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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김홍도 ‘매작도’

기자명 조정육

지혜로 이룩한 깨우침은 사라지지 않는다

“약에 의해 병이 나은 것처럼 뛰어난 수행력에 의해 모든 번뇌는 없어지고, 지혜는 사라지지만 깨달음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밀린다왕문경

자연을 소재로 봄 묘사 ‘매작도’
꽃을 피워내는 신비스런 힘처럼
지혜는 역할 다하면 사라지지만
그것으로 인한 깨침은 남아있어

▲ 김홍도, ‘매작도’, 1796년, 종이에 연한 색, 26.7×31.6cm, 삼성리움미술관.

그러니 그대여,
오늘은
내가 저이들과 바람이 나더라도
바람이 나서 한 사나흘 떠돌더라도
저 눈빛에
눈도 빼앗겨 마음도 빼앗겨
내 생의 앞뒤를 다 섞어버리더라도
용서해다오.
-복효근, ‘5월의 숲’ 중에서-

지금 내가 딱 그 심정이다. 자전거 타기 2주일. 쌩쌩 날아다니는 재미에 빠져 ‘내 생의 앞뒤를 다 섞어’ 버릴 정도로 흥분해 있다. 아직까지는 자신이 없어 아파트 단지 내에서만 타지만 그게 어딘가. 이 정도로 자신 있게 탈 수 있게 된 것을. 1동부터 7동까지 자전거로 왔다 갔다 하며 한 시간 내내 돌다보면 각 동 앞에 심어진 꽃나무를 서른 번도 더 보게 된다. 걸어서 가자면 한참 걸릴 거리인데 자전거를 타면 순식간이다. 뒤돌아선지 단 몇 분 만에 아까 봤던 매화꽃 앞에 벌써 도착해 있다. 마치 순간 이동을 한 것 같다. 이 동네 이사 온지 10년이 지났지만 올 해처럼 꽃을 골고루 보고 자주 보기는 처음이다.

각 동 앞을 연거푸 왔다 갔다 하는 사이 화단에 심어진 나무에서 나름대로의 일정한 규칙을 발견했다. 조경사가 꽃과 나무를 배치한 구상 같은 거다. 각 동 앞 화단 양쪽 끝에는 매화나무를 심었다. 청매화와 모과나무도 반드시 한 그루씩 심었다. 간혹 홍매화가 심어진 곳도 있다. 양쪽에 수문장처럼 심어진 매화와 매화 사이에는 단풍나무와 주목나무가 서 있다. 큰 나무들 앞에는 철쭉꽃이 울타리처럼 둘러서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어린아이가 키 큰 어른 앞을 아장거리며 걷는 것 같다. 철쭉울타리 뒤에서는 새싹들이 죽순처럼 하늘을 향해 죽죽 솟아난다. 햇볕이 잘 들지 않는 아파트 뒤쪽에는 벚꽃과 자귀나무, 감나무, 산수유 등이 자란다. 우리 동네에 이렇게 많은 꽃과 나무가 있었던가, 놀랍기도 하려니와 철저한 계산과 준비 속에서 심어졌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새로운 발견이다. 그런데 특이하게 101동과 107동에는 매화를 건물 앞쪽이 아니라 뒤쪽에 심었다. 왜 그랬을까. 아파트 안을 몇 바퀴 돌 때까지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자전거를 끌고 두 동 앞으로 가 봤다. 매화 대신 벚꽃을 심어놓은 것을 보고 조경사의 혜안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아, 그렇구나. 두 동은 다른 동과 달리 아파트 입구에 세워져 있어 도로와 가깝다. 차량 소음과 사람들의 시선을 차단하기 위해서는 키 작은 매화보다 키 크고 우람한 벚꽃이 필요했고 조경사는 그 상황을 예측한 것이다.

조경사가 달리 조경사가 아니었다. 내가 별 것 아닌 것으로 무시하는 것조차 사실은 별 것 아닌 것이 아니었다. 깊은 고민과 검토 속에서 나왔다. 꽃과 나무를 심은 조경사의 의중을 이해하고 나니 갑자기 그가 친숙해진다. 조금만 관심을 갖고 둘러보면 우리 주변에는 매화꽃이나 목련꽃처럼 나를 깨달음의 세계로 이끌어주는 화두가 곳곳에 들어 있지 않을까.

