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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주관도 객관도 공(空)

기자명 혜국 스님

“내가 옳다는 흑백논리 인류문명에 끼친 해악 너무도 커”

옳다는 생각없는 것이 진참회
내 입장에서는 내가 옳지만
상대방 입장에서는 반대일 뿐
옳고 그름 논리로 인간세상은
너무도 많은 전쟁 되풀이 했고
지금도 여전히 싸우고 있는 중

전쟁으로 소비되는 에너지가
너무나도 많아 안타까울 뿐
내 앞에 있는 저 사람이
내 입장에선 남쪽에 있지만
그 사람 입장에선 북쪽일 뿐
남쪽도 옳고 북쪽도 옳다는
그 사실 자체가 아름다울 뿐  

▲ 조주 스님의 사리탑 앞에서 기도 정진하고 있는 혜국 스님.

“능수경멸(能隨境滅)하고 경축능침(境逐能沈)하야, 경유능경(境由能境)이요 능유경능(能由境能)이니”

“주관(主觀)은 객관(客觀)을 따라 소멸하고, 객관은 주관을 따라 잠겨서 객관은 주관으로 말미암아 객관이요, 주관은 객관으로 말미암아 주관이니”라고 이어집니다. 글쎄요? 어디까지가 주관이고 어디까지가 객관입니까? 주관이란 말도 객관이란 말도 결국은 인간들의 생각에서 나온 얘기이거든요. 주관이라고 하는 내가 나 혼자 주관이 되는 게 아니고 객관인 공기와 허공, 대지와 태양열에너지 모든 우주 자연이 하나가 되어서 ‘나’라는 주관이 성립되지 ‘나’라는 주관이 따로 홀로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주관 안에 객관이 있고 객관 안에 주관이 있습니다. 주관, 객관 모두가 공(空) 아닙니까? 주관도, 객관도 그렇지만 어두움과 밝음, 크다 작다, 너다 나다 모든 시비분별이 다 그렇습니다. 어두움이란 밝음이 있다가 밝음이 사라진 상태이지 어두움이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밝음 또한 어두움이 왔다가 어두움이 사라진 상태일 뿐이지 밝음이란 세계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즉 어두움과 밝음은 주관과 객관으로 나누어 질수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이방이 캄캄하여 어두움에 쌓여 있을 때 전등불 하나만 켜면 어두움이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어두움이 옆방으로 피신 간 것도 아니고 어디로 숨은 것도 아니거든요. 어두움 자체가 없는 겁니다. 어두움이라고 말하는 그 어두움은 밝음이 없는 상태일 뿐입니다.

어두움이 우리가 말하는 죄업(罪業)이라고 한번 생각해보세요. 우리들 죄업이란 실체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우리들 마음광명을 밝히지 못한 상태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어두움이란 밝음이 없는 상태일 뿐 어두움이 따로 없듯이 우리 죄(罪)도 또한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죄라는 세계가 아예 없다는 말로 듣는데 그것 또한 잘못 듣는 얘기가 됩니다. 죄의 본질을 바로 깨달아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마음을 밝히지 못하고 방황하면 죄업이요, 마음이 공(空)한 줄을 깨달아서 바로 보면 죄업 또한 본질이 공한 겁니다. 파도의 본질이 바닷물이듯 그와 꼭 같습니다. 그래서 내가 좋아서 지은 죄는 당연히 내가 책임져야 된다는 생각에서 살아간다면 나 자신이 당당해지겠지요. 다시 말해서 내가 좋아서 일으킨 생각인 만큼 그 그림자 즉 어두움에 매(昧)하지 않아야 된다는 얘기죠. 그 말은 내 인생은 내가 사는 것이지 누구도 대신 살아줄 수가 없다는 겁니다. 태양을 향해서 밝은 광명으로 걸어가든지 태양을 등지고 어둠을 향해서 걸어가든지 어디까지나 본인이 결정할 일입니다.

욕지양단(欲知兩段)인댄 원시일공(元是一空)이라,“양단을 알고자 할진댄 원래 하나의 공이니라”라는 의미로 원시일공(元是一空)을 바로보라는 가르침입니다. 주관도 공 위에 있고 객관도 공 위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죠. 그 얘기를 좀 더 해보면 사람은 대지(大地)에 의지해 살고 있고 대지는 허공(虛空)을 의지해서 돌아가고 허공은 우주의 대진리 즉, 도(道)에 의해서 존재하고 그 도는 생멸(生滅)이 끊어진 무분별(無分別)에 의해서 운행되고 있다는 겁니다. 인간이 대지에 의지해 산다는 말은 대지를 벗어날 수가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지구는 대지를 의지해 살아가는 모든 생명과 하나가 되어 천야만야한 허공을 돌고 돌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게 제 멋대로 돌고 있다면 우리는 벌써 다른 별자리와 충돌하여 박살이 났을 겁니다. 그 많고 많은 별들이 각자의 길을 돌고 있는데 그 사실을 도(道)라고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괴테의 시를 한번 옮겨보겠습니다.

