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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천태지의가 수양제에게

“국법 지키며 불법 받든다면 공덕이 무량할 것입니다”

고국 멸망시킨 젊은 정복자의
간곡한 수계 요청 받아들이며
두 사람의 깊은 인연 시작

‘총지보살’ 법명 받은 양광
평생 스승 삼겠다고 다짐

십수 년간 교류하며 교화
유마의 삶 살기 염원하며
‘유마경소’ 집필해 전달

유마거사의 꿈 등진 수양제
침략전쟁 등으로 민심 이반

“대왕께서는 국법을 지키면서 더불어 불교를 바로잡아 죄 지은 자는 다스리고 죄 없는 이를 공경한다면 공덕이 무량할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본래 직접 뵙고 말씀드릴 일이지만 기회가 없으므로 창졸지간에 유촉으로 남기게 됐습니다. 이것 역시 불법과 국토와 중생을 위한 것이라고 봅니다. 만일 능히 이런 뜻을 유념해 두신다면 반드시 공덕으로 보답될 것입니다. 임종에 이르러 구술하고 보니 말할 기운마저 쇠진해졌습니다. 부디 대선지식을 만나 보리(菩提)를 기약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천태종 개조인 지의대사.
597년 11월24일 오후 2시, 관정(灌頂, 561~632)의 눈에서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스승 천태지의(天台智顗, 538~597)가 조용히 결가부좌하고 열반에 든 것이다. 이날 오전 지의는 “통곡하지 말라. 계율이 그대들의 스승이며 내가 항상 설했던 사종삼매(四種三昧)가 그대들의 밝은 인도자다”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겼다.

제자들은 스승의 유언에 따라 유해를 불롱(佛隴) 땅에 안장했다. 관정은 훗날 수양제(隋煬帝)라 불리는 진왕(晉王) 양광(楊廣, 569~618)을 만나려 양주로 향했다. 며칠 뒤 그는 지의가 남긴 유서와 ‘유마경소(維摩經疏)’ ‘관심론(觀心論)’ 2권을 전했다.

양광은 지의가 천태산 석성사에서 입적했다는 말을 들었지만 선뜻 믿기지 않았다. ‘그분께서 세상을 떠나시다니….’ 양광은 지의의 제자들이 궁에 오고서야 비로소 스승의 죽음이 사실임을 알았다.

양광은 유서와 책을 공손히 받아들었다. 무릎을 꿇고 세 번 절한 뒤 그는 유서를 천천히 읽어나갔다. 비통함이 눈물로, 눈물이 흐느낌으로 점차 바뀌어갔다.

지의의 편지는 “빈도가 처음 좋은 인연을 만나 발심한 때부터 무생법인(無生法忍) 얻기를 기약하고 삼업(三業)을 극진히 하면서 일생을 지키고자 했다”는 말로 시작했다. 그동안 이루지 못한 일들을 길게 나열한 후 대왕께서는 부디 큰 깨달음을 이루기를 당부하는 말로 맺고 있었다.

부황 수문제(隋文帝, 541~604)와 오랜 세월 전장을 누비며 생사 앞에서도 눈 하나 꿈쩍 않던 양광. 하지만 그도 이 때만은 통한의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양광은 지의에게 수차례 ‘유마경소’ 집필을 간곡히 요청했다. 청을 마다할 수 없었던 지의는 두 해 동안 꼬박 책을 쓰고 다듬었다. 병마와 씨름하며 퇴고를 거듭하던 지의의 건강은 돌이킬 수 없게 됐다. 더욱이 지의가 아픈 몸을 이끌고 자신을 만나러 오다가 세연을 마쳤다는 점이 그를 더 괴롭게 했다. 양광은 지의가 마지막 호흡까지 아껴가며 썼다는 ‘유마경소’와 ‘관심론’을 얻을 수 있었지만 그토록 존경하던 스승을 이생에선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된 것이다.

양광이 처음 지의를 가까이 한 데는 정치적인 야욕이 없지 않았다. 지의는 남조에서 가장 존경받는 고승이었다. 부황 수문제도 스스로 제자라 칭하며 “스님을 우러르는 마음이 나날이 깊어갑니다”라고 찬탄했다. 양광은 그런 지의를 가까이 하면 자신의 입지를 크게 강화할 수 있음을 알았다. 황태자 양용(楊勇)을 제치고 제위에 오르는데 큰 도움이 되리라 여겼다.

