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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구종법회와 3·29폭력사태

종단개혁 의지 결집하자 경찰·폭력배 동원해 탄압

▲ 범종추는 3월26일 구종법회를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종단개혁에 돌입했다. 3월28일 범종추 2차 구종법회에는 학인 스님들의 참가가 부쩍 늘어 조계사 대웅전 앞마당을 가득 메웠다. 실천불교전국승가회 제공

1994년 3월26일 오전 조계종 총무원 청사가 위치한 서울 조계사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범승가종단개혁추진위(범종추)는 이날 의현 총무원장의 3선을 저지하기 위해 구종법회를 열기로 했다. 의현 총무원장도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의현 총무원장은 범종추의 청사 진입을 막기 위해 정문에 두꺼운 철문을 설치했다. 창문마다 쇠창살을 달아 철옹성을 구축했다. 출입구는 건장한 규정부 스님들을 배치해 외부인들의 출입을 엄격히 차단했다.

오후 들어 조계사에 젊은 학인 스님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중앙승가대와 동국대, 전국승가대연합(전승련) 소속 스님 200여명이 대웅전 앞마당에 집결했다. 오후 2시 범종추 대표들이 조계사에 도착하면서 ‘상무대 비리 진상규명과 의현 총무원장 3선 연임 반대 구종법회’의 막이 올랐다. 범종추 스님들은 이날 의현 총무원장과 집행부의 즉각 사퇴를 요구했다. 중앙종회에도 “의현 총무원장의 80억원 수수 사건에 대한 특별조사권 발동”을 촉구했다. 범종추 상임공동대표 청화·시현·도법 스님과 전승련 의장 희문 스님은 조계사 법당에서 무기한 단식정진에 돌입했다. 법회를 마친 스님들은 조계사를 빠져 나와 탑골공원까지 거리행진을 진행했다. ‘상무대 비리 진상규명’ ‘서의현 총무원장 3선연임 반대’ 등을 적은 플래카드를 들고 의현 총무원장의 부도덕성을 알렸다. 범종추는 3월28일 2차 구종법회도 예고했다.

3월26일 조계사서 개혁 서막
승가대 학인 등 200명 동참
범종추 대표들 단식정진 돌입

재가자 등 종단개혁 동참 선언
28일 법회엔 참가자 3배 늘어
종단 내부 여론 급격히 기울어

의현 원장, 29일 폭력배 동원
실패하자 공권력에 도움 요청
경찰, 조계사 진입해 강제해산

1차 구종법회의 파장은 만만치 않았다. 전국 승가대학 학인 스님들이 동요했다. 통도사를 비롯해 해인사, 법주사, 불국사, 직지사, 범어사, 백양사, 송광사 승가대학이 2차 구종법회 동참을 결의했다. 비구니 승가대학인 운문사, 봉녕사, 청암사 학인스님들도 참여의사를 전달해왔다. 재가자들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았다. 이무렵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대불련)와 동국대 불교학생회는 상무대비리 진상규명을 촉구하며 동국대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대불청·대불련·우리는 선우·청년여래회·경불련·청년선재회·보리방송모니터 등 재가단체들도 종단개혁을 위한 연대 움직임을 가속화했다. 3월27일 남지심 ‘우리는 선우’ 공동대표가 조계사에서 범종추 대표들과 단식정진에 동참했다. 종단 내부 여론은 급격히 개혁세력 쪽으로 기울어갔다.
3월28일 오후2시 조계사에서 열린 2차 구종법회는 스님과 신도 등 600여명이 동참했다. 1차 구종법회에 비하면 참가자가 3배가량 늘었다. 이들은 “의현 총무원장 3선 연임 포기”를 촉구했다. “3월30일로 예정된 중앙종회도 저지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동참 대중들은 조계사와 청사 입구에서 철야정진을 시작했다.
 
100여명의 범종추 학인스님들은 총무원 청사 주변을 봉쇄했다. 30일로 예정된 중앙종회를 무산시키기 위해서였다. 종단 원로들도 개혁세력에 힘을 실었다. 통도사 방장 월하 스님은 이날 오후 범종추의 구종법회를 격려하고 “전국의 승려들은 구종법회에 참가하라”고 촉구했다.

