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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 2558년 봉축사에 부쳐

기자명 법보신문
  • 사설
  • 입력 2014.04.28 16:16
  • 댓글 1

꽃다운 생명 앗아간 건 바다 아닌 어른들 탐욕

2600년 전 생명의 존귀함과 평등을 선언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오신 날이다. 연등축제를 전후로 부처님 탄신 축하 행사가 다채롭게 펼쳐졌어야 했지만 봉축행사는 예정보다 대폭 축소돼 치러졌다. 세월호 침몰 희생자를 향한 불교계의 애도 표시다. 그래야 했다.

10대 청춘의 꽃들이 차디찬 바다 속에 잠겼다. 구명조끼 끈으로 서로를 묶고 죽음의 공포에 맞선 아이들 앞에 할 말을 잃는다. 배가 기울어지며 차가운 바닷물이 발목, 가슴, 목으로 차올랐을 것이다. 그들이 느꼈을 공포, 가늠이야 할 수 있겠는가. 그래도 그들은 절체절명의 순간에 함께했다. 서로의 체온을 나누며 생명을 유지하려 했다. 자신 앞에 놓인 공포를 어떻게든 이겨보려 애썼다. 이제 곧, 어른들이 구하러 올 것이라 믿으며 서로를 안았다. 그러나 그들의 희망, 기다림, 간절함은 관계 당국의 늑장, 무능으로 산산조각 났다.

16일 오전 9시54분 세월호의 좌현이 침수된 그 때, 퇴선명령 한 마디 없어 그 자리에서 차오르는 물만 바라보고 있던 그 때, 승객들의 자력 탈출이 어려워지기 시작한 그 때부터 구조인력의 선내 진입은 절실하게 필요했다. 하지만 잠수 장비도, 인력도 도착하지 않았다. 해경과 해군 잠수요원이 도착한 건 오후 5시쯤이었고, 강한 조류 탓에 물속으로 뛰어들지도 못했다. 300명의 생명을 품은 배는 그렇게 가라앉았다.

세월호는 여객선이 아닌 ‘죽음의 배’였다. 세월호는 최대 적재량을 초과해 과적을 했는데 별다른 제지를 받지 않고 출항했다. 2013년 세월호 운항을 처음 허가한 해양수산부가 세월호의 최대 화물 적재량을 단속 기관에 통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청해진해운이 지난 해 접대비와 광고비로 쓴 돈은 약 3억원. 반면, 승무원의 안전교육에 쓴 돈은 고작 54만1천원이다. 선주의 욕심만 가득 실은 세월호였다.

경비절감을 이유로 20년으로 제한된 여객선 선령을 30년으로 연장해 준 건 이명박 정권이었다. 규제만 완화해 주고는 그에 따른 안전책은 ‘나 몰라’라 했다. 국민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한다는 박근혜 정부는 ‘행정안전부’를 ‘안전행정부’로 바꿔가며 호들갑을 떨었지만 재난대응에 관한 한 무능의 극치만 보여줬다. 최초 신고에 따른 전파 체계 미숙으로 구조 골든타임을 놓친 해양경찰은 이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현장 감각 제로에 가까운 사람들끼리 모여 좌충우돌만 일으킨 재난총괄기관 안전행정부는 그 본연의 기능을 완전히 잃었다. 국가적 재난임에도 ‘우린, 재난 컨트롤타워가 아니다’라며 책임권에서 벗어나려는 청와대. 이 모든 걸 관료사회의 무능으로만 치부할 수 있을까? 권위만 누리고 책임은 안 지려는 이러한 행태, 승객보다 먼저 탈출한 선장 행태와 무엇이 다른가. 선장 없는 세월호였다.

그러기에 우리는 정부를 상대로 모질게 따져 물어야 한다. 실종자가 사망자로만 바뀌고 구조자 숫자는 왜 0이었는지. 나아가 재발방지 대책은 물론 개선된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되는지도 두 눈 부릅뜨고 지켜봐야 한다. 그래야 ‘권력의, 권력에 의한, 권력을 위한 정부’가 아닌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를 세울 수 있다. 그래야만 또 다른 참사를 막을 수 있다.

우리 자신 또한 성찰해 보아야 한다. 물질만능, 권력지향, 안전불감증 사회는 결코 한 두 사람의 권력자에 의해 조성될 수 없다.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사회를 애써 외면하려 한 우리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탐진치 삼독에서 벗어나라 하신 부처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탐욕심만 더 키워 오지 않았는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자비를 나누라’하셨다. 서로의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 자비의 원천은 연기다.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하셨다. 나와 남, 나와 다른 생명, 나와 자연은 서로 ‘하나’로 한 공간 안에서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전하셨다. 동체(同體)다.

그 어느 때보다 동체자비심이 팽목항에 전해져야 한다. 지금, 비통에 잠겨 한 호흡조차 쉬기 어려운 사람은 유가족이다. 그들을 위로해야 할 사람은 우리다. 그들이 혼자만이 아니라는 걸 전해야 한다.

‘평화와 생명’ 중심 사회로의 대 전환에 앞장서야 할 때다. 생명의 존귀함과 평등을 강조한 부처님 탄생게 메시지를 이 사회에 실현시켜야 한다. 꽃다운 생명을 앗아간 건 바다가 아닌 어른들의 탐욕이란 걸 명심하고 또 명심해야 한다.

[1243호 / 2014년 4월 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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