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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개혁세력의 성장 - ③ 재가단체

대불련·경불련·‘선우’ 등 결합…의현 원장체제 붕괴

▲ 1994년 조계종 개혁은 재가자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1994년 3월 실천승가회, 선우도량 등 승가단체가 범종추를 구성하자, 17개 재가단체도 ‘재가불자연합’을 창립해 개혁의 전면에 나섰다. 종단개혁기념사업추진위 제공

“범종단개혁추진위(범종추)에 이어 재가불자연합이 종단개혁에 가담함으로써 종단개혁 초기 총무원과 언론으로부터 ‘종권다툼’이라는 비난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다.”(박수호, ‘사회운동으로서의 조계종 종단개혁운동’, 동양사회사상 11집)

재가불자는 1700년 한국불교사의 버팀목이었다. 이차돈의 순교로 신라불교가 공인될 수 있었고, 김대성과 같은 인물이 있었기에 화려한 불교문화가 꽃필 수 있었다. 고려불교의 토대는 지식인 불자들이 다졌고, 숭유억불의 조선시대를 거치면서도 불교가 존속될 수 있었던 것은 재가불자들의 지극한 신심이 무엇보다 컸다. 1950~60년대 소수의 비구승들이 불교정화 운동을 펼칠 수 있었던 것도 재가불자들의 강력한 지지가 원동력이 됐으며, 이는 1994년 조계종 개혁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1994년 종단개혁은 출재가가 중심이 돼 종단의 구태를 혁신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실천불교전국승가회(실천승가회)와 선우도량 등 승가단체들이 개혁의 물꼬를 텄다면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대불련)·우리는 선우·경제정의실천불교시민연합(경불련) 등은 개혁을 이끄는 밑바탕이 됐다. 1994년 종단개혁이 1970~80년대 ‘종권다툼’과 다른 평가를 받는 것도 중립지대에 있던 재가불자들의 참여 때문이었다.

1994년 종단개혁을 이끈 재가단체는 크게 세 그룹으로 분류된다. 대불련 등 사회민주화를 견인했던 민주운동 계열과 경불련·우리는 선우 등 시민운동단체, 교수 등 지식인 그룹이었다. 각기 다른 분야에서 불교운동을 전개하던 이들이 하나로 합칠 수 있었던 것은 오랜 기간 계속돼 온 종단의 구조적 모순이 자리했다. 특히 1990년대 들어 의현 총무원장을 중심으로 한 기득권층의 정권예속화와 재정비리 등은 당시 불교계의 고질적인 병폐 가운데 하나였다. 불교의 자주화와 교단운영의 민주화는 승가단체 뿐 아니라 재가단체들에게도 당면과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재가자는 한국불교 버팀목
승가단체가 개혁물꼬 트고
재가단체는 개혁 동력세력

대불련 등 민주화 세력에
경불련 등 시민운동 단체
교수 등 지식인 합류하면서
불교 자주·민주화 이끌어

개혁 이후 재가연합 구성
재가 종단참여 요구했지만
스님들 반발에 끝내 좌절

종단개혁은 1970~80년대 민중불교운동을 토대로 사회민주화에 앞장섰던 대불련·동국대 불교학생회 등 학생 민주화 세력들이 이끌었다. 1963년 박성배·서경수가 중심이 돼 창립된 대불련은 신행운동으로 출발했다. ‘한국 재가불교운동의 실태와 과제’(김재영, 동아시아불교문화 4집)에 따르면 초기 대불련은 전창렬·이용부·명호근·김규칠·박세일·권경술·김선근 등 14명의 대학생들이 주축을 이뤘다. 이들은 인재양성을 발원한 광덕 스님의 대폭적인 지원으로 서울 뚝섬 봉은사에 수도원을 설립하고 활동력을 키웠다. 대불련은 1970~80년대 들어 놀라운 성장을 이뤘다. 서울대를 비롯해 동국대·고려대·한양대·중앙대·숙명여대·성신여대·동덕여대 등 전국 100여개 대학에서 수천 명의 청년 대학생들이 속속 가입했다. 대불련은 ‘한국불교 1600년 대회(1600년 대회)’와 농활 등을 통해 새로운 신행운동을 이끌었고, 승가에도 지식과 교양을 갖춘 엘리트 출가자들을 배출하는 토대를 만들었다. 대불련이 사회참여운동에 나서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민주화 운동기(1980~1994)의 불교와 국가권력’(김광식, 대각사상 17집)에 따르면 1970년대 중반 민중불교운동이 태동했다. 민중불교운동은 고은·황석영·여익구·고준환·최연·전재성 등이 1975년 서울 개운사에서 스터디 모임을 진행하면서 무르익었다. 특히 대불련 회장이었던 전재성이 1976년 완주 송광사에서 열린 1600년 대회에서 ‘민중불교론’을 발표하면서 민중불교운동은 급속히 확산됐다. 이후 대불련은 민중불교운동을 바탕으로 사회참여에 적극 나섰다.

