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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김홍도, ‘노승염송’

기자명 조정육

삶에 드리운 역경과 쉼 없는 점검은 깨달음나무를 키워내는 힘

“사람 몸 받는 일은 바다 한 가운데 눈 먼 거북이가 백 년에 한 번씩 머리를 내밀어 나무토막 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불법 만나기는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 잡아함경

말년에 생활고 시달린 김홍도
자신의 불행 딛고 불자 거듭나
신심 냈다고 성불하는 것 아냐
나무 돌보듯 자신을 잘 살펴야

▲ 김홍도, ‘노승염송’, 종이에 연한 색, 57.5×19.7cm, 간송미술관.

분갈이를 했다. 베란다에 있는 백 여개의 화분을 전부 분갈이하자니 40ℓ짜리 거름흙 열 두 포대가 들어갔다. 화분 위에 뿌린 마사토까지 합하면 열다섯 포대 정도 바꾼 셈이다. 작은 화분을 한 개씩 분갈이한 적은 있었으나 전체를 한꺼번에 손질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화분에 꽃을 기른 지는 25년이 됐다. 처음에는 아이비나 제라늄 등 작은 화분에서도 잘 자라는 식물을 길렀다. 작은 만큼 분갈이도 쉬웠다. 그런데 홍콩 고무나무나 떡갈나무, 관음죽이나 염좌는 나무가 크다보니 화분도 커서 전체 흙을 바꾸기가 쉽지 않았다. 힘들기도 하고 귀찮기도 해서 웃거름을 얹어 주는 것으로 분갈이를 대신했다. 그것만으로도 잘 자랐다. 이번에 큰마음을 먹고 화분 전체를 분갈이하게 된 것은 작년부터 나무들이 시들시들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영양이 부족해보였다.

고무나무가 심어진 화분을 옆으로 누이고 모종삽으로 흙을 긁어냈다. 윗부분의 흙은 잘 긁어졌다. 중간쯤 파고 들어가자 더 이상 흙이 떨어지지 않았다. 흙이 시멘트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삽질을 하면 바위에 부딪치듯 쨍쨍 소리가 났다. 돌보지 않아도 잘 자라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속은 병들어 있었다. 나무를 산 지 5년이 넘었는데 수돗물만 주면서 흙을 바꿔주지 않아 발생한 사건이었다. 그 모습이 마치 식물인간이 고무호스에 연명해 생명을 유지하는 것 같았다. 어떻게 이런 흙에서 죽지 않고 살았을까.

김홍도가 그린 ‘노승염송(老僧念誦):노승이 염불을 외우다’는 심심할 정도로 단순하다. 두 손을 맞잡은 스님 곁에 석장을 든 동자가 서 있다. 스님과 동자를 그린 인물 형상은 최대한 간략하게 그리되 구불구불한 선과 먹의 농담 변화가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다. 선 몇 가닥으로 살려낸 가사장삼의 맛이 더 이상 붓질이 필요 없을 만큼 자연스럽다. 먹을 많이 쓴 것도 아닌데 먹을 칠한 부분이 참 절묘하다. 옷의 앞쪽 부분에 진한 먹을 칠함으로써 회색 장삼 위에 적갈색 가사를 입었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가슴까지 올린 두 손에 힘이 들어가 있음을 암시해준다. 진한 먹은 허리 뒤에도 살짝 칠했다. 여기에 칠한 먹이 또 기막히게 적절하다. 허리 뒤쪽의 진한 먹은 스님의 무게 중심이 앞쪽으로 기울어지지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준다. 아무 생각 없이 쓱쓱 문지른 붓질 같지만 오랜 세월 인물을 그려온 노련함이 배인 그림이다. 얼굴도 마찬가지다. 밋밋해 보이던 스님 얼굴은 길게 뻗은 눈썹 때문에 생동감이 살아난다. 동자의 얼굴과 비교해보면 금세 알 수 있다. 머리카락이 검게 자란 동자는 눈썹을 생략하고 눈만 그린 반면 머리카락이 없는 스님은 긴 눈썹을 그려 넣어 인물의 특징을 살렸다. 평소 사람들은 눈썹이 긴 스님을 보면 도인 같다고 말한다.

