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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삼계교 신행이 승옹에게

“세상 떠나 홀로 은둔함은 출가자의 길이 아닙니다”

 “도를 닦았다면 중생을 제도해야 합니다. 자기 몸만을 깨끗하기 위해 홀로 은둔한다는 것은 내가 듣고 배운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마땅히 고통 받는 세상 사람들 속으로 나와 그들을 위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펴야 하지 않겠습니까.”

승옹(僧邕, 543~631)은 숲속 생활이 좋았다. 비를 겨우 막을 수 있는 초막이었지만 부러울 게 없었다. 배가 고프면 솔잎과 산나물을 먹었다. 목이 마르면 샘물을 마시면 됐다. 깊은 선정에 들었다가 눈을 뜨면 고라니가 신기하듯 빤히 쳐다보고는 했다. 손바닥을 펴면 작은 새들이 내려앉아 노래도 불렀다. 향을 사르고 경전을 소리 내어 읽으면 기이한 산짐승과 새들이 모여들어 경청하듯 듣고 있었다. 그럴 때면 여기가 바로 정토가 아닐까 싶었다.

승옹이 처음부터 홀로 숲속에 살려 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명문가 출신이었다. 조부는 형주자사였고 부친은 박릉태수였다. 13살 때 집을 떠나 불문에 든 것은 도를 깨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돕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업서(鄴西)의 운문사에서 그는 스승 선혜로부터 선법(禪法)을 익히려 부지런히 정진했다. 누구보다 경전을 열심히 읽었으며 계율 하나도 어기지 않으려 부단히 애썼다.

뜻밖의 사태가 벌어졌던 것은 577년이었다. 북제(北齊)를 정복한 북주(北周)의 3대 황제 무제(재위 560∼578)가 다시 불교말살 정책을 시작한 것이다. 4년 전인 573년 5월에도 무제는 전면적인 폐불(廢佛)을 단행했었다. 불상은 파괴되고 경전은 모두 불살라졌다.

이번에 무제의 탄압은 더욱 거세졌다. 4만의 사찰들이 하루아침에 폐허로 변했고, 300만 명의 승려들이 강제로 승복을 벗어야 했다. 정영사 혜원(慧遠, 523~592)은 그런 무제 앞에서 외쳤다. “폐하는 지금 힘만 믿고 삼보(三寶)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아비지옥은 귀천을 가리지 않거늘 그 인과를 어찌 감당하려하오? 폐하는 반드시 아비지옥에 떨어질 것이오.”

생사를 아랑곳하지 않는 고승의 일갈에도 황제의 권력은 무자비했다. 불교는 그 앞에서 한없이 무기력했다. 많은 승려들이 “말법(末法)시대”라고 한탄했다. 불법이 흥하고 깨친 도인이 많이 난다는 정법(正法)시대, 외형적인 모습만 성하고 도인이 줄어든다는 상법(像法)시대, 말법시대는 불법이 무너지고 도인들은 나지 않는 절망의 시대를 일컬었다.

대다수 승려들은 발우와 목탁을 내려놓고 속인(俗人)의 삶을 받아들였다. 일부 승려들은 더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승옹도 그 중의 하나였다.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였지만 그는 세간으로 돌아갈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백록산(白鹿山) 깊은 산중에서 조용히 도를 닦으며 살다가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일도 그리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갔다. 끝이 없을 것 같던 무제의 폐불도 막이 내렸다. 수나라 문제가 천하를 통일했다는 얘기도 들려왔다.

승옹이 신행(信行, 540~594)의 뜻을 전해 받은 것은 589년이었다. 신행은 그에게 은둔은 불교가 아니라고 질책했다.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내려와 더불어 중생제도에 나서야 한다고 했다. 승옹은 부끄러웠다. 위로는 진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사람들의 괴로움을 없애라는 게 불교가 아니었던가. 승옹은 일신의 편안함을 위해 숨는 일을 이제 접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승옹은 12년의 산중생활을 접고 상주(相州)로 향했다. 그곳에서 승옹은 신행과 처음 마주했다. 야위고 병약해 보이는 체구였지만 신행의 눈빛은 형형하고 깊었다. 그는 승옹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마음속에 진리의 사원이 있음을 안다면 앉거나 눕거나 모두 깨달음이며 몸은 언제까지나 아미타불입니다. 따로 구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승옹의 가슴은 벅차올랐다. 불성은 찾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드러내야 하는 실천의 문제임을 깨달았다. 승옹은 신행에게 제자의 예를 올리고 평생 중생제도와 정법의 길을 걷겠다고 다짐했다.