지의는 지극히 불운한 시대를 살아야 했다. 554년, 남조의 융성을 이끌었던 양의 황제가 시해 당하고 나라는 패망의 끝자락으로 치달았다. 다음해에는 양친까지 차례차례 세상을 떠났다. 조국의 쇠망과 잇따른 부모의 죽음은 18살 지의에게 세상의 부귀영화가 덧없음을 깨닫도록 했다. 부모의 장례식을 마친 그는 형에게 출가사문의 길을 걷겠노라고 선언했다. 수년 전 처음 출가의 뜻을 밝혔을 때 어머니가 그러했듯 형도 극구 반대했다. 형은 결혼해 애 낳고 사는 인생도 괜찮지 않겠느냐고 설득했다. 지의는 물러나지 않았다. 그는 형에게 말했다. “부모님의 은덕을 갚고자 한다면 도 닦는 것이 제일입니다. 이 뜻을 뼈와 살에 새겼으니 결코 바뀌지 않을 겁니다.” 지의는 그 말을 남기고 불문에 들었다.

장사(長沙) 과원사(果願寺)에서 계를 받은 지의는 부지런히 경전을 배웠다. 혜명, 혜광 등 뛰어난 학승들이 있었지만 불과 몇 해 뒤 지의는 그들이 감당할 수준을 넘어섰다. 도에 대한 지의의 간절함은 날이 갈수록 깊어갔다. 그 정성이 하늘에 닿았을까. 그가 23살 되던 해인 560년, 지의는 드디어 평생의 스승 혜사(慧思, 514~577)를 만났다. 혜사는 지의를 보자 환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지난날 영취산에서 함께 법화경을 들은 숙세의 인연에 따라 지금 다시 이곳에 오게 되었네.” 지의도 혜사와의 만남이 필연임을 직감했다.

지의는 혜사 밑에서 법화삼매의 행법을 닦고 심관(心觀)을 차근차근 익혀나갔다. 그렇게 7년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진했다. 한 번은 법화경 약왕품을 독송할 때였다. 돌연 심신이 탁 트이면서 고요히 삼매에 들었다. 마치 높이 뜬 해가 깊은 계곡을 비추듯 법화경의 이치가 환히 알아졌다. 지의는 혜사에게 신비한 체험을 털어놨다. 혜사는 지의의 안목이 크게 열리려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혜사는 지의에게 법에 대해 설명하고 궁금한 점을 묻도록 했다. 그렇게 스승과 제자 사이에는 끊임없이 질문과 답변이 오고갔다. 4일 뒤 지의는 더 이상 교리에 걸림이 없었고 선정에도 막힘이 없었다. 지혜의 꽃봉오리가 만개한 것이다.

지의가 묘법을 깨닫자 혜사는 크게 기뻐하며 이제 형산으로 가겠다고 했다. 떠나기 전 혜사는 지의에게 “그대가 도시로 나가면 반드시 이익이 있으리라”는 말을 덧붙였다. 568년, 31살의 지의는 스승의 권유에 따라 진의 수도 건강(健康)으로 향했다. 당시 건강은 인구 백만 명의 대도시였다. 이곳에 도착한 지의가 처음 만난 인물은 육순을 넘긴 고승 법제(法濟)이었다. 천하제일인 줄 알았던 법제는 지의와의 짧은 대화에서 자신의 법이 그에게 현격히 떨어짐을 깨달았다. 법제는 콧대가 높았지만 성품은 정직했다. 그는 벌떡 일어나 무릎을 꿇고 지의에게 제자가 되기를 간청했다. 지의도 선뜻 이를 받아들였다.

그런 법제에게 사람들이 물었다. “육십대의 고승이 갓 서른을 넘긴 젊은이의 제자가 됐다는데 어찌된 일이오?” 그럴 때면 법제는 “나는 스승의 덕을 받들 뿐 나이를 받들지는 않는다”고 당당히 대답했다. 법제는 또 “자신의 스승은 부루나존자와 같은 존재로 이 세상에 비교할 자가 없다”고 찬탄했다.