김홍도가 그 감정을 모를 리 없다. 감상자의 심리상태를 분석해 붓 끝으로 설명했다. 세심한 성격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노승염송’은 김홍도가 인생 말년에 제작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말년에 ‘단원 늙은이’라는 의미의 ‘단노(檀老)’라는 관서를 자주 썼다. 연꽃 위에 앉은 스님의 뒷모습을 그린 ‘염불서승’에서도 ‘단노(檀老)’를 발견할 수 있다. 그의 말년 불화 속의 인물은 정면상보다 측면상과 뒷면이 많다. ‘노승염송’과 ‘염불서승’은 모두 스님을 주인공으로 그렸지만 ‘노승염송’은 좌상이고 ‘염불서승’은 입상이다. ‘노승염송’은 얼굴 옆모습이나마 확인할 수 있지만 ‘염불서승’은 스님의 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는 완전 뒷모습이다. 이런 세부적인 차이를 제외하면 두 작품에는 걸작이라는 공통점이 남는다. 보는 사람의 마음을 숙연하게 만드는 숭고함이다. ‘노승염송’의 상단에는 ‘단노(檀老)’라는 관서 위에 ‘입으로는 갠지스강의 모래알처럼 끝없이 염불하네(口誦恒阿沙復沙)’라는 글을 적었다. 만년에 염불에 주력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지장보살이 흔히 석장을 든 스님 모습으로 묘사되는 것을 감안하면 ‘노승염송’의 스님은 지장보살로도 해석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노승염송’은 죽음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김홍도가 자신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마지막으로 남긴 작품이 아닐까.

김홍도는 여러 점의 도석인물화(道釋人物畵)를 제작했는데 ‘군선도’같은 도교 소재의 그림은 젊은 시기에 치우친 반면 불교회화는 인생의 후반기에 많이 제작했다. 그는 정조(正祖)의 명으로 용주사(龍珠寺) 불화를 제작한 1790년(46세) 이후 급격하게 불교에 심취한 듯 여러 점의 훌륭한 감상용 불교회화를 남겼다.

‘절로도해’ ‘탑상거사’ ‘혜능상매’ 등이 모두 이 시기의 대표작이다. 용주사 불화 제작이 불교 세계를 공부하고 이해할 수 있는 계기였다면 연풍현감(延豊縣監) 시절에 경험한 사건은 불교를 개인적인 신앙의 차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용주사 불화를 마친 다음 해인 1791년 12월22일 김홍도는 충청도 연풍현감에 제수된다. 다음 해인 1792년에 연풍에 심하게 가뭄이 들어 기우제를 지내러 공정산(公靜山:조령산) 상암사(上庵寺)에 오를 당시 김홍도는 나이가 48세였는데 후사가 없어 시름이 깊었다. 절에 오른 김홍도는 정결한 도량이 치성 드리기에 적합하다고 여겨 자신의 녹봉을 던져 시주를 했다. 이로써 아들 김양기(金良驥)를 얻었다. 그가 인생의 황금기 때 제작한 ‘남해관음(南海觀音)’에는 기도의 가피를 입은 자의 환희심과 감동이 절절하게 배여 있다.

부처님께서 베살리 중각당에 계실 때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불법 만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비유하면 바다 한가운데 눈 먼 거북이가 있다. 이 거북이는 한량없는 겁을 살고 있는데 백 년에 한 번씩 머리를 내민다. 그리고 바다 가운데 나무토막이 떠 있는데, 구멍이 하나 나 있다. 구멍 뚫린 나무토막은 바다 물결에 떠다니면서 바람을 따라 이러 저리 떠돌아다닌다. 눈 먼 거북이가 백 년에 한 번 나와 바로 그 나무토막 구멍으로 머리를 내민다고 가정한다면, 가능하겠느냐?”

아난이 될 수 없다고 대답했다. 부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눈 먼 거북이와 나무토막은 비록 서로 어긋날지라도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어리석은 범부는 오취(五聚:지옥, 아귀, 축생, 인, 천)를 흘러 다니다 잠깐이나마 사람 몸을 받는 일이, 저 눈 먼 거북이가 백 년에 한 번씩 머리를 내밀어 나무토막 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사람 몸 받는 것도 어려운데 불법 만나기는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사성제에 대해 공부하지 못했다면 반드시 그 진리를 알고 익혀 실천해야 한다.”

