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불교와 나무] 1. 부처님과의 인연

기자명 법보신문

탄생부터 열반까지…언제나 그늘 보시한 말 없는 외호신장

무우수 아래서 태어나 샬라나무 아래서 열반에 드신 부처님으로부터 시작된 불교는 나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종교다. 비단 부처님의 생애 뿐 아니라 2500여 년의 세월에 걸쳐 전 세계에 전파되고 정착되는 과정에서 각 지역의 나무와도 수많은 인연을 맺었다. 불교와 나무는 어떤 관계를 형성하며 함께 성장해 왔는지 살펴본다. 편집자

▲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이루신 마하보디 사원의 핏팔라 나무. 인도 보드가야.

부처님의 일생을 한두 마디로 요약해 보자면 ‘나무 아래서’라는 구절이 잘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물론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은 부처님의 삶을 ‘길 위에서’라고 표현하기를 더 즐겼다. 길에서 태어나 길에서 살다가 길 위에서 입멸한 부처님이셨다고! 그러나 룸비니의 한 나무 아래서 태어나 이곳저곳의 나무들 아래서 명상하고 수많은 나무 아래 앉아서 설법하다가 마침내 나무 아래 누워서 조용히 세상을 떠났던 이가 바로 부처님이셨다.

나무 아래서 일생을 보낸 부처님
부처님은 일생토록 나무 아래서, 나무와 함께 살다가 마침내 나무 그늘을 떠난 분이었다. 그러한 여정은 한역 경전에서 “수하(樹下)”라는 말로 수없이 등장하고 있다. 부처님의 삶이 이처럼 나무와 깊은 연결고리를 갖고 있다는 사실은 불교 특유의 것이라고만 말하기도 어려우며, 인도 문화의 특징 중 하나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아주 오랜 고대부터 지금까지도 인도인들에게 나무는 보배 열매가 열리는 신목(神木)으로서 신앙의 대상이며 때로는 신 그 자체로 여겨지기도 한다. 열대성 기후 환경 덕분에 풍부한 나무 열매에 의지해서 살았던 고대 인도인뿐만 아니라 현대 인도인들도 나무에는 신성이 깃들어 있다고 믿고 있다.

지금도 인도 전역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신목들은 화려한 치장을 예사로이 하고 날마다 사람들의 인사와 기원 소리를 들으며 자라고 있다. 우리의 눈길을 끄는 온갖 장식을 걸쳐 입고서 동네를 지키고 서 있는 신목들은 그러한 나무를 대하는 인도인의 자세가 어떠한지 미루어 짐작하게 해 준다. 그 특별한 나무들은 사람들에게 유용한 과실을 주든지 안 주든지 상관없으며 뿌리 깊은 전통 속에서 아무런 의심 없이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반얀 나무가 그러하며, 핏팔라 나무, 잠부 나무, 우둠바라 나무, 샬라 나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나무들이 시대와 지역에 따라서 신목의 하나로서 소중히 여겨졌다. 특히 힌두교에서는 여러 신들이 그러한 나무와 짝을 이루어 숭배되었고, 출가 수행하는 전통을 따르는 자이나교를 비롯한 슈라마나 종파에서는 한 수행자와 어떤 특정 나무를 동일시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러한 나무들을 총칭하여 칼파 나무라 부르기도 하고 다르마 나무, 또는 차이티야 나무라고도 부른다. 인도 불교 또한 그와 같이 역사 오랜 수목 신앙과 깊은 관련을 맺고 전개되었다.
 

탄생의 나무, 아쇼카
태중의 왕자를 낳기 위해서 친정으로 향하던 마야 왕비는 도중에 잠시 쉬고자 머물렀던 룸비니의 한 나무 아래서 싯다르타를 낳았다. 그 나무의 이름이 아쇼카(aśoka : Saraca indica)였다. 무우수(無憂樹)라는 이름으로 의역된 아쇼카 나무는 부처님의 탄생을 상징하는 대표 나무가 되었다. 부처님의 일대기를 묘사하는 고대 미술품에서 흔히 마야 왕비가 선 채로 태자를 낳으면서 손으로 붙잡고 있는 나무로 묘사되고 있다.

그런데 지금은 네팔 룸비니에 들어서는 길목부터 우리를 반겨 맞이하는 나무는 폴리알티아 롱기폴리아(Polyalthia longifolia)로서, 잎사귀의 생김새가 약간 비슷할 뿐 꽃도 다른 품종이며 실제 아쇼카 나무는 아니다. 이 유사 품종의 나무는 민간에서 아쇼카로 불리고는 있지만, 부처님의 탄생과 관련된 아쇼카 나무와는 잎사귀가 달려 있는 방식이 다르다. 그렇지만 잎사귀 자체가 아쇼카와 비슷하고 수형(樹形)이 좋기 때문인지 불교 관련 성지뿐만 아니라 인도 곳곳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대다수의 인도 현지인도 이 나무가 부처님의 탄생목인 아쇼카라고 안내하고 있을 정도이다.

▲ 수자타가 부처님께 공양을 바친 자리에 서 있는 니야그로다 나무. 인도 보드가야.

상호의 나무, 니야그로다
아쇼카 나무 아래서 태어나 훌륭히 자란 싯다르타는 그 체형과 상호(相好)도 남달리 생겼던가 보다.

