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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돌이를 하는 바둑이

기자명 강원희
아기 못낳는 여인들이
100일동안 탑돌이 하면
달덩이같은 아기 낳는다고

개밥바라기별이 뜰 때마다
내게 밥을 주는 미단이를
졸졸 따라다녔을 뿐이야

할머니의 치맛자락을 펼치면 그대로 쪽빛 하늘이 될 것만 같았습니다. 미단이는 할머니의 치마꼬리를 잡고 달인사 를 향해 부지런히 올랐습니다. 달인사는 푸른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달마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우리 미단이, 힘들지? 저 노루목만 지나면 일주문이 보인단다. 조금만 참으렴.”

할머니가 꼬부랑 허리를 잠시 펴면서 말했습니다. 달인사는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인들이 탑돌이를 하면서 100일 동안 소원을 빌면 달덩이 같은 아기를 낳는다고 잔뜩 소문이 난 절이었습니다.

미단이도 그렇게 빌어서 난 아기라고 했습니다. 솔티마을을 도는 각설이도 그렇게 빌어서 난 아기였는데 마을사람들은 빌어서 난 자식이라서 빌어먹는다고 쑤근덕거렸습니다.

할머니는 절 마당에 우뚝 서 있는 오래된 탑을 108번이나 돌면서 정성껏 소원을 빌었습니다. 108번을 도는 것은 사람들의 번뇌가 그 만큼 많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미단이는 사람들이 108번이나 탑을 돌면 탑이 어지러워서 쓰러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할머니의 소원은 며늘아기가 대를 이을 달덩이 같은 아들을 낳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10년 전에도 같은 소원을 빌어 태기가 있는 것만 해도 부처님의 은덕이라고 생각했는데 미단이가 태어났던 것이었습니다.

“내 탓이여, 내가 부처님께 소원을 빌 때 아들을 점지해 주십사 못박지 못한 것이 한스럽구먼. 그래도 첫 딸은 살림 밑천이라는데……”
할머니는 남몰래 가슴을 치면서 아쉬움의 세월을 강처럼 보냈건만 기다리고 기다리던 손자는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는 송구스럽지만 달인사 탑돌이를 하면서 또다시 소원을 빌게 되었습니다.
할머니가 탑돌이를 하는 동안 미단이는 절 지붕이 지은 그늘에 앉아 절을 하는 할머니의 모습을 고요히 지켜보았습니다.

할머니는 탑이 던진 그림자를 밟지 않으려고 빗겨가면서 탑돌이를 했습니다.
미단이는 그토록 간절한 할머니의 소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 때, 누군가 가만히 다가와 미단이 손에 풀각시를 살며시 쥐어주고 갔습니다. 까까머리 동자승이었습니다. 언젠가 절 마당에 가득 흩으러진 꽃잎을 쓸던 바로 그 동자승이었습니다.
미단이는 그때 꽃잎을 밟고 있는 동자승의 깜장 고무신에도, 쓸고 있는 싸리비에도 꽃향기가 묻어나겠구나 생각했었습니다.
동자승의 뒤에는 늘 그림자처럼 까만 고양이가 따라다녔습니다.
동자승은 절 마당에 드리워진 꽃 그림자와 함께 까만 고양이 그림자를 싸리비로 쓸었습니다.

미단이는 바람에 건들거리는 강아지풀만 보아도 파르라니 깎은 까까머리 동자승 생각이 났습니다.
할머니가 편찮으셔서 자리에 눕게 되자 미단이는 할머니 대신 소원을 빌기 위해 달인사에 갔습니다. 미단이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바둑이도 함께 따라나섰습니다.
“바둑아, 따라 오지 마.”
미단이가 돌을 던지며 되돌아가라고 타일렀지만 바둑이는 되돌아갔다가 다시 따라오곤 했습니다.
미단이는 하는 수 없이 바둑이를 데리고 달인사를 향해 갔습니다.
바둑이에게도 남모르게 빌어야 할 소원이 있어서 미단이를 따라가고 싶어하는 것인지도 몰랐습니다.

미단이가 할머니처럼 탑돌이를 할 때, 미담이의 뒤를 따르던 바둑이도 함께 탑돌이를 했습니다. 미단이가 그림자를 밟지 않으려고 빗겨서 가면 바둑이도 따라서 빗겨갔습니다.
그 때, 저 멀리서 먹장구름이 밀려오더니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미단이와 바둑이는 절간 처마 밑에서 소나기를 피했습니다.
처마 끝에 매달린 물고기 모양의 풍경이 빗물이 그리웠는지 바람에 흔들려 맑은 소리를 퉁겨냈습니다.
우산 대신 토란잎을 쓰고 뛰어가던 까까머리 동자승이 지나가다가 미단이를 보았습니다. 동자승을 뒤따르던 까만 고양이도 덩달아 뒤를 돌아다보았습니다.
까까머리 동자승이 걸음을 멈추고 미단이를 소나기가 들이치지 않는 툇마루에 앉혔습니다.

바둑이도 툇마루 밑 마른 자리에 앉아 젖은 털을 핥았습니다.
미단이와 동자승은 툇마루에 나란히 앉아서 처마 밑에 강아지는 빗줄기를 말없이 바라보았습니다.
절 마당에 차곡차곡 쌓여 있던 기와가 빗물에 젖고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기와에 이름을 쓰고 공양을 드리면 다른 세상에 가서도 지붕이 있는 집에서 살게 된다고 했습니다.
동자승 곁에 얌전히 앉아있던 까만 고양이가 바둑이 곁으로 살며시 다가갔습니다.

