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8. 예수 영화 ‘포레스트 검프’, 붓다 영화로 보기

기자명 정장진

윤회의 소용돌이 안에서 쳇바퀴처럼 도는 인생은 고통

▲ 예수 영화를 내포하고 있는 ‘포레스트 검프’는 세 가지 화두를 던지며 윤회를 말하는 붓다 영화다.

톰 행크스가 주연을 맡은 ‘포레스트 검프(1994)’는 TV 등을 통해 여러 번 방영되었으니 안 본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필자는 이 영화를 거의 20년 전인 1995년 여름, 파리 샹젤리제에 있는 한 영화관에서 봤다. 논문 심사를 끝낸 후 후배가 빌려준 샹젤리제 거리의 사무실에서 먹고 자며 잠시 머물 때인데, 무척이나 더웠던 여름 날 저녁 커피나 한 잔 할 생각에 나섰다가 우연히 보게 되었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부터 필자는 톰 행크스가 나오는 다른 영화를 흥미롭게 볼 수가 없는 증후군 같은 것을 앓아야만 했다. 톰 행크스가 나오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같은 심각한 영화를 봐도 ‘포레스트 검프’에서 저능아 역을 맡은 톰의 크고 멍청한 두 눈을 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연기에 몰입하는 배우들은 간혹 촬영이 끝난 후에도 자기가 맡은 역에서 쉽게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좋은 연기를 위해서는 전후 장면들이 연결되면서 굴곡을 만들어 내는 감정의 다양한 깊이를 표정, 목소리, 동작 등을 통해 표현해 내야 하는데, 여러 번 다시 보았지만 포레스트의 눈물을 글썽이던 크고 멍청한 두 눈망울은 볼수록 다른 느낌을 주었다. 톰은 흔히 영혼의 거울이라고 하는 눈 연기를 해낸 것이다. 그는 영화에 몰두했고 그럼으로써 아이큐 78의 한 저능아가 좌충우돌하는 코믹 터치의 이 영화가 전혀 다른 또 하나의 영화를 깊이 숨기고 있다는 것마저 연기해 낸 것이다.

IQ78 저능아의 인생 파노라마
신발을 선물 받고 무작정 뛰어
주인공 검프 뒤 따르는 사람들
예수의 12사도 비유하고 있어

아빠 같은 생활하는 검프 아들과
바람에 날리는 깃털이 윤회 상징

‘포레스트 검프’는 놀랍게도 예수 영화다. 이것이 영화가 던지는 첫 번째 화두다. 이 첫 화두부터 풀어보자. 모든 화두가 그렇듯이, 안이하고 나태한 인식(識)으로는 화두가 풀리지 않을 것이니, 스스로 죽비를 내리치며 영화를 완전히 뒤집어 봐야 할 것이다.

여자 친구이자 후일 결혼해 아내가 되는 제니가 나이키 신발을 선물한다. 정상적인(얼마까지가 정상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능을 지닌 사람이라면 신발을 선물 받으면 두었다가 신거나 혹은 한국에서는 이별을 예고하는 것 같아 받긴 받아도 신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검프는 그만 신발을 보자 문득 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길로 나이키를 신고 길을 나서 뛰기 시작한다. 내친 김에 그 너른 미국 땅을 동서남북으로 3년 남짓 뛰어 다닌다. 남들이 보기에는 거창한 뜻이 있어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계속 뛰는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아니다. 그냥 뛰는 것이었다. 신발을 신었기 때문에.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다”고 말한 어느 시인처럼, 검프도 신발을 신으니 뛰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삼 년 남짓 미국대륙을 뛰던 어느 날 지친 검프는 모뉴먼트밸리에서 갑자기 뛰던 걸음을 멈춘다. 그러자 신문에도 나고 TV 뉴스에도 난 덕에 이미 유명해진 검프의 뒤를 따라 같이 뛰던 한 십여 명 정도 되는 검프 못지않게 멍청한 사람들도 같이 멈춘다. “이제 뭔 말씀을 하시려나 보다….” 검프가 몸을 돌려 자신의 뒤를 따르던 사람들을 바라본다. “나 이제 집에 돌아가련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황혼녘이었고 장소는 황량하기만 한 모뉴먼트밸리였다.

