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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의 색·향·맛 체화해야 제대로 된 수행”

  • 불서
  • 입력 2014.05.01 20:38
  • 수정 2014.05.01 20:41
  • 댓글 1

‘동다송’ 해설서 펴낸 봉은사 주지 원학 스님

▲ 봉은사 주지 원학 스님은 “어떤 차를 즐기건 개인의 취향이지만, 그 속에 수행의 길이 담겨 있는가”를 되묻는다.

“초의 선사에게, 수행자에게 차는 단순한 기호 식품이 아닙니다. 차를 달이고 마시는 일, 차의 색과 향과 맛을 찾는 것은 수행인 동시에 궁극적으로 중생에게 회향하는 과정입니다. 취향에 따라 커피를 마시고 꽃차를 즐긴다 해도 수행자는 동다에 담긴 이 뜻을 잊으면 안 됩니다.”
‘동다(東多)’에 대한 봉은사 주지 원학 스님의 정의는 간명하다. ‘동다송’을 번역, 해설해 엮은 책 ‘향기로운 동다여 깨달음의 환희라네’를 출간한 이유기도 하다.

초의 선사는 우리 땅에서 생산되는 녹차를 중국차와 구분하기 위해 ‘동다’라 이름짓고 ‘다선일미’의 경지를 노래한 시 ‘동다송’을 지었다. 동다송은 이미 대여섯 종의 번역서가 시중에 나와 있다. 그럼에도 다시 번역서를 출간한 이유는 수행의 목표가 중생을 향한 회향이라는 점을 명확히 알리기 위해서다. 

깨달음 중생에 회향하라는
대승 가치 구체화시킨 표현 
동다송 ‘다선일미’ 참 지향점 
수행자 홀로 즐기는 차 아닌
올바른 수행과 실천에 있어 
“초의 선사는 다도·시 활용 
배불시대 극복한 포교 전략가”
산사에 확산되는 커피 풍토에 
“수행의 길 들어 있는가” 일침

“차와 선이 둘이 아님을, 나아가 차와 선은 단순한 수행의 도구가 아닌 민중을 향한 실천, 회향의 길임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은 이 책이 첫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동다송은 한문이 난해해 번역이 어렵기로 손에 꼽힌다. 또 시가 품고 있는 이면의 뜻을 풀어내기도 만만치 않다. 원학 스님은 책을 집필하며 한문 번역 못지않게 동다송을 지은 초의 선사의 속마음, 그 내면의 뜻을 읽는데 주력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본색과 본심이 있지만 분별적 망상에 물들면 두 가지를 모두 잃고 만다. 이것을 잃지 않고 치유할 수 있게 돕는 것이 바로 초의 선사가 말하는 차의 덕성이다. 차의 덕성이 실제 생활 안에 녹아들면 인간의 본색과 본심은 맑은 차의 색과 향으로 서서히 물들게 된다.” -본문 382쪽

▲ ‘향기로운 동다여 깨달음의 환희라네’초의 선사 저 / 원학 스님 엮음 / 김영사

원학 스님과 동다송의 인연은 3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3년 해남 대흥사의 총무국장,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까지 부주지 소임을 맡으며 대흥사와 초의 선사, 그리고 동다송의 가치에 눈을 떴다.

“사찰의 흥망성쇠는 대부분 불교의 사회적 위상과 그 궤적을 같이 합니다. 불교의 위상이 높아졌을 때 사찰도 흥하고 위상이 추락하면 사찰 역시 쇠락합니다. 그러나 대흥사는 숭유배불의 절정기에도 오히려 흥성했습니다. 대흥사에 서산대사의 유품이 봉안돼 있는 것도 한 이유겠지만 무엇보다도 초의 선사가 계셨기 때문입니다.”

대흥사와 초의 선사의 족적을 되짚으며 원학 스님은 동다송을 번역·해설해 보급하겠다는 원력을 세웠다. 이후 불교중앙박물관 등 여러 곳에서 동다송을 강연하며 차근차근 준비의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해 12월, 40여 일간을 칩거하며 집필을 마무리했다.

그렇다면 동다송을 통해 만나 초의 선사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원학 스님은 초의 선사에 대해 “대단한 포교전략가”였다고 상찬했다.
“초의 선사가 살았던 17~18세기는 유교, 그 중에서도 성리학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입니다. 승려의 도성출입조차 금지됐던 당시 초의 선사는 차와 시라는 문화예술을 통해 사회 지배계층이었던 유생들과 대등하게 교류하며 불교에 대한 그들의 관심을 자연스럽게 높여나갔습니다. 특히 색, 향, 맛이라는 구체적인 키워드를 통해 불교의 마음공부를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 전달하는 능력을 보였습니다. 그야말로 배불시대에 가장 효과적인 포교의 수단을 개발한 포교전략가였습니다.”

17~18세기는 성리학의 극성기인 동시에 사회적으로는 실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이 태동하는 시기였다. 초의 선사는 불교가 지배층과 민중에게 다가가기 위한 새로운 방편을 고민했다. 그 결과물이 동다송이었다고 원학 스님은 분석했다.

“차가 지닌 덕성 가운데 색과 향이 깨달음의 상징이라면 맛은 회향입니다. 맛이란 그것을 느낄 수 있는 상대가 있어야 합니다. 맛은 곧 중생을 위한 방편입니다. 그런 점에서 초의 선사의 동다송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민중과 소통하고자 했던 치열한 고민의 결실입니다.”

동시에 유생들과의 교류가 가능했던 점에 주목하며 초의 선사를 “누구보다 따듯한 감성을 지녔던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유생들이 초의 선사에게서 인간적 정을 느꼈을 것”이라는 원학 스님은 “초의 선사가 유생들의 마음을 이해했기에 그들과의 허물없는 교류가 가능했으며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는 능력은 그 자신이 그만큼 많은 고민을 해봤다는 뜻이기도 하다”고 분석했다. 고민을 해본 사람만이 타인의 고민을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다.

“초의 선사는 차를 마실 때 혼자 마실 것을 권했습니다. 그것은 차 마시는 것을 수행으로 삼으라는 가르침이지 혼자서 차를 마시는 즐거움에 빠지라는 뜻이 아닙니다. 수행의 목적은 일신의 깨달음이 아닙니다. 차가 색·향과 더불어 맛이라는 덕성을 통해 그 맛을 주변인들과 더불어 나누듯이 깨달음 또한 중생을 향할 때 비로소 올바른 대승의 회향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커피를 즐기는 것이야 개인의 취향이지만 그 속에서 동다가 지닌 이 같은 수행과 깨달음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지, 글쎄요.”

산사에 부는 커피 열풍에 대한 우려는 차 마시는 일 하나까지도 수행으로 삼기를 바라는 마음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스님은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차가 지닌 색, 향, 맛의 덕성을 인간의 마음과 몸에 옮길 때 차를 마시는 것은 곧 수행이 될 수 있습니다. 차를 통해 인간의 심성이 차의 색처럼 맑아지고, 차의 향처럼 향기로워지며, 차의 맛처럼 다른 이에게 베풀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수행입니다.”

서울의 한 복판 강남, 하루에도 수 천 명의 사람들이 오가는 봉은사 주지 소임을 맡은 원학 스님은 요즘도 매일 아침 한 잔의 차를 잊지 않는다. 머무는 곳이 어디든 ‘동다’가 곁에 있다면 수행자의 본분을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1244호 / 2014년 5월 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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