의현 총무원장은 다급해졌다. 범종추가 3월26일 첫 구종법회를 열 때만해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일부 세력들의 일시적인 반발로 취급했다. 그러나 전국 승가대학 학인들의 참여가 속속 이어지고, 재가자와 원로까지 범종추에 힘을 실으면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종단 정치의 달인’으로 불리던 그였지만 이번 일은 예기치 못했다. 사면초가에 몰린 의현 총무원장은 승부수를 던졌다. 공권력에 긴급 구조요청을 보냈다.

3월28일 오후 의현 총무원장은 서울 종로경찰서에 공문을 보내 “조계사 경내에서 폭력사태가 예상되니 경찰병력을 동원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경찰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한겨레신문(1994년 4월4일자)에 따르면 종로경찰서는 총무원으로부터 통보가 왔지만 스님들간의 충돌로 판단해 개입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대신 경찰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조계사 주변에 전경 7개 중대 800여명을 배치했다. 공권력 동원이 여의치 않음을 판단한 의현 총무원장은 급기야 무리수를 뒀다. 청부폭력배를 동원하기로 했다. 경찰에는 이를 미리 알렸다. 폭력사태가 발생해도 개입하지 말아줄 것도 요청했다. 이 소식은 3월28일 늦은 밤 범종추 스님들에게도 흘러 들어갔다. 그러나 범종추는 반신반의했다. 경찰이 배치된 상태에서 설마 폭력배가 들어올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 다급해진 의현 총무원장은 3월29일 폭력배를 동원했다. 실천불교전국승가회 제공

당시 범종추 대변인 법안 스님은 “3월28일 밤 10시경 한 스님으로부터 29일 새벽 6시경 깡패가 들어올 수 있으니 준비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처음에는 설마 했는데 연이어 4통의 전화를 받고 ‘진짜구나’라는 감이 왔다. 깡패들이 범종추를 해산하면 종회의원들이 청사에 들어와 3선을 가결시킨다는 시나리오였다”고 회고했다. 범종추는 긴박하게 움직였다. 어떤 경우에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결의도 다졌다. 중앙승가대신문 기자들은 전 과정을 촬영하기로 했다. 일반 언론사에도 이 사실을 알렸다. 3월28일 밤은 그렇게 긴박하게 저물어갔다.

3월29일 새벽 6시 폭력배가 침입하기로 한 시간이 됐지만 잠잠했다. 범종추 스님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6시30분경 갑자기 총무원 청사에 있던 스님들이 소방호스로 물을 뿌리기 시작했다. 약속이나 한 듯 조계사 해탈문 쪽에서 300여명의 괴청년들이 진입했다. 그들은 쇠파이프와 방망이를 휘두르며 스님들을 위협했다. 집단 난투극이 벌어졌다. 그럼에도 조계사 주변을 지키던 경찰은 수수방관했다. 범종추 스님들의 도움 요청도 애써 외면했다. 범종추 스님들은 극렬히 저항했다. 예상치 못했던 범종추 스님들의 반발에 괴청년들은 일단 후퇴했다. 그들은 잠시 뒤 전열을 가다듬고 재진입을 시도했지만 이번에도 범종추 스님들을 당해내지 못하고 줄행랑을 쳤다. 이 과정에서 괴청년들은 결정적인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그들 중 한 명이 무선호출기(삐삐)를 떨어뜨렸다. 이를 주운 법안 스님은 무선호출기에 담긴 전화번호를 추적했다. 그 가운데 종로경찰서 직원의 집 전화번호가 확인됐다. 중앙승가대신문사 편집장 지환 스님이 촬영한 사진에서 당시 총무원에 근무하던 고모 계장의 얼굴도 나타났다. 총무원과 종로경찰서, 폭력배간의 유착 고리가 드러난 셈이다. 조계사 폭력사태 소식은 긴급히 전해졌다. 오전 9시, 36명의 교수불자들이 범종추를 지지하고 나섰다. 신도들도 가세했다. 오후 2시 중앙종회의원 영담·정우 스님이 돌연 기자회견을 열어 ‘의현 총무원장의 3선 반대와 30일 중앙종회 무효’를 선언했다. 범종추는 점점 더 세를 불려나갔다. 의현 총무원장은 폭력배 동원이 무위로 돌아가자 다시 공권력에 매달렸다. 경찰의 해산작전이 시작됐다.