날마다 꽃을 보며 관찰하자니 싹이 터서 꽃이 피는 변화과정이 생생하게 확인된다. 2주 전에는 아무리 애타게 불러도 기척 없던 꽃송이들이 지금은 행여 불러주지 않나 대기하고 서 있다. 지난주에는 매화가 한창이더니 이번 주에는 개나리와 목련이 절정이다. 엊그제 내린 비로 매화꽃이 하나 둘 떨어진 자리에는 벚꽃이 슬슬 눈치 보듯 피어난다. 소리 없이 피고 지는 꽃들은 남루한 일상을 황홀하게 뒤덮는다. 여기에 새소리까지 들리니 더 이상 무엇을 바라랴. 나는 꽃과 나무에 ‘눈도 빼앗겨 마음도 빼앗겨’ 사나흘이 아니라 서른 날쯤 떠돌아다니고 싶은 심정이다.

풍속화가 김홍도(金弘道:1745-1806)는 꽃과 새를 그린 화조화가로도 유명하다. 그가 그린 ‘매작도(梅鵲圖)’는 이즈음의 자연을 그린 작품이다. 봄날의 절정을 목격한 사람만이 그릴 수 있는 걸작이다. 까치 두 쌍이 매화 가지에 앉았다. 지금은 천덕꾸러기로 전락했지만 까치는 예로부터 기쁜 소식을 알려주는 길조(吉鳥)로 환영받았다. 매화꽃이 피는 봄이 왔으니 새들도 즐겁다. 반가운 새가 좋은 계절이 왔음을 알려준다. 매화가지에서 놀던 까치 한 마리가 날개를 펴고 날아가자 세 마리 까치가 날아가는 까치를 보며 일제히 짖는다. 날개를 쫘악 펼친 까치 때문에 정적인 공간에 아연 활기가 돈다. 까악까악 짖어대는 까치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날아가는 까치가 그림에 움직임을 불어넣는다면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대나무는 균형감을 잡아준다. 고심 끝에 나온 구도다. 매화나무를 보니 벌써 잎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매화는 잎사귀보다 꽃이 먼저 피는 나무다. 잎이 날 때쯤이면 꽃은 거의 막바지다. 바로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저 매화다.
‘매작도’는 김홍도가 52세 때 그린 ‘병진년화첩(丙辰年畵帖)’에 들어 있다. 이 화첩은 김홍도가 연풍 현감을 그만둔 후 제작했는데 그의 기량이 최절정에 도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때문에 단순히 병진년에 그린 화첩이란 명칭이 아니라 ‘단원절세보첩(檀園折世寶帖)’이라는 제목을 붙여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될 정도로 빼어난 작품이다. 그런데 이렇게 명성이 자자한 화첩의 소재가 의외로 소박하다. 김홍도는 화조화를 그릴 때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친숙한 소재를 선택했다. 까치, 오리, 꾀꼬리, 꿩, 독수리, 메추라기, 기러기 등의 새와 버드나무, 소나무, 연꽃, 국화, 매화, 대나무 등이 그것이다. 이런 소재들은 단독으로 그려질 때도 있지만 사람과 동물의 배경으로 그려질 때도 있다. 어떤 형태로 결합되든 꽃과 나무는 자연 그 자체다. 자연이 주는 선물이다.

그런데 2주 전에만 해도 죽은 나무처럼 서 있던 매화가 언제 이렇게 꽃을 피웠을까. 꽃을 피운 힘은 매화 속 어디에 숨어 있을까. 꽃을 피운 뒤 사라졌을까. 아니면 떠났다가 내년 봄이 되면 다시 올까. 내가 자전거를 타게 된 능력은 어디에 들어 있었을까. 내일이면 이 능력은 사라지는 걸까.

“스님, 지식을 갖는 자는 지혜도 갖습니까?” “그렇습니다.”