이 장면은 ‘어딘지’ 예수가 12사도와 함께 히브리 광야를 걷다가 발걸음을 멈추고 광야에 선 같은 인상을 준다. 모뉴먼트밸리는 히브리 광야였으며 뒤따르던 멍청한 이들은 12사도였다. 이 인상에 충실해 보자. 그러면 화두가 풀린다.

▲ 무작정 달리는 검프를 뒤따르는 사람들. 여기에 예수의 12사도가 숨어있다.

예수가 첫 제자로 삼은 베드로가 어부였듯이, 영화에서도 월남전에서 두 다리를 잃은 중대장 역시 어부다. 미국을 동서남북으로 뛰어 다니던 어느 비 오는 날 한 티셔츠 업자가 뛰고 있는 검프를 찾아와 아이디어를 달라고 조른다. 그 때 흙탕물이 튀자 업자는 얼굴을 닦으라고 흰 티셔츠를 내민다. 검프는 계속 뛰면서 얼굴을 닦고 셔츠를 휙 던져준다. 티셔츠를 받아 든 업자가 티셔츠를 펼치자 유난히 긴 검프의 얼굴이 찍혀있었는데 눈, 코, 입만 찍히니 그 모습이 스마일 마크처럼 보인다. 업자는 대박을 터뜨렸다고 한다. 이 장면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를 때 피와 땀이 범벅이 된 예수의 얼굴을 닦은 베로니카 손수건을 연상시킨다.

뿐만 인가. 제니는 간음한 여인인 막달라 마리아를 연상하게 하고, 거대한 연못이 있는 워싱턴 광장에서의 반전 시위는 산상수훈을 떠올리게 한다. 하긴 영화 속 어디에서도 검프의 아버지를 볼 수가 없다. 예수 역시 그랬다. 월남전에 참전했을 때도,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구하러 오셨다는 예수처럼,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검프는 거의 초능력 인간처럼 달리고 뛰기를 쉬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는 예수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들이 곳곳에 숨어있다. 이 숨어있는 또 다른 영화는 영화를 선문답의 화두처럼 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일러준다. 좋은 영화는 거의 언제나 화두다. 직접 이야기 하지 않으며 진의는 깨달았을 때나 겨우 모습을 드러낼 뿐이다. 염화시중(拈花示衆)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고 수보리의 깨달음의 과정과 비교해도 될 것이다. 코믹 터치의 분위기에 머물지 말고 웃음과 함께 찾아오는 저능아의 그렁그렁 눈물 가득한 커다란 두 눈을 봐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 ‘포레스트 검프’가 여기서 끝났다면 선의 화두나 가섭, 수보리 운운하는 것이 허망한 소리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영화는 예수 영화이면서 ‘왕중왕’이나 ‘나사렛 예수’ 같은 성탄절에 방영되는 정통 예수 영화를 넘어선다. 가벼운 깃털이 푸른 하늘에 나부끼는 장면에서 시작된 영화는 똑 같은 장면에서 끝난다. 이 장면만 반복되는 것은 아니다. 검프의 아들이 첫 장면에서처럼 아버지와 똑 같은 책가방을 메고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스쿨버스를 탄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 반복은? 이 반복이 영화의 두 번째 화두다.

영화가 끝났다. 휴식시간까지 있는 거의 3시간짜리 영화가 끝나자 영화관에는 불이 들어오고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부스럭거리며 일어선다. 그럼에도 자막이 올라가는 스크린에서는 첫 장면과 똑 같은 깃털이 계속 푸른 하늘에 나부끼고 있다.