“아유, 깜짝이야. 절간에 웬 고양이니? 도둑고양이는 아니지?”
“무슨 말을 그렇게 심하게 하니? 난 스님이 키우는 고양이란다. 스님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지.”
“그래서 그림자처럼 깜깜하구나.”
“그래, 그래서 내 이름이 깜깜이란다.”
“깜깜이? 그럼 깜깜한 밤에는 네 모습이 보이지 않겠구나.”
“모습이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크게 다르지 않은 거란다. 우리의 겉모습은 먼지투성이 옷에 지나지 않는 거지. ”
고양이 깜깜이의 말에 바둑이는 고개를 갸우뚱거렸습니다. 언젠가 밖에서 놀다가 흙투성이 강아지가 되어 집에 들어갔을 때 먼지털개로 할머니한테 호되게 야단맞은 기억이 떠올랐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깜깜아, 고양이는 물고기를 먹고 사는데 물고기 구경도 할 수 없는 절간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정말 궁금해.”
“여기서도 물고기는 얼마든지 구경할 수 있단다. 커다란 목어도 있고 풍경 끝에 매달린 물고기도 있지.”
“하지만 그런 물고기들은 그림의 떡일 뿐이잖아. 저 푸른 바다에 가면 네가 좋아하는 물고기는 얼마든지 있을텐데…”
“갯내음이 묻은 바닷바람이 불어올 때면 가끔 바다를 향해 고개를 돌리곤 해. 하지만 내 목에는 보이지 않는 끈과 소리나지 않는 방울이 달려 있단다. 나는 이곳을 떠날 수가 없어. 스님은 죽을 뻔한 나를 거두어 주었지. 아무리 물고기가 가득한 바다가 엎어지면 코 닿을 만큼 가까이 있어도 그 은혜를 저버리고 바다로 갈 순 없어.”
“넌 정말 착한 고양이로구나. 우리 마을 도둑고양이들은 생선을 먹기 위해 떼를 지어서 바닷가 포구로 몰려다닌단다.”
“참, 나도 너에게 궁금한 게 한 가지 있어. 아까 탑돌이를 하는 네 모습을 보았어. 그런데 네 소원은 뭐니?”

“글쎄……내 소원이 뭔지.... 나도 모르겠어.”
바둑이는 또다시 고개를 갸우뚱거렸습니다.
“소원을 모르겠다고? 그럼 넌 마음 속에 소원도 품지 않고 탑돌이를 했단 말이니?”
“난 다만 개밥바라기별이 뜰 때마다 내게 밥을 주는 미단이가 탑돌이를 하길래 그 뒤를 졸졸 따라 다녔을 뿐이야. 버릇처럼 말이야.”
“난 네가 탑돌이를 하는 모습을 보고 예사로운 강아지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내가 예사로운 고양이가 아니듯이 말이야.”
고양이 깜깜이가 실망한 듯, 슬쩍 자리를 피해 그림자처럼 휙 몸을 날려 저만치 달아났습니다.

비가 그치자 동자승은 미단이를 우물가로 데리고 갔습니다.
우물 속에는 바람의 그물에 걸린 무지개가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동자승이 표주박에 물을 떠서 미단이에게 내밀었습니다.
무지개가 녹아있는 표주박의 물맛은 이가 시리도록 시원했습니다.
“내 이름은 우담이야. 천 년에 한 번 꽃이 핀다는 우담바라 꽃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이지.
사실 나는 동자승이 아니란다. 까까머리니까 모두들 나를 동자승인 줄 알지. 절 마당에 버려진 나를 큰스님이 거두어 키우셨단다. 만일 내가 사내아이였으면 우리 부모도 날 버리지 않았을지 모르지…”
우담 스님이 도마뱀 꼬리처럼 말꼬리를 지우면서 혼잣말처럼 말했습니다.

“그럼 부모님이 참 보고 싶겠구나.”
미담이의 말에 우담 스님이 도리질을 했습니다.
“본 적이 없으니까 보고 싶지도 않아.”
미단이는 우담 스님의 눈꼬리에 맺힌 눈물 속에서 무지개를 보았습니다.
‘우담바라 꽃은 어떤 향기가 나는 꽃일까?’
미단이는 우담 스님을 생각하면서 천년에 한 번 핀다는 우담바라 꽃은 어떤 꽃일지 상상해 보았습니다.
‘내 마음 속에 품어야할 소원은 무엇일까?’
바둑이는 바둑이대로 깜깜이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바둑이는 미단이가 탑돌이를 하러 절에 갈 때마다 먼저 길을 나섰습니다.
100일 기도가 끝나자 바둑이는 새끼를 네 마리나 낳았습니다. 마루 밑에는 바둑이를 닮은 새끼들이 꼬물거리며 젖을 빨았습니다.
어미가 된 바둑이는 그제서야 마음 속에 품었던 소원이 무엇이었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글 그림 강원희



작가소개

강원희 님은 한국외대 영어과를 졸업한 후 홍익대 미술대학원에서 현대미술을 공부했으며, 현재 동화작가 프리랜서로 활동중이다. 계몽문학상, 세종문학상, MBC장편 창작동화대상, 미주 중앙일보 이민 100주년 기념 문학상을 수상했다. 지은 책으로는 『천재화가 이중섭』『훈장을 단 허수아비』『술래와 풍금소리』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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