“니야그로다 나무와 같이 가로 세로 똑같은 여래”(如尼俱類樹 縱廣正平等 如來)라는 표현이 ‘장아함경 대본경’에 나온다.

32가지로 열거되는 부처님의 형상 중에는 “니야그로다 나무처럼 몸이 크고 넓다”(身長廣等, 如尼拘盧樹)라는 설명도 들어 있다.

니야그로다(nyagrodha : Ficus benghalensis ; Ficus indica L.)는 흔히 반얀(banyan)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나무이다. 거대하고 웅장하기가 이루 말할 데 없는 니야그로다 나무이기에 위대한 부처님의 모습을 그 나무에 비견하여 설명한 것이 아닐까? 아무려면 니야그로다 나무처럼 위로 자란 만큼 옆으로도 퍼진 상태, 그래서 가로와 세로 길이가 똑같은 몸을 가졌었다는 뜻의 비유는 아닐 것이라고 본다.

삼매의 나무, 잠부
싯다르타 태자는 맨 처음 잠부(jambu : Syzygium cumini) 나무 아래서 명상에 들었다. 출가하기 한참 전의 일이었다. 무성한 잠부 나무 아래 앉아서 명상에 잠긴 태자. 그는 어린 나이였지만 살아 있는 존재의 실상과 현실에 대해서 직시하고 날카로운 의식의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게 된다.

그때 일을 전하고 있는 ‘중아함경 미증유품’에서는 매우 희한한 일을 전하고 있다.

“정오가 지나자 다른 모든 나무의 그림자는 옮겨 갔지만 오직 잠부 나무만은 그림자를 옮기지 않고 태자의 몸에 그늘을 드리운 채 그대로 있었다.”(日中之後, 一切餘樹影皆轉移, 唯閻浮樹其影不移, 蔭童子身.)
그때 처음 잠부 나무 아래서 삼매를 경험한 태자는 오래도록 그 날의 기억을 지니고 살다가 마침내 출가의 길을 떠나게 된다.

지혜의 나무, 핏팔라
태자 싯다르타가 출가하여 긴 고행과 수행 시절을 보내고 나서 마침내 부처님이 되는 장면에 등장하는 나무는 핏팔라(pippala : Ficus religiosa)이다. 이 나무는 인도 문화의 핵을 이루고 있는 나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요하다. 고대 인더스 인장에도 등장하는 핏팔라 나무를 인도인들이 숭배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하나는 24시간 산소를 내뿜는 특성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점은 특히 나무 아래서 밤낮으로 명상하며 생활하는 고행 수행자들이 의지하기에 딱 좋은 환경이 아닐 수 없다.

출가하여 명상으로 살아가던 싯다르타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핏팔라 나무 아래서 최상의 지혜를 얻었던 날, 그리하여 수행자 싯다르타가 아닌 부처님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 순간을 지켜보았던 핏팔라 나무. 바로 그 자리의 그 나무의 후신들이 지금도 부처님의 숨결을 고스란히 전하고 있다.

핏팔라는 위대한 그 순간을 함께했던 인연으로 새로운 이름을 얻는다. 바로 보디(bodhi) 나무라는 이름이다. 음역하여 보리수(菩提樹)라고 부르고, 각수(覺樹)라고 의역한다.

긴 역사 동안 인도 땅에 명멸했던 수많은 수행자와 사상가들, 그들도 나무에 의지하여 살았고 그들이 얻은 지혜를 지켜보았던 수많은 나무들이 있었지만, 부처님의 보리수만큼 거대한 명성을 얻은 예는 없다고 단언해도 좋으리라.

▲ 마하파리니르바나 사원 앞 샬라 나무. 인도 쿠쉬나가르.

열반의 나무, 샬라
위대한 전법의 여정을 다 마친 부처님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쿠쉬나가르였다. 니르바나에 임박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노년의 부처님은 고향을 향해 여행을 떠났다. 그 길을 가던 도중에 어느 날 부처님은 두 그루의 나무 사이에 누워서 니르바나에 들었다. 부처님의 그 마지막 숨결에 그늘을 드리웠던 두 그루 나무가 바로 샬라(śāla : Shorea robusta)이다. 열반의 자리에 서 있었던 두 그루의 샬라 나무는 때 아닌 꽃을 활짝 피웠고 꽃비를 흩날려 공양했다. 그 장면을 목격했던 어느 비구의 시가 ‘잡아함경’에 실려 있다.

“착하고 아름다운 샬라 나무여, 가지가지 드리워 예불 드리고, 위대한 스승이 반열반하시니, 어여쁜 꽃으로 공양하는구나.” (善好堅固樹, 枝條垂禮佛, 妙花以供養, 大師般涅槃.)

▲ 김미숙 교수
샬라 나무는 그 인연으로 견고수(堅固樹)라는 이름을 얻었다. 지금도 쿠쉬나가르의 마하파리니르바나 사원 앞에는 두 그루의 샬라 나무가 서 있어 오가는 불자들을 반기고 있다.

김미숙 동국대 다르마 칼리지 강의 초빙 교수

 

 
 

[1243호 / 2014년 4월 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 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