법제의 귀의를 계기로 지의는 건강의 가장 주목받는 인물로 떠올랐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법문을 들으러 찾아왔다. 청중들 중에는 고관대작들이 적지 않았다. 지의의 법문에 깊이 감동을 받은 그들은 황제 선제에게 지의를 소개했다. 선제도 곧 지의의 법문에 깊이 매료됐다. 틈틈이 지의에게 법을 청했고, 스승의 예로써 그를 대했다. 그로부터 8년간 와관사(瓦官寺)에서 법석을 열었더 지의는 이제 떠날 때가 됐다고 판단했다. 585년 그는 선제의 만류를 뿌리치고 천태산 암자에서 은거를 시작했다. 더 이상 지의를 만나기 어렵게 된 선제와 대신들은 수시로 편지를 보내왔다. 그럴 때면 지의도 정성껏 답장을 보냈다.

지의가 천태산에서 11년간의 은거를 마칠 무렵이었다. 그는 제2의 조국인 진나라가 589년 수나라에 의해 멸망했다는 비보를 들어야 했다. 지의에게 진나라는 각별했다. 그는 자신에게 온몸으로 귀의했던 황제와 왕자들, 맑은 신심의 관료들을 잊을 수 없었다. 유독 황제 선제는 지의를 지극히 존경했다. 지의가 법문을 할 때면 그는 대중 속에서 일어나 세 번 절하며 예를 표했다. 또 “스님께서는 불법에 있어 영웅호걸이고 이 시대의 사표이십니다. 가르침이 승속에 두루 미치고 있으므로 나라가 가르침을 받아야 할 분입니다”라는 서신을 보내왔다. 지의가 수도 건강(健康)을 떠날 때 눈물을 뚝뚝 흘리며 슬퍼하던 황제. 그런데 그는 물론 황족과 신하들까지 모두 수왕조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한 것이다.

▲ 수양제는 왕자시절 지의대사 영향으로 유마를 따르려 했다. 그러나 정작 제위에 오른 후 유마의 꿈을 등짐으르로써 폭군의 길을 걷게 됐다.

전쟁과 살육이 끊이질 않던 시대. 아무리 고승이라지만 지의가 감당해야 했던 허무감은 대단히 컸다. 그러나 지의는 고통에 물들지 않았다. 시대의 흐름에도 휩쓸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고통 받는 사람들을 돕겠다는 중생제도의 원을 키워나갔다. 공격하는 자도 공격을 당하는 자도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알게 모르게 악업을 짓고 그로 인해 고통 받는 불쌍한 중생이었던 것이다. 수나라 총사령관으로 51만8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와 양을 멸망시킨 양광. 그가 지의에게 법을 청할 때 선뜻 받아들였던 것도 오로지 자비심 때문이다. 591년 11월, 양광은 양주 총관부에서 천승재(千僧齋)를 연 뒤 지의를 계사(戒師)로 보살계를 받았다. 지의는 거칠고 영특했던 23살의 젊은 왕에게 ‘총지보살(摠持菩薩)’이라는 법명을 주었다. 양광도 54살의 지의에게 ‘지자대사(智者大師)’라는 호칭을 바쳤다. 이후 양광은 지의의 제자임을 자처했다. 편지를 쓸 때면 ‘제자 총지’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불사에 큰 관심을 보였던 수문제는 지의와 사제지간을 맺은 둘째 아들 양광을 보며 흐뭇해했다. 이런 점도 양광으로 하여금 지의를 더욱 극진히 모시도록 했던 이유가 됐다. 그는 지의를 수시로 찾아가 진리에 대해 물었다. 그때마다 지의는 양광에게 자상히 법을 설했다. 그럴수록 지의에 대한 양광의 경외감과 신뢰는 가을 호두알처럼 단단히 여물어갔다.

592년, 지의는 양주에 머문 지 4개월 만에 그곳을 떠났다. 그는 여산에서 안거에 들어갔다. 입적한 스승 혜사를 위해 송덕비도 세웠다. 이후 지의는 형주에 머물며 사찰 건립에 착수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양광은 그를 위해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사나운 맹수와 뱀이 들끓던 곳이 오래지 않아 청정한 도량으로 바뀌었다. 지의는 사찰이 세워질 수 있도록 힘써 준 양광에게 절 이름을 지어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양광은 옥천사(玉泉寺)라 이름했다.

지의는 이곳에 상주하며 ‘법화현의(法華玄義)’와 ‘마하지관(摩訶止觀)’을 강의했다. 그는 대중들에게 ‘묘법연화경’ 다섯 자를 여러 관점에서 해석해 기존 교학의 원리를 새롭게 선보였다. 또 대승불교의 수행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했으며, 참회의 중요성을 강하게 역설했다. 전란의 아픔은 참회로서 치유될 수 있으며, 참회하는 마음이 있어야 전란도 사라질 수 있다는 신념에서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의의 강의를 듣기 위해 옥천사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지의의 강의에서 불교의 오묘한 가르침을 보았으며,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통찰을 얻었다.