오후 6시30분경 전경 9개 중대 1000명이 조계사 일주문과 해탈문, 산중다원 출입구 등을 통해 진입을 시도했다. 경찰은 범종추 측이 승용차와 쇠파이프, 나무판자 등으로 만든 바리케이드를 철거했다. 30여분 만에 경찰은 청사 입구까지 진입해 범종추 스님들을 연행했다. 범종추 측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범종추에 가세한 재가자들이 쇠파이프와 방망이를 들고 경찰에 맞섰다. 그 사이 범종추 스님 100여명이 청사 오른쪽 입구를 부수고 들어가 3층까지 장악했다. 일부 범종추 스님들은 청사 입구에서 경찰과 대치했다. 이 무렵 청사 입구에서는 범종추 소속 정범 스님과 덕본 스님이 온몸에 기름을 뿌리고 ‘경찰이 진입하면 분신하겠다’고 엄포를 놨다.

정범 스님은 “그 당시 범종추에서 원주 소임을 봤다. 그날도 청계천에 먹을거리를 사러 갔다가 돌아와 보니 스님들이 경찰에게 포위를 당하고 있었다.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분신을 시도했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정범 스님 등의 분신시도로 경찰의 해산 작전은 소강상태를 맞았다. 그러나 정범 스님의 몸에 불이 붙지 않는 것을 확인한 경찰은 다시 진압을 시작했다.

▲ 경찰 진압에 맞서 정범 스님이 온몸에 기름을 붓고 분신을 시도하고 있다. 실천불교전국승가회 제공

이 시각 범종추 기획실장 현응 스님은 분주했다. 어디론가 계속 전화를 걸어 무엇인가를 독촉했다. 당시 현응 스님은 서울 원남동사거리 인근의 고궁호텔에 방을 얻어 기획팀을 가동하고 있었다. 기획팀은 종단개혁에 대한 정당성과 개혁입법, 의현 총무원장의 퇴진 이후 제도개혁안 등을 만드는 곳이었다. 훗날 의현 총무원장 체제가 무너지고 새 집행부가 출범할 때까지 과도집행부를 일컫는 ‘개혁회의’라는 명칭을 만들어 낸 것도 현응 스님의 아이디어였다.

현응 스님은 “3월초부터 의현 총무원장 체제는 무너질 것으로 봤다. 그 이후에 대한 고민을 해야 했다. 그래서 3월 중순부터 범종추와 별도로 종단개혁을 위한 기획팀을 꾸렸다”고 술회했다. 기획팀은 크게 3가지를 준비했다. 의현 총무원장 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한 승려대회 기획, 개혁회의법 기초, 종헌종법개혁안 등이었다. 기획팀에는 박원순 변호사의 도움으로 양영태 등 3명의 변호사가 참여했고, 실무는 선우도량 간사였던 류지호·박재현 등이 맡았다. 현응 스님이 류지호로부터 80페이지에 달하는 종단개혁안을 건네받은 것은 저녁 9시 무렵이었다. 범종추 지도위원 지선 스님에게 기자회견을 열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지선 스님은 회의적이었다. 이 상황에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현응 스님은 “우리는 종권탈취의 목적이 아니라 종단개혁을 위해 나섰다는 것을 알려야 했다. 이대로 경찰에 연행될 경우 폭도로 몰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기자회견을 통해 우리의 주장을 외부에 알릴 수 있었다”고 말했다.

경찰은 진압에 속도를 냈다. 부상자가 속출했다. 해인사에서 올라온 도각 스님은 총무원 4층에서 날아온 돌에 머리를 맞아 큰 부상을 입었다. 경찰의 해산 작전은 30일 아침 8시가 넘어서야 끝이 났다. 이날 구종법회에 참여했던 범종추 스님 400여명이 서울지역 30여개의 경찰서로 연행됐다.

사부대중이 참여한 범종추의 구종법회와 3·29폭력사태는 이렇게 일단락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종단개혁을 향한 사부대중 원력은 꺾이지 않았다. 오히려 범종추를 지지하고 동참하는 사부대중이 늘면서 종단개혁에 대한 목소리는 더욱 커져갔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246호 / 2014년 5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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