북주 무제 폐불 피해 은거하자
은둔은 불법 아니라고 질책
현실 떠나지 않아야 참 불교

사제관계 맺고 함께 불교운동
노동에 종사하며 보시 실천
만나는 이들에게 절하며 공경

무진장원 세워 빈민들 구제
평등성 강조가 탄압 원인

승옹은 신행을 알면 알수록 경외심이 우러났다. 그는 어쩌면 중생의 고통에 슬퍼하며 항상 눈물을 흘리고 다닌다는 상제보살(常啼菩薩)의 현신이 아닐까 싶었다.

명문세족에서 태어난 신행은 어려서부터 총명했고 자비심이 깊었다. 4살 때 길에서 수레를 끄는 소가 진흙탕에 빠져 괴로워하는 모습을 봤을 때였다. 신행은 눈물을 흘리며 그 소를 꺼내달라고 호소했을 정도로 심성이 고왔다. 불심 깊은 양친의 영향으로 17살에 출가한 신행은 경론(經論)을 섭렵해나갔다. 도가 높다는 스승이 있으면 천리가 멀다 않고 찾아갔다. 그 길에서 신행은 도탄에 빠진 백성들과 부패한 불교의 실상을 여실히 볼 수 있었다. 끊이지 않는 전쟁으로 대지는 백성들의 피로 붉게 물들었고 병과 굶주림으로 죽어간 이들의 시체가 나뒹굴었다. 중생과 고통을 함께해야 할 사찰은 오히려 풍요로웠고 많은 승려들이 권력자로 군림했다. 무제의 겁화까지 겹치며 신행은 오탁악세의 말법시대임을 절감했다. 그는 어느 경전을 받드느냐보다 어떻게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생명의 존엄성을 되찾도록 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보았다.

신행은 일체중생이 부처라는 보불(報佛), 모든 중생을 부처님처럼 대해야 한다는 보경(普敬), 태산 같은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고 두타행과 참회로 없애야 한다는 인악(認惡)사상을 주창했다. 특히 그는 “신명을 다 바쳐 성불에 이르기까지 보시바라밀 수행을 그치지 않겠다”고 서원했다. 헐벗고 굶주린 이들에게 옷과 밥이 부처님 법이라고 여겼던 까닭이다.

▲ 그림=김승연 화백

신행은 상주 법장사에서 구족계를 반납했다. 존대 받는 승려가 아니라 떠받들고 사는 사미로 살겠다는 다짐이었다. 그는 직접 노역에 종사했고 병든 사람과 노인에게 먹을거리를 대접했다. 정작 자신은 걸식으로 하루 한 끼 식사만을 해결했다. 신행은 절에서든 길거리에서든, 승려이건 일반인이건, 부자건 날품팔이 일꾼이건 그들을 만나면 부처님을 대하듯 정성껏 절을 했다. 그들 모두 언젠가는 보살행을 펼쳐 성불하게 될 것임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신행의 행동은 순식간에 세간의 화제가 됐다. 사람들은 신행의 말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의 간명한 말과 고결한 인품은 사람들로 하여금 감복하게 했다. 그 앞에서는 빈부귀천이나 남녀노소를 넘어 누구나 평등했다.

신행과 뜻을 함께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신행을 중심으로 새로운 교단인 삼계교(三階敎)가 형성됐다. 삼계교는 불교를 시대(時), 장소(處), 사람(人)으로 구분하고, 지금은 시대가 말법, 장소가 예토, 사람은 삿된 견해의 범부라고 보았다. 따라서 이 시대는 실천이 절실하고 그것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소명이라고 믿었다.

수나라 고경(高頸)도 삼계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발해 출신으로 국무총리 격에 해당하는 복사(僕射) 직무를 맡던 그는 신행의 사상과 실천행이 오랜 전란으로 생긴 원망과 증오를 해소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고경은 신행이 수도 장안(長安)에서 그의 뜻을 펼칠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신행에게 입경을 부탁하는 초청장을 보낸 것도 그 때문이었다.

