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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범승가종단개혁추진위(범종추) 결성

1994년 종단개혁 서막 알린 진보승가단체의 결집

▲ 1994년 종단개혁 서막 알린 진보승가단체의 1994년 3월23일 중앙승가대에서 출범한 범종추는 창립선언문을 통해 “종단개혁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수행자의 본원적 과제이자 어길 수 없는 역사의 명령”이라며 “모든 종단개혁세력을 결집해 개혁의 대도를 열어 나갈 것”이라고 천명했다.                      종단개혁기념사업추진위 제공

‘상무대 의혹’ 비판여론 확산
궁지몰린 의현원장 3선 강행
승가단체 종단개혁논의 ‘봇물’

94년 1월 8개 단체 연대결의
개혁방식 두고 단체간 이견
출범날짜 못 잡고 ‘지지부진’

중앙승가대, 검찰청 항의계기
범종추 출범 확정…조직구성
단식·비폭력 전제로 개혁추진

“조계종 종단개혁의 주체는 범승가종단개혁추진위(범종추)였다. 이들 단체는 주로 대학교육을 받은 젊은 층들로 구성됐다. 당면 과제로 김영삼 정부의 정치자금 문제해결과 의현 총무원장의 3선 반대를, 장기적인 목표로 불교의 체질개선을 내세웠다.”(유승무, ‘현대 한국불교 개혁운동의 흐름과 그 특징’, 불교평론 4호)

1994년 2월 민주당 정대철 의원의 폭로로 드러난 상무대 비리의혹은 불교계에 만만치 않은 파장을 몰고 왔다. 야당과 언론들은 연일 조계종 지도부와 정치권과의 검은 거래 의혹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불교계에 대한 부정적 여론도 급속히 확산됐다.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는 상무대 비리의혹은 의현 총무원장에게 적지 않은 부담이었다. 그동안 종단 내부에서 발생한 숱한 정쟁에도 좀처럼 흔들리지 않았던 그였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정치권과 언론의 거듭된 의혹제기로 운신의 폭이 갈수록 줄어들었다. 급기야 의현 총무원장은 임기를 5개월이나 앞두고 3선 강행이라는 무리수를 두고 말았다. 조계종 중앙종회는 3월16일 공고를 통해 “3월30일 예정된 제112차 임시종회에서 총무원장 선출의 건을 다룬다”고 발표했다. 당시 종헌종법에는 임기만료 몇 개월 전에 차기 총무원장을 선출해야 한다는 규정이 없었다. 의현 총무원장은 이를 교묘히 이용했다. 자신을 압박하고 있는 상무대 의혹과 퇴진 압력을 잠재우기 위한 술수였다.

그러나 이는 장고 끝에 둔 악수였다. 의현 총무원장의 3선 추진은 종단 내부에서 거센 저항을 불러왔다. 상무대 의혹으로 달아올랐던 의현 총무원장에 대한 비판여론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됐다. 뚜렷한 돌파구를 찾지 못하는 개혁세력들에게는 호재이기도 했다. 개혁세력들은 즉각 의현 총무원장의 퇴진을 요구하고 나섰다. 실천승가회를 비롯해 선우도량, 중앙승가대 학생회, 중앙승가대 동문회, 동국대 석림회, 동국대 석림동문회, 동국대 동림동문회, 전국승가대학인연합 등 8개 승가단체로 구성된 ‘범종추’ 결성이 가시화된 것도 이 무렵이다.

범종추 결성은 이미 1994년 1월부터 논의됐다. 실천승가회와 선우도량, 동국대 석림동문회, 전국승가대학인연합 등 승가단체 대표 21명은 1월14일 서울 종로 송현클럽에서 ‘한국불교의 미래를 밝히기 위한 승가단체 신년 인사회’를 가졌다.