“모든 것이 제멋대로 구르는 듯해도 사실은 하나로 얽혀있다네 / 우주의 힘이 황금 종을 만들어 이들을 떠안고 있다네 / 하늘향기 은은히 퍼져 나가니 그 품에 지구가 휘감기누나 / 모든 것이 향기를 쫓아 조화로이 시공을 채우누나 / 휘몰아치는 생명의 회오리 속에서 나도 파도도 다 함께 춤춘다 / 삶과 죽음이 있건만 영원의 바다는 쉼 없이 출렁이누나 / 변화하고 진동하는 저 힘이 바로 내생명의 원천 / 오늘도 먼동이 트는 아침에 거룩한 생명의 옷을 짜노라”

저는 젊어서 이 시(詩)를 읽으면서 “인간은 지구를, 지구는 허공을, 허공은 도에 의해서 모두가 하나가 되어 돌아가는 그러한 세계를 이렇게 아름다운 시로도 표현할 수가 있구나”하면서 감명 깊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다음은 “일공동양(一空同兩)하야 제함만상(劑含萬象)이라”, “하나의 공(空)은 양단(兩段)과 같아서 삼라만상을 모두 다 포함하며…”이렇게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공입니다. 공(空)했다고 하면 아무것도 없는 걸로 알거나 아니면 텅 빈 허무한 걸로 아는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공의 세계는 그러한 세계가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알았다면 그건 단멸(段滅) 공(空)에 빠진 것이지요. 주관도 객관도 양단 모두 공이라고 하신 말씀은 양단을 부정하는 말씀에서 하신 말씀이고 긍정하는 쪽에서 얘기하자면 공(空)이 바로 양단(兩段)이 되는 겁니다. 이런 말이 이상하게 들렸다면 우리는 흑백논리에 익숙해져서 그렇습니다. 이거냐 저거냐, 옳다 그르다 그러한 흑백논리에 익숙해져서 그러한 말이 바로 들리지 않는 겁니다. 이거 아니면 저것이라야 한다는 흑백논리가 인류문명에 끼친 해악을 우리는 너무나 모르고 있습니다.

이것이면서 저것이 될 수 있고 저것이면서 이것이 되는 원융무애(圓融無礙)의 세계에서 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인데도 그런 문제의식조차 간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내 앞에 앉아있는 저 사람이 내 입장에서는 남쪽에 앉아 있다고 하지만 그 앞에 앉아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북쪽에 앉아있는 게 맞거든요. 남쪽도 옳지만 북쪽도 꼭 같이 옳다는 이 사실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욕지양단(欲知兩段)인댄 원시일공(元是一空)”이라고 하시고, 바로 이어서 “일공동양(一空同兩)하야 제함만상(齊含萬象)”이라고 하신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진정한 참회(懺悔)란 내가 옳다는 고집, 내가 옳다는 생각을 일체 다 놓아버린 상태입니다. 내가 옳다는 생각이 아예 없는 자리가 진참회(眞懺悔) 인겁니다.

그렇습니다. 내 입장에서는 내가 옳지만 상대방 입장에서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옳고 그름의 논리로 인간 세상은 너무 많은 전쟁이 있어왔고 지금도 싸우고 있는 겁니다. 이러한 싸움으로 소비되는 에너지가 너무도 아까운 겁니다. 그래서 신심명에서는 둘을 버리고 하나가 된다면 그 하나는 그대로 둘이라는 겁니다. 참 묘하죠. 하나의 공(空)의 양단(兩段) 즉, 둘과 하나이기에 그대로 평화인겁니다. 그러한 까닭에 제함만상이라, 일체 세상만사 삼라만상이 하나의 공 가운데 건립되었다는 가르침이 실로 놀랍지 않습니까? 이미 까마득한 그 옛날 이런 말씀이 현대의 장이론을 능가하고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심명에서 말하는 ‘일공동양하야’하는 공은 일체 모든 세상을 포함한 공이면서 불공이라 세상 삼라만상 공 아닌 게 없다는 소리입니다. 나무 한그루 풀 한포기 그 어느 것 하나 공성연기(空性緣起) 아닌 게 없음이라 그대로 중도(中道)인 겁니다. 그러면서 진여연기(眞如緣起) 법계연기(法界緣起)라는 차별이 일어나서 일체 우주를 다 포함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철 큰스님은 옛 조사의 예를 들면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고 하신 겁니다. 여기서 산은 산이요 하면 산을 생각한다든지 물은 물이라 하면 물을 생각한다면 그건 벌써 어긋난 일이요, 중도연기(中道緣起)가 아닙니다. 그렇게 보면 신심명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게 됩니다.

“불견정추(不見精麤)어니 영유편당(寧有偏黨)가”, 세밀하고 거칠음을 보지 못하거니 어찌 치우침이 있겠는가, 성성적적(惺惺寂寂)한 고요에는 미운마음도, 원망하는 마음도 없습니다. 일체 시비분별(是非分別)이 끊어진 일공(一空)입니다. 그 하나의 공(空)에 무슨 개념이 붙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의 공이 양단과 하나인데 세밀하고 거친 것이 다르지 않거든요. 따라서 공이 곧 공이 아니요 공 아님이 곧 공이라, 그대로가 원융무애로서 자유자재 대해탈인데 세밀함이니 거칠음이니 어디에 기울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편당이 있을 리가 없다는 겁니다.

이런 글을 보면서 어디 먼 세상 얘기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바로 우리들 각자 우리 자신이 본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가르침입니다. 바로 내 마음의 고향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면 우린 누구나 스스로 부처라는 그 사실입니다. 부처란 모자란 것을 어디 가서 꾸어오는 일도 아니요, 없는 것을 새로 만드는 일도 아니요, 우리들 누구에게나 본래 갖추어진 무한능력을 깨닫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평생 그러한 무한능력을 찾는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어쩌면 너무나 큰 무한능력이기에 엄두가 나지 않는지 몰라도 우리는 너무나 조그만 욕망에 붙들려서 그 욕망 심부름하느라고 한 평생 낭비하고 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생사윤회(生死輪廻)의 무서움을 아니 느낄래야 아니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불견정추(不見精麤)어니 영유편당(寧有偏黨)가”, 이 말씀이 우리에게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1244호 / 2014년 5월 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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