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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무상관(無常觀)

‘법’에 대한 관점 차이가 이견의 출발점

▲ 그림=김승연 화백

사람들은 무상을 존재가 사라지는 것으로만 이해한다. 건강하던 사람이 갑자기 죽거나 꽃이 시드는 것을 무상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무상은 그런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다. 불교에서의 무상은 없어지고 사라지는 것뿐 아니라 나타나는 측면까지 포함된다. 지금 태어난 어린 생명도 무상한 것이고 아름답게 피어있는 꽃도 무상한 것이다. 무상은 병듦과 죽음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건강과 태어남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무상이란 찰나도 그냥 머물지 못하고 변해간다는 의미기 때문이다.

이런 무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초기불교와 대승불교가 또한 다르다. 존재가 무상하다는 데에는 서로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초기불교는 무상을 생멸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대승불교는 불생불멸의 측면에서 바라본다. 초기불교는 모든 존재는 일어나고 꺼지거나 혹은 나고 죽음의 반복적 성질을 띤 채로 변해간다고 가르친다. 이에 반해 대승불교는 이런 성질을 띠지 않은 채로 변해간다고 말한다.

사라짐만이 무상 아니라
지금 태어난 존재도 무상

초기는 생멸의 관점서 이해
대승은 불생불멸로 바라봐

초기불교의 무상관을 잘 드러내는 게송으로 쌍윳다니까야의 ‘웨뿔라빱바따경’이 있다. “조건 지어진 모든 존재는 무상하다. 이는 일어나면 곧 사라지는 법을 말함이니, 만약 누구라도 이러한 일어남과 사라짐으로부터 멀리 벗어난다면 언제나 고요한 열반의 기쁨을 누리게 되리라.” 대승경전인 열반경에도 같은 내용이 적혀있다.

무상과 관점에서 법은 찰나의 시간도 머물지 못한 채 사라지고 뒤에 이어 새로운 법이 곧 바로 발생한다. 뒤의 법이 발생하려면 현재의 법은 사라져야 한다. 중요한 것은 현재의 법은 반드시 뒤의 법을 생기게 하는 원인이 된다. 이런 관계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한 자루의 촛불이 타오르고 있다고 할 때에 촛불은 우리들 눈에 계속 타고 있는 듯이 보인다. 현재의 촛불은 찰나적으로 일어나자마자 사라지면서 곧바로 뒤의 촛불이 일어나고 그 촛불은 다시 사라지면서 다음의 촛불이 일어난다. 결국 타오르고 있는 촛불에 동일한 촛불은 없으며 계속하여 지나간 촛불과 새로운 촛불이 반복되면서 초가 타는 것이다. 그러나 촛불은 비연속적 연속의 법칙으로 타오르고 있다. 이를 사람들의 몸과 마음에 적용하면 우리의 몸과 마음은 무상해서 한시도 머물지 못한 채 계속 변하고 있다.

몸을 이루고 있는 세포는 세포대로 생기자마자 곧 사라지면서 다른 세포가 생기고 마음은 마음대로 일어나자마자 곧 사라지면서 새로운 마음이 일어난다. 이때 중생의 몸과 마음은 생멸해 계속 될 수 없으므로 비연속적 속성을 띠고 있지만 아주 사라지지 않고 또 다른 몸과 마음을 존재하게 하므로 연속적 속성을 띠게 된다. 따라서 초기 불교의 무상관은 찰나 생멸의 연속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에 반해 대승불교는 법이 무상하지만 생기고 없어지는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현재의 법이 있다고 할 때에 현재의 법은 새삼 생긴 것도 아니고 멸한 것도 아니라는 설명이다.