민중불교운동은 1985년 민중불교운동연합(민불련)이 발족되면서 꽃을 피웠다. 민불련은 대불련 출신 민주화 세력과 진보적 성향의 젊은 승려 그룹이 중심이 된 단체였다. 이들은 ‘민중의 고통해방과 자주·민주적 불교 건설’을 목표로 반독재민주화 운동의 전면에 나섰다. 1987년 6·10민주항쟁에도 적극 가담했다.

사회민주화의 진척은 민주화운동 진영의 성과였지만 운동 동력을 잃게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군부독재를 무너뜨리고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뽑는 직선제가 시행되면서 민주화 세력은 뚜렷한 운동 목표를 상실하게 된 것이다. 이런 가운데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남북 공동 올림픽 개최’가 새로운 이슈로 부각되면서 민주세력의 시선은 통일로 옮겨 갔다. 이런 사회적 흐름에 따라 교계에서도 통일과 민족문제에 관심이 커지기 시작했다. 민중불교운동을 주도했던 출재가 민주세력들이 1988년 12월 ‘민족자주·통일불교운동협의회(통불협)’를 발족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 비롯됐다. 통불협은 1990년대 초 민중불교운동의 대표 단체로서 민족자주와 통일운동을 견인했다. 그러나 1992년 문민정부의 출범을 앞두고 통불협 내부에서는 향후 운동 진로에 대한 고민들이 싹텄다. 더 이상 민중불교운동 노선으로는 대중적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결국 1993년 6월 통불협을 이끌었던 중심세력들은 해체를 선언하고 새로운 형태의 단체설립을 모색하게 된다.

1990년대 들어 교계에서도 시민운동의 성격을 띤 단체들이 속속 창립됐다. 경불련, 우리는 선우 등이 대표적이었다. 1991년 7월 발족한 경불련은 불교사상에 바탕을 두고 ‘경제정의실천과 복지, 사회 민주화’를 기치로 내걸었다. 출범과 동시에 이동무료급식를 운영했으며 소외된 이웃을 위한 성금모금 활동을 전개하는 등 불교계의 사회복지 사업을 견인했다. 인권문제에도 적극 가담했다.

1991년 12월 발족한 우리는 선우는 재가자들이 중심이 된 결사운동 단체였다. 이 시기 선우도량을 이끌었던 도법 스님의 영향을 받은 우리는 선우는 “재가불자들이 중심이 돼 불교 가르침 실천을 위한 올바른 신행활동”을 목표로 내걸었다. 이를 위해 △생활실천운동 △불교교육 및 포교 △복지사업 등을 전개했다.

이들 단체들이 종단 내부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93년 무렵이다.