신행은 승옹을 비롯한 몇몇 제자들과 장안으로 향했다. 고경은 이들을 위해 진적사(眞寂寺)에 별원을 세워 머물 수 있도록 했다. 신행은 고경의 도움으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아낌없이 베푸는 행위를 한시도 멈추지 않으면 부처를 이룬다”는 신념에 따라 무진장원(無盡藏院)을 건립했다. 이곳에서는 누구라도 쌀과 돈을 빌려갈 수 있었다. 담보나 증서도 필요하지 않았다. 1년 뒤건 10년 뒤건 능력이 될 때 갚으면 됐다. 무진장원이 문을 열자 백성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조금이라도 나눌 것이 있는 사람은 복을 짓기 위해, 없는 사람들은 먹고살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삼계교의 구제활동은 전국으로 알려졌고 무진장원도 잇따라 세워졌다.

삼계교의 교세는 가뭄에 들불처럼 번져갔다. 신행은 틈틈이 저술 작업에 매달렸다. 초기·대승경전에 정통했던 그는 경전을 재해석함으로써 “불교는 중생의 능력에 따라 사람들을 위한 도를 가리켜보여야 하며, 결단코 현실을 저버리지 않는 길을 가야한다”고 천명했다. ‘삼계불법(三階佛法)’ ‘대근기행법(大根起行法)’ ‘여래신장론(如來身藏論)’ 등 삼계교의 이론을 정립한 신행의 저술이 40여권에 이른다.

신행은 평생 금욕과 고행을 마다하지 않았다. 장안에 와서도 하루 6번의 예불과 참회, 걸식을 거르지 않았다. 과로로 말년에 병이 심해 거동이 어려워지자 신행은 법당에서 몇 시간이고 불상을 바라보았다. 부처님의 공덕과 자비를 깊이 관해 삼매에 드는 관상(觀想)수행이었다. 기운이 쇠약해져 그마저 어려워졌을 때 신행은 불상을 방 안에 들여 달라고 청했다. 신행은 그렇게 날마다 누운 채로 불상을 관(觀)하다 가만히 눈을 감았다. 594년 1월4일, 신행의 나이 54살 때였다.

그가 적멸에 들자 온 장안에 통곡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슬픔에 잠긴 사람들은 무리 지어 거리를 배회했고 부모를 잃은 아이처럼 눈물을 흘렸다. 제자들은 신행의 유언에 따라 시신을 숲속에 두었다. 새와 짐승들에게 베푸는 신행의 마지막 보시였다. 며칠 후 제자들은 그의 유골을 수습해 숲속에 작은 탑을 세웠다.

신행이 세상을 떠난 뒤 수제자 승옹이 교단을 맡았다. 그는 신행의 사상과 업적을 계승하려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렇게 37년을 보낸 631년 11월16일, 승옹도 이승의 인연을 접었다. 그는 신행이 그러했듯 자신의 시신을 숲속에 안치하도록 해 짐승들의 먹이가 되도록 했다. 그를 존경했던 당나라 황제는 비단을 보내며 고승의 마지막을 안타까워했다. 문도들은 승옹의 유골을 수습해 신행의 옆에 묻고 검은 비석을 세워 두 사람의 거룩한 뜻이 잊혀지지 않도록 했다.

삼계교는 철저히 실천과 평등을 강조하는 파격적인 교단이었다. 이로 인해 민중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지만 정권과 기존 교단에게는 늘 경계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삼계교가 모진 탄압을 받고, 신행의 저술이 불온문서로 내몰렸던 것도 그 때문이다. 잡초처럼 끈질기게 명맥을 유지했던 삼계교는 10세기 무렵 결국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20세기 초 돈황 막고굴에서 삼계교 관련 고문서들이 속속 발견되기 시작했다. 민중불교를 지향했던 삼계교가 1000여 년 만에 다시 실체를 드러낸 것이다.

신행이 승옹에게 전한 이 글은 ‘속고승전’에 전하며, 돈황에서 발견된 문서 중에는 신행이 상주자사에게 보낸 편지도 남아있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1242호 / 2014년 4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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