가벼운 깃털, 첫 장면에 등장한 후 마지막 장면에 와서도 여전히 하늘을 날고 있는 가벼운 깃털, 무언가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무상한 인생, 바람에 날리는 깃털처럼. 무언가가 반복되고 있다. 그렇다. 전쟁도, 성폭력도, 왕따도, 마약도, 워터게이트같은 더러운 정치도 모두 반복된다는 것이다.

이 반복은 확실히 반기독교적이다. 종말론을 믿는 기독교적 세계관에 충실하자면, 천년왕국이 오고 최후의 심판이 이어지며 죽은 자들이 부활하는 휴거가 일어나고 그리고 전혀 다른 세계가 완성된다.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 영화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 지나친 것일까?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이 똑 같이 반복된다고 해서 영겁회귀의 세계관을 표현한 것으로 보는 것은 지나치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린 영화 자체가 다른 에피소드를 통해 우리처럼 기독교에 대해 조금 심각한 의혹을 던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해야만 한다.

검프의 엄마는 저능아 아들에게 정규교육을 받게 하려고 교장선생님을 만난다. 급기야 엄마는 교장 선생님을 집에 까지 초대한다. 그런데 엄마는 봉투 대신 자신의 몸을 내준다. 더운 여름이었다. 엄마의 방은 2층에 있었고 일층 발코니에 있던 검프는 교장선생님과 엄마가 봉투 대신 다른 것을 주고받으며 내는 무척이나 소란스러운 소리를 듣는다.

검프는 이제 안 것이다. 자신이 태어난 것도 그리고 이 세상의 기원도 저 짐승들이 내는 소리 속에 있다는 것을. 이를 정신분석에서는 프로이트의 이론에 따라 ‘최초의 장면’이라고 부른다. 아빠 엄마가 성교하는 장면을 아이가 본 것이다. 아이에게는 충격 그 자체이지만, 문제는 그 이후다. 자꾸 떠오르는 장면을 잊어야 하고 자꾸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막아야 하는 것이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는 이렇게 3편의 이야기가 동시에 진행되는 영화다. 아이큐 78의 저능아가 펼치는 한 편의 희비극이 스크린에 어른거리면서 12사도와 3년 동안 공생활을 한 예수처럼 3년 남짓 추종자들과 미국 땅을 뛰어다닌 검프의 달리기 이야기가 나오며 동시에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는 뱀처럼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이 중첩되면서 사바세계의 법 그 자체인 업과 보의 반복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최초의 장면’이 나온다. 이 마지막 장면은 씁쓸하기만 하다. 검프의 엄마는 거짓말을 했다. “여행이 뭐야, 엄마?”라고 아들이 물었다. “여행이란 멀리 갔다가 다신 안 돌아오는 것이란다.” 집에 없는 아버지에 대한 물음이었고 답이었다. 엄마의 거짓말 그대로 영화 어디에도 아버지는 없다. 아버지는 여행을 갔다가 다신 안 돌아오신 것이다. 하나님 즉, 성부는 영화 속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검프는 알았다. 인간은 짐승이기도 하다는 것을. 검프 역시 아들을 낳았고 그 아들은 아버지 검프와 똑같이 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스쿨버스를 탄다. 아들을 스쿨버스에 태워 보낸 후 검프는 크고 슬픈 두 눈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의 두 눈은 이제 더 이상 멍청하지 않다. 슬플 뿐이다. 깃털이 가벼이 날아오른다. 어디선가 낯익은 목소리가 들린다. “가볍다, 가볍다 깃털처럼, 일체가 무상한 것이다. 죄도, 전쟁도, 돈도, 여인도, 일체가…. 남는 것은 푸른 하늘에 나부끼는 깃털 혹은 어디서 왔는지 모를 바람….” 불자라면 이 깃털을 유심히 봤을 것이다. 20년 전의 더운 여름, 영화관을 나서자 늦은 밤인데도 샹젤리제 거리에는 전 세계에서 몰려온 수많은 인파로 가득했다. 지금도 그럴 것이다. 

정장진 문화사가 jjj1956@korea.ac.kr

[1241호 / 2014년 4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 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