김동흔 전 경불련 시민운영위원장은 “1993년부터 종단내부에서는 실천승가회 등 승가단체들을 중심으로 개혁논의가 진행됐다. 그러나 승가단체의 역량은 미미했다. 이들만으로는 의현 총무원장 체제를 극복할 수 없다고 봤다. 재가단체들이 종단개혁에 대한 역량을 모을 수밖에 없었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1993년 7월 실천승가회와 중앙승가대학생회, 대한밀교청년회, 대불련, 경불련, 통불협 수임위 등 출재가 18개 단체로 구성된 전국불교운동연합(전불련)은 이런 배경에서 출범했다. 전불련은 1970~80년대 불교자주와 민족통일을 위한 민중운동과 1990년대 시민운동을 포괄하는 새로운 형태의 불교운동 단체였다. 전불련이 활동범위를 민주·통일·인권·노동 등 사회운동, 환경보전·경제·사회정의실현 등 시민운동, 종단개혁 및 교권수호, 불교사상 및 정책 연구사업 등으로 설정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전불련은 1993년 7월31일 조계사에서 창립대회를 열고 공동의장에 지선 스님(상임의장)과 청화 스님을, 재가를 대표해 이문옥 전 감사관을 각각 선임했다. 당시 이문옥 전 감사관은 ‘시대의 양심’으로 평가됐다. 그는 1990년 감사원 재직 시절 대기업 감사를 통해 “23개 재벌계열사에서 비업무용 부동산이 전체소유의 43%나 된다”는 사실을 폭로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비록 공무상 비밀누설죄로 파면 구속됐지만 그는 그해 동아일보와 시사저널, 기자협회가 선정한 ‘올해의 인물’로, 경제정의 실천시민연합에서 시상하는 ‘경제정의를 실천한 시민상’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쌀 개방 반대’ ‘금융실명제 지지’, ‘주한미군 범죄규탄’ 등 사회정의 실현에 앞장서 온 전불련이 종단개혁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은 1994년 1월경이었다. 이 시기 의현 총무원장과 연루된 ‘상무대 비리의혹 사건’이 불거지자, 종단 안팎에서 개혁에 대한 목소리들이 커져 갔다. 전불련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부대중이 주체가 된 건강한 종단 건설’을 1994년 사업목표로 설정한 전불련은 본격적인 개혁논의를 진행했다. 이 무렵 전불련에 소속된 실천승가회가 선우도량 등 승가단체를 중심으로 범종추를 구성했다. 그러자 1994년 3월 대불청·대불련·우리는 선우·청년여래회·경불련·청년선재회·보리방송모니터 등 17개 재가단체들도 ‘불교를 바로 세우기 위한 재가불자연합’을 결성해 개혁의 전면에 나섰다. 개혁과정에서 범종추가 비폭력을 내세우며 조계사에서 단식농성에 돌입하자, 남지심 우리는 선우 공동대표도 단식 대열에 동참하면서 종단개혁에 대한 우호적인 여론을 만들었다. 여기에 성태용·박광서·정태혁 교수 등 불자교수와 불교지성인 등이 성명을 발표하며 개혁세력에 힘을 보태면서 마침내 의현 총무원장 체제는 무너졌다.

종단개혁을 이끈 재가자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1994년 7월23일 ‘한국재가불자연합(재가연합)’을 창립했다. 종단개혁 과정에서 확인한 재가불자들의 역량을 모으기 위해서였다. 전국 40여개 재가단체 3000여명이 동참한 재가연합은 ‘종단운영의 사부대중 공동참여’를 기치로 내걸었다. 출재가의 역할을 나눠 사찰의 재정과 행정은 재가자에게 맡기고, 스님은 수행과 법문 등 본연의 임무에만 충실할 수 있는 구체적인 제도 마련도 촉구했다. 그러나 이 같은 재가불자들의 열망은 스님들의 반발에 막혀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1994년 종단개혁의 한계이기도 하다. 그러나 개혁에 대한 충분한 고민 없이 종단개혁에 뛰어든 재가불교운동권의 한계이기도 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영철 전 대불련 지도위원장이자 전불련 사무처장, 재가불자연합 집행위원장은 “재가단체들도 개혁 이후에 대한 중장기 계획이 없었다. 의현 총무원장 체제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것에만 몰두했지, 개혁 이후에 대한 논의가 없었다. 이를 테면 분노만 했지, 실질적으로 어떻게 현실을 변화시킬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다”고 회고했다.

1994년 종단개혁은 출재가가 함께 종단의 구조적 모순을 혁신하고자 했던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불교의 이상인 ‘사부대중 공동체’ 실현은 쉽게 근접할 수 없는 요원한 과제임을 확인한 사건이기도 했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240호 / 2014년 4월 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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