“지식과 지혜는 둘 다 같은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지식과 함께 지혜를 갖는 사람은 미혹에 빠지는 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어떤 일에 대해서는 미혹되고 어떤 일에 대해서는 미혹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일에 대해서 미혹됩니까?” “아직 배우지 않은 기술이나 아직 가본 적이 없는 지방이나 아직 들어보지 못한 이름과 술어 등에 대해서는 미혹될 것입니다.”

“어떤 일에 대해서 미혹되지 않습니까?” “지혜에 의해 깨친 것, 즉 무상(無常)과 고(苦)와 무아(無我)에 대해서는 미혹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깨친 사람의 어리석음은 어디로 갑니까?” “지혜가 생기자마자 어리석음은 곧 사라져 버립니다.”
“비유를 들어 설명해 주십시오.” “사람이 어두운 방 안으로 등불을 가져왔을 때 어둠이 사라지고 밝음이 나타나는 것과 같습니다.”

“스님, 그렇다면 지혜는 어디로 갑니까?” “지혜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이룩하자마자 곧 사라집니다. 그러나 지혜에 의해 이룩된 무상과 고와 무아의 깨침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비유를 들어 설명해 주십시오.” “어떤 사람이 하인에게 등불을 밝혀 편지를 쓰게 한 다음 등불을 끄게 하는 경우와 같습니다. 이 경우 등불은 꺼져도 편지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지혜는 사라지지만 지혜에 의해 이룩된 깨침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다른 비유를 들어 설명해 주십시오.” “의사가 약을 환자에게 먹여 병을 낫게 하는 경우와 같습니다. 이 경우 병이 나은 다음에도 의사는 다시 그에게 약의 효과를 보이려고 먹게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약은 이제 할 일을 다 하였습니다. 병이 다 나은 사람에게 약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꼭 그와 같습니다. 약은 수행력이고 의사는 수행자. 병은 번뇌이며 환자는 범부와 같습니다. 약에 의해 병이 나은 것처럼 뛰어난 수행력에 의해 모든 번뇌는 없어지고 지혜는 사라지지만 깨달음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밀린다왕문경((彌蘭陀王問經)’은 서양 그리스의 밀란다왕과 인도의 불교 고승 나가세나 존자의 대화로 구성된 경전이다. ‘밀란다왕의 질문’이란 경의 이름처럼 밀란다왕이 불교에 대해 궁금한 사항을 질문하면 나가세나 존자가 대답하는 일종의 교리문답서라고 할 수 있다. 두 사람의 대화는 3일 동안 계속되었는데 왕의 질문은 300개가 넘었다. 나가세나 존자는 왕이 던지는 갖가지 난해한 질문에 대해 적절한 비유로 명쾌하게 대답한다. 지식과 지혜에 대한 질문과 대답도 그 중의 하나다.

나가세나 존자의 설명에 빗대어 보면 내가 처음 자전거를 타지 못했을 때는 ‘미혹’에 빠진 상태였다. 그런데 자전거를 익숙하게 타는 지혜가 생기자마자 미혹이라는 어리석음은 사라져 버렸다. 방 안으로 등불을 가져오자마자 어둠이 사라진 것처럼. 한 번 밝아진 방 안은 다시는 어두워지지 않을 것이다. 나 또한 다시는 자전거를 타지 못했던 과거로 되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내 안에 자전거타기의 지혜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 지혜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내가 자전거를 타고 싶을 때면 언제든 잘 탈 수 있게 작용할 것이다. 봄이 되면 매화꽃을 피우는 신비스런 힘처럼. 으흐흐흐…. 이런 지혜를 내 안에 담고 있다니 생각만 해도 기분 좋다. 모두 자전거 덕분이다. 아니 무릎이 깨지면서도 자전거타기를 포기하지 않은 쉰 세 살 아줌마의 용기 덕분이다. 나는 내가 자랑스럽다. 탄천 변에 핀 꽃들이 어른거린다. 

조정육 sixgardn@hanmail.net


[1240호 / 2014년 4월 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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