595년 봄, 지의는 양광의 거듭된 요청에 못 이겨 다시 양주로 돌아왔다. 양광은 지의에게 더욱 지극한 존경의 예를 표했다. 그렇지만 지의에게 명성이나 권력은 아무런 의미를 가질 수 없었다. 그는 도심의 사찰을 떠나 산에 머물고 싶었다. 하지만 양광은 지의를 떠나보내려 하지 않았다. 양광은 그를 붙들려고 ‘유마경소’를 저술해 줄 것을 부탁했다. 지의는 거절했으나 양광의 요청은 계속됐다.

“제자 총지는 문안드립니다. 오직 원하옵나니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게 하고 아직 제도하지 못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끝없이 설법하여 법시(法施)를 무궁하게 베풀어 주옵소서.”

지의는 더 이상 거절하기 어려웠다. 유마거사를 자신의 이상적인 모델로 삼겠다는 양광의 염원이 담겨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가 초심을 잃지 않았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도 있었다. 지의는 유마경을 해석해 헌상했다. 그런 뒤 양광에게 다시 편지를 썼다.

“빈도가 오래 전부터 원하는 일은 천태산의 옛 처소에 머무는 것입니다. 이제 깊은 산중에 의탁해 수행에 전념하고자 합니다. 최근 과분하게 사람들에게 스승 대접을 받고 있으나 제 어리석은 자신을 돌아보면 아직 적당한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천태산에 머물고 싶다는 지의의 간곡한 요청을 양광은 더 이상 뿌리칠 수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천태산으로 돌아온 지의는 곧바로 새로운 ‘유마경소’ 집필에 전념했다. 처음 양광에게 건넨 ‘유마경소’가 미흡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탓이다. 지의는 유마경의 세계로 침잠해 들어갔다. 틈틈이 제자들의 가르치는데도 열정을 쏟았다. 대중생활을 하며 정진하는 제자들에게 하루 네 번의 좌선과 여섯 번의 예불을 일과로 삼아야 할 것, 수행자는 절 안에서나 바깥에서나 생선·고기·오신채·술을 철저히 금할 것, 몸에 병이 있거나 없거나 몸져눕지 않을 정도면 대중과 함께 식사할 것 등 10가지 생활 규칙을 세웠다. 정해진 틀이 없다면 게으름과 다툼으로 대중이 불화하고 정진은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우려에서였다.

지의는 그렇게 꼬박 2년을 집필에 매달렸다. 병색이 갈수록 깊어졌지만 지의는 끝내 붓을 놓지 않았다. 마무리 즈음 붓을 들 힘조차 없을 때에는 제자 관정에게 받아 적도록 했다. 그렇게 ‘유마경소’는 자신의 상처를 보듬어 진주를 키우는 조개처럼 지의의 고통 속에서 완성됐다. 자신의 마지막 불꽃을 지펴 책을 엮은 지의는 이번 생이 막바지에 다다랐음을 알았다. 마지막 순간 “이곳에서 떠나시면 어디에 태어날 것입니까?”라는 제자의 질문에 “내 스승과 도반들이 관세음보살을 호위하고 나를 맞이하러 와 있구나”는 말을 남기고 위대한 고승은 적멸에 들었다.

지의가 세상을 떠난 7년 뒤인 604년, 제위에 오른 수양제는 직접 양주를 방문했다. 그는 입적한 스승을 위해 재를 올리고 손수 비문을 짓는 등 추모 사업을 벌였다. 동시에 수양제는 칙령을 반포해 “승려는 세속의 지배자에게 예배하지 않는다”는 남방 승단의 전통을 끊었다. 수백 년간 이어져오던 불교교단의 자주권을 박탈했던 것이다.

예와 율령을 정비하는 등 여러 업적을 남겼던 수양제. 하지만 그는 장안과 낙양을 연결하는 1794km의 대운하 건설과 3차례에 걸친 고구려 침략으로 민심을 등졌다. 유마의 꿈과 멀어진 그에게 백성들은 반란으로 화답했고, 618년 역모를 꿈꾸던 신하에 의해 암살당하고 말았다.

천태지의와 수양제와 나눈 편지는 도선의 ‘속고승전’과 관정의 ‘국청백록’에 수록돼 있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1240호 / 2014년 4월 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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