날 이후 정념 스님은 복원불사에 매진했다. 이왕 다시 지을 바엔 제 모습을 찾고 싶었다. 김홍도가 그린 ‘낙산사도’를 모델로 삼았다. 마침내 정념 스님은 눈물의 서원을 지켰다. 2009년 10월 복원불사 회향식을 봉행할 수 있었다. 새 절 낙산사이건만 오히려 그 옛날 모습을 닮았다. 그림 속의 단아한 자태를 재연했기에 정갈하고도 사랑스러웠다. 정념 스님은 회향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화마를 겪으면서 물길, 사람길을 막으면 안 되듯 바람길도 인위적으로 막으면 안 되겠다는 인식을 하게 되어 오봉산 고유의 지형을 거스르지 않고 사람길과 바람길을 열어두는 방향으로 불사를 진행했습니다.”

▲ 정념 스님은 흥천사에 일반인들이 자유롭게 출입하는 신행복합타운을 조성하겠다는 원력을 갖고 있다.

그런 정념 스님에게 흥천사 복원의 소임이 맡겨졌다. 스승인 오현 스님과 총무원장 자승 스님의 간곡한 요청을 뿌리칠 수 없었다. 2011년 10월 흥천사에 부임해보니 절은 있되 갇혀 있었다. 주민들의 출입을 막기 위해 높은 담을 쳤다. 스스로를 격리시키고 있었다. 경내에는 22가구 80여 세대의 집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었다.

정념 스님은 낙산사와는 또 다른 불사를 시작했다. 그것은 자연과 전통문화와 역사와 사람이 어울리는 신행공간의 조성이었다. 경내를 차지하고 있던 민가들은 이주비를 주고 모두 철거했다. 둘러친 담장을 허물었다. 그랬더니 흥천사가 엄청나게 커져버렸다. 주민들 통행을 위해 경내를 내주었다. 그랬더니 주민들이 덕담 하나씩을 던지며 지나다녔다. 절이 먼저 절하니 주민들이 웃었다. 흥천사가 주민들을 초청하는 잔치를 열면 천 명이 넘게 와서 넓은 경내를 채운다. 지난해에는 8차례나 주민잔치를 벌였다. 정념 스님은 주민들이 정녕 고마웠다. 작은 노력에도 즐거워하는 이웃이 있음이 곧 가피였다.

▲ 정념 스님이 주지 소임을 맡은 후 새로 개원한 삼각선원.

정념 스님의 불사의 정신은 무엇일까. 그것은 두려움이다. 역사에게도, 자연에게도, 주민에게도 두려운 마음으로 다가갔다. 그래서 묻고 또 물었다. 심지어 바람에게도 물었다. 그 두려운 마음은 미래에 닿아 있다. 이 땅에서, 이 절에서 다시 부처님을 섬길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으려면 얼마나 조심하며 두려워해야 할 것인가. 그래서 나무 한그루와 풀 한 포기도 허투루 보지 않았다. 흥천사에는 오늘도 불사가 계속되고 있다. 지난 3월25일에는 어린이집 기공식이 있었다.

우리나라 사찰은 수행자들의 의식공간은 많지만, 일반인들의 신행공간은 마련해 놓지 않고 있다. 그러나 정념 스님의 생각은 다르다. 일반인들이 자유롭게 출입하는 신행복합타운을 조성하고 싶다. 사찰을 24시간 개방하여 주민들이 편히 찾는 열린 공간으로 변모시킬 작정이다. 그리 되면 직장인들이 퇴근 후에 절을 찾아와 간편한 법복으로 갈아입고 여가활동을 할 수 있다. 집안에서 지내는 제사도 절로 끌어들일 생각이다. 주민들의 제수비 부담을 덜어주고 무엇보다 엄숙한 의식을 제대로 치러 점점 조상섬기기가 어려워지는 이웃들을 도와줄 계획이다. 절과 함께 제사를 챙기면 자손들은 잊지 않고 조상을 기리게 될 것이다.

스님은 자비보다 귀한 법문은 없다고 했다. 끊임없이 베풀고 소통하면서 흥천사는 변모하고 있다. 왕실의 근엄한 원찰에서 백성들의 친근한 사찰로 내려서고 있다. 흥천사 경내에는 300살이 넘는 느티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담장과 민가에 치여 큰 덩치로 눈치를 보던 나무는 이제 듬직한 체구를 흔들며 넓은 경내를 지키고 있다. 누군가 나무를 보며 말했다.

“비로소 나무가 부처님 말씀에 귀를 여는 것 같습니다.”
 
김택근 본지 고문 wtk222@hanmail.net
 

[1239호 / 2014년 4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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