법보신문(1994년 1월24일자)에 따르면 이들은 이날 종권교체를 통한 종단개혁에 젊은 승가가 나서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 했다. 이를 위해 추진위를 구성하기로 하고 이른 시일 내에 준비모임을 열기로 합의했다. 범종추 결성에 적극적인 단체는 실천승가회와 중앙승가대 학생회였다. 사회민주화를 견인했던 세력들이 중심이 된 실천승가회는 종권교체를 통한 종단개혁을 강하게 주장했다. 이를 위해 진보적 승가단체의 결집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선우도량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선우도량은 교육을 통한 승가의 사상적 변화를 개혁의 기본토대로 여겼다. 승가단체간의 이견은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당시 실천승가회 지도위원 지선 스님은 “종단 기득권층이 부정부패로 얼룩져 있는데 이들을 일단 몰아내야 개혁이 될 것 아닌가. ‘교육을 통해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말에는 공감하지만 그런 방식의 개혁은 현실적으로 어려워 보였다”고 회고했다.

장시간 논의 끝에 각 단체들은 서로의 입장차를 확인한 채 이날 모임을 마무리했다. 다만 각 단체에서 실무자를 선정해 종단 문제에 관한 이견을 조율해 나가기로 했다. 실무자들은 2월5일 동국대 석림동문회 사무실에서 모임을 갖고 8개 단체가 연대해 ‘의현 총무원장의 3임 저지’를 공동의제로 선정하는데까지는 합의했다. 곧이어 2월25일 8개 단체 대표 25명은 다시 석림동문회 사무실에서 만나 모임의 명칭을 ‘범승가종단개혁추진회’로 확정했다. 그러나 창립일정과 구체적인 활동계획은 마련하지 못했다. 종단개혁에는 공감하면서 어느 단체도 선뜻 전면에 나서기를 꺼려했다. 결국 창립일정은 종단의 상황에 따라 결정하기로 했다.

실천승가회는 속이 타들어갔다. 이미 1월17일 중앙종회가 개혁입법청원을 거부하자 실천승가회는 ‘집행부 퇴진 투쟁’을 공개적으로 선언한 상태였다. 그렇다고 실천승가회 자체 역량만으로 집행부 퇴진운동을 추진하기는 쉽지 않았다. 범종추 결성은 지지부진을 면치 못했다.

이무렵 터진 상무대 비리의혹과 의현 총무원장의 3선 추진은 분위기를 완전히 뒤바꿨다. 종단 안팎에서 의현 총무원장의 비판이 커질수록 개혁세력들에 대한 기대도 커져갔다. 실천승가회는 다시 범종추 출범에 적극 나섰다. 범종추 실무위원회는 3월15일 모임을 갖고 실천승가회, 동국대 석림회, 석림동문회, 중앙승가대 학생회, 전국승가대 학인연합 등이 중심이 돼 3월23일 중앙승가대에서 범종추 창립법회를 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선우도량과 중앙승가대 동문회는 내부논의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참가를 유보했다. 사실상 반쪽짜리 범종추 출범과 마찬가지였다.

당시 선우도량 대표 도법 스님은 “종단 내부에서 선우도량에 대한 대중적 신뢰가 높았다. 그것 때문에 자꾸 우리를 중심에 세우려고 했다. 종단이 잘되게 해야 한다는 데는 동의하지만 선우도량이 전면에 나설 수는 없었다”고 회고했다.

이처럼 범종추 출범이 난항을 겪자 중앙승가대 학생회가 먼저 나섰다. 당시 중앙승가대 학인들은 전통강원을 졸업하고 다시 현대적 교육을 받기 위해 입학한 스님들이 주를 이뤘다. 기본적인 불교소양과 사회의식을 갖춘 스님들이었다. 중앙승가대 학생회는 이 시기 학교 내부 문제에 적극 나섰다. 당시 학장 혜성 스님은 의현 총무원장의 최측근으로 각종 비리의혹에 연루돼 있었다. 특히 1993년 10월 혜성 스님이 자신이 관장으로 있던 서울 삼전복지관 인사비리와 공금유용 의혹에 휩싸이자 중앙승가대 학인들은 곧바로 퇴진운동을 벌였다. 그 결과 혜성 스님은 사표를 제출했다. 이런 경험은 중앙승가대 학생회가 종단 개혁의 전면에 나설 수 있는 토대가 됐다. 상무대 비리의혹이 확산되자 중앙승가대 학인 250명은 3월21일 서울지방검찰청을 항의 방문해 철저한 조사를 요구했다. 검찰청장의 면담을 요구하며 청사 진입을 시도했다. 그러나 공권력은 순순히 허락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학인들이 부상을 당했다. 이 소식은 즉각 언론의 긴급 뉴스로 타전됐다. 승가단체 대표들은 중앙승가대로 모였다. 그동안 종단개혁 방식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던 선우도량 도법·현응·수경 스님도 이때 동참했다. 훗날 청화 스님 등 실천승가회 스님들이 “선우도량은 고립된 섬으로 있다가 뒤늦게 필요가치를 인정해 도중에 뛰어들었다”고 비판한 것도 이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범종추 결성에 대한 논의가 다시 시작됐다.