진정한 신앙은 어려움을 겪어봐야 깊어진다. 김홍도가 56세 되던 1800년에 뜻밖의 사건이 발생했다. 6월28일 정조가 갑자기 승하한 것이다. 김홍도의 재주를 누구보다 먼저 알아보고 아꼈던 문예군주의 죽음은 김홍도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김홍도는 정조가 승하하고 나서 6년 동안 병고와 실의에 잠긴 나날을 보냈다. 어람용 그림을 전담하다시피하면서 특별대우를 받던 과거의 행복은 더 이상 누릴 수 없었다. 대신 어린 후배들과 함께 규장각 차비대령화원을 치루며 녹봉을 받아야 했다. 실의에 빠진 그는 오래전부터 앓아오던 천식과 병마에 시달려야 했고 외아들 김양기의 훈장에게 월사금을 보내지 못할 정도로 생활고에 허덕여야 했다. ‘노승염송’은 이 시기에 그리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김홍도가 그린 감상용 불교회화는 대략 30점 정도가 남아 있는데 그가 겪은 인생 말년의 불행을 종교적으로 승화시켜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 감동적이다. ‘노승염송’은 삶의 무상함과 신산스러움을 절절이 느낀 김홍도가 세속에 대한 부질없는 욕망을 모두 내려놓은 초탈한 심회가 담겨 있다. 수행의 참맛을 알지 못하면 결코 나올 수 없는 작품이다. 글과 그림에는 예술가의 마음이 담겨 있다. 재주나 기술만으로 좋은 작품이 완성되지 않는다. ‘노승염송’은 작품의 완성도에서 ‘남해관음’을 넘지 못하지만 감동에서는 ‘남해관음’이 감히 ‘노승염송’ 옆 자리를 넘보지 못한다.

김홍도는 노년의 고통 속에서 진정한 불자가 됐다. 바다 한가운데 눈 먼 거북이가 백 년에 한 번씩 머리를 내밀어 나무토막 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려운 불법을 만나 진심으로 불교에 귀의한 셈이다. 그는 고난에 찬 삶을 염불로 승화시켰다. ‘갠지스강의 모래알처럼 끝없이 염불’하면서 자신에게 드리워진 어둠과 칙칙함을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우리는 흔히 자신의 처지가 행복하고 즐거울 때 신심이 우러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무 문제가 없으면 신심을 내기 어렵다. 모든 것이 다 잘되는 줄 알고 느슨해지기 마련이다. 작년에 고무나무가 시들지 않았으면 나 또한 분갈이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돌보지 않아도 잘 자라는 나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다행히 나무가 말라 죽기 전에 조치를 취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이제 고무나무는 고무호스를 떼고 마음껏 숨을 쉴 수 있을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하는 것도 그와 같다. 한 번 크게 신심을 냈다 해서 성불하는 것이 아니다. 나무를 돌보듯 자주 자신을 살펴야 한다. ‘백천만겁난조우’한 불법을 만났으면 불법의 나무가 잘 자라도록 가꾸어야 한다. 불자라면 누구나 지켜야 할 육바라밀에 근거해서 자신을 점검하면 깨달음의 나무는 시들지 않고 잘 자랄 것이다. 설령 진딧물이 들러붙고 더위와 추위가 번갈아 찾아와도 나무는 끄떡하지 않고 뿌리를 내릴 것이다.

부처님 오신 날이 다시 돌아왔다. 부처님 오신 날이 빛나는 것은 열반재일 때문이다. 불기(佛紀)는 열반재일을 기준으로 삼는다. 한 사람의 생애는 그가 어디서 어떤 신분으로 태어났는가 하는 문제로 평가받지 않는다.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문제로 평가받는다. 부처님은 왕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찬탄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보물처럼 여기는 돈과 명예와 권력이 허망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 깨달음을 중생들에게 전해 주었기 때문에 공경 받는다. 45년 동안을 한결같이 타인을 위해 사는 삶은 숭고하고 위대하며 아름답고 거룩하다. 우리가 부처님을 닮기 위해 비슷하게 흉내 내는 것만으로도 우리 삶이 바뀔 정도로 그 분의 삶은 거대하다. 이것이 부처님 오신 날보다 열반재일이 더 위대한 이유다. 탄생일은 훌륭한 삶이 뒷받침됐을 때 가치있다. 부처님 오신 날을 해마다 기념하는 목적은 부처님의 삶을 잊지 말자는 의미에서다. 우리도 부처님처럼 살자는 뜻이다.

조정육 sixgardn@hanmail.net

[1244호 / 2014년 5월 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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