현재의 법과 뒤의 법의 관계에 대한 관점은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현재의 법이 그대로 이어져 뒤의 법이 생기는 것, 둘째 현재의 법이 사라지고 있을 때 동시에 뒤의 법이 생기는 것, 셋째 현재의 법이 사라지고 나서 뒤의 법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세 가지 견해를 모두 배격한다. 첫 번째 주장처럼 현재의 법이 그대로 이어져 뒤의 법이 생긴다면 이는 상주한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에 무상이라고 할 수 없다. 두 번째처럼 현재의 법이 사라지고 있을 때 동시에 뒤의 법이 생긴다면 찰나 가운데에 유와 무가 함께 한다는 논리가 되어 모순이다. 세 번째처럼 현재의 법이 소멸한 후에 뒤의 법이 생긴다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법이 일어난다는 논리가 되어 역시 모순을 면할 수 없다. 용수보살이 중론에서 “유는 무로부터 생겨날 수 없고 유는 유로부터 생겨날 수 없으며 유와 무는 함께 할 수 없다”고 한 주장이 이와 같은 논리를 증명한다.

현재 타오르고 있는 촛불은 그대로 이어 질수 없다. 촛불은 무상하기 때문에 한 찰나도 머물지 못하고 변한다. 만약 현재의 촛불이 다음 촛불인 뒤의 촛불로 이어진다면 촛불의 무상함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현재의 촛불이 타오르고 있는데 뒤의 촛불이 생겨 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현재의 촛불이 존재하고 있는 동안 뒤의 촛불은 결코 생겨 날수 없다. 반대로 현재의 촛불이 사라지고 나서 뒤의 촛불이 생겨 날수도 없다. 만약 현재의 촛불이 사라졌다면 이는 불이 이미 꺼진 상태이므로 뒤의 불을 생기게 할 근거를 잃게 된다. 그렇다고 현재의 촛불이 지금 사라지고 있는 상태에서 뒤의 촛불이 일어 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촛불의 시간적 측면에서 발생과 소멸을 동시에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촛불은 어떤 법칙 속에서 타오르고 있는 것일까? 곧 일어남도 없고 사라짐도 없는 법칙 속에서 타오르고 있는 것이다.

만약 현재의 촛불이 타면서 뒤로 이어지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안은 채 뒤의 촛불을 일어나게 했다면 뒤의 촛불 역시 다음의 촛불로 이어지지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다. 따라서 대승불교의 시각에서 찰나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촛불들은 새삼 생겨나는 것도 아니며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현재의 촛불이 생멸을 떠나 타오르고 있으므로 뒤의 촛불도 생멸을 떠나 타오르고 있다. 이를 중생의 몸과 마음에 적용하면 중생의 몸과 마음 역시 촛불처럼 변하고 있지만 일어나고 사라짐의 연속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다. 곧 생도 아니고 멸도 아닌 생과 멸을 여읜 중도의 성품으로써 무상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법화경’은 “모든 법은 본래부터 항상 적멸한 모습을 지니고 있나니 불자들이 곧 이를 닦아 나간다면 오는 세상에 반드시 부처를 이루리라”라고 가르치고 있다. 대승불교에서는 변화하는 일체의 무상한 법들이 그대로 생멸을 여읜 가운데에서 존재하는 것이며 생멸을 여의었기 때문에 고요할 수밖에 없고 고요할 수밖에 없으므로 일체의 법 그대로가 적멸한 부처님의 열반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 무상은 법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달라진다. 초기불교가 생멸적 관점에서 무상을 대하다보니 당연히 초기불교는 법을 초월의 대상으로 삼는다. 생과 멸을 안고 있는 법들을 떠나야 곧 열반을 이루게 되어 있다. 그러나 대승불교는 무상한 법들을 초월 하려 하지 않는다. 무상한 법 자체가 그대로 생멸이 없는 가운데에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모든 법들이 생멸이 아닌 불생불멸의 성품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면 무상한 법 자체가 항상 고요한 모습을 지닌 열반의 경계라는 것이 대승의 열반관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두 무상관 가운데에 범부들이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쉬운 것은 아무래도 초기불교의 무상관일 듯싶다.

이제열 법림법회 법사  yoomalee@hanmail.net
 

[1242호 / 2014년 4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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