당시 중앙승가대 학생회장 금강 스님은 “범종추 결성 논의에 다시 불을 붙인 건 중앙승가대 학인들이었다. 많은 학인들의 종단개혁 의지가 승가단체 대표들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술회했다.

오랜 논의 끝에 선우도량 도법 스님이 상임공동대표직을 수락했다. 동국대 석림동문회 시현 스님과 실천승가회 청화 스님도 상임공동대표에 동참하면서 범종추는 조직의 틀을 갖췄다. 그러나 범종추의 활동 방향을 두고 또 장시간 논란이 일었다.

도법 스님은 “범종추의 종단 개혁 방향에 대해 나는 크게 3가지를 제안했다. 개혁의 진정성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단식을 해야 하고, 비폭력적 방식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개혁 이후 종권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는 점도 요구했다. 그러나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논의는 3월21일 밤 12시가 다 되어서야 끝났다. 범종추는 단식과 비폭력을 전제로 종단개혁에 착수하기로 뜻을 모았다. 마침내 범종추는 3월23일 스님 500명이 참석한 가운데 중앙승가대에서 공식 출범했다. 이날 범종추는 창립선언문을 통해 “종단개혁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수행자의 본원적 과제이자 어길 수 없는 역사의 명령”이라며 “모든 종단개혁세력을 결집해 개혁의 대도를 열어 나갈 것”이라고 천명했다. 출범과 동시에 범종추는 3월26일부터 무기한 구종법회를 열겠다고 선언했다. 종정 스님을 비롯해 원로, 종회의원 스님을 만나 범종추의 개혁의지를 전달하기로 했다.

이 무렵 종단 원로 스님들의 움직임도 부산했다. 당시 해인사 방장 혜암 스님은 3월23일 원로회의 사무처장 원두 스님에게 종정 서암 스님이 주석하던 문경 봉암사로 몇몇 원로들을 모이도록 했다. 갑작스런 소집이었다. 이날 봉암사에는 서암 종정을 비롯해 원로의원인 혜암, 원담, 응담, 도천 스님이 모였고 원두 스님이 배석했다. 이 시각 도법 스님과 범종추 스님들은 봉암사로 향하고 있었다.

원두 스님은 “혜암 스님이 느닷없이 원로들을 모으고, 때를 맞춰 범종추 스님들이 봉암사로 향한 것은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 어렵다. 나중에 곰곰이 이 일을 되짚어보면 혜암 스님과 범종추는 이미 사전 논의가 있었던 게 틀림없다”고 말했다. 종정 스님과 원로들은 다시 수안보에 있는 한 신도 집으로 급히 회의장소를 변경했다. 결국 원로 스님들과 범종추와의 만남은 무산됐다. 수안보로 장소를 옮긴 원로들은 이날 “중앙종회가 의현 총무원장의 3선을 가결하면 인준을 거부하기”로 뜻을 모았다. 서암 종정과 원로 스님들도 이미 의현 총무원장의 3선에 부정적인 입장을 갖고 있었던 셈이다.

범종추 결성은 1994년 종단개혁의 서막이었다. 범종추는 3월26일 구종법회를 시작으로 의현 총무원장의 퇴진운동을 전개했다. 막다른 길에 몰린 의현 총무원장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3월29일 서울 조계사에서 발생한 ‘폭력사태’는 예견된 일이었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245호 / 2014년 5월 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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