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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중앙종회, 의현 총무원장 3선 가결

반대 여론 외면하고 추진한 의현 총무원장의 ‘무리수’

▲ 조계종 중앙종회는 3월30일 전날 폭력사태로 몸살을 앓은 서울 조계사 총무원 청사 5층에서 제112회 임시회를 열어 의현 총무원장의 3선을 가결했다. 회의 시작에 앞서 종회의장 종하 스님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종단개혁기념사업추진위 제공

1994년 3월30일 서울 조계종 총무원 청사는 폐허로 변했다. 폭격을 맞은 듯 청사 유리창은 산산조각 부서졌다. 바닥에는 유리파편과 돌들이 나뒹굴었다. 전화와 팩스, 책상 등 사무실 집기류들이 널브러져 전날의 참혹했던 상황을 웅변했다. 범승가종단개혁추진위(범종추) 소속 스님들이 강제 연행된 자리를 경찰이 대신했다. 경찰은 총무원 청사를 빼곡히 둘러싸고 삼엄한 경계태세를 유지했다. 조계사 안팎도 차단해 외부인의 출입을 철저히 봉쇄했다.

의현 총무원장, 3월30일
폭력 얼룩진 총무원청사서
3선 위한 중앙종회 강행

규정부 동원해 반대파 차단
설조·법등스님 이의 제기도
의현 원장 지지자들 ‘묵살’

짜여진 각본대로 종회 진행
단독 출마 사실상 만장일치
“불명예 퇴진 않겠다” 밝혀

개혁세력들 개운사로 집결
재가단체도 ‘종회무효’선언
‘승려대회’ 등 후폭풍 예고

공권력에 힘을 빌린 의현 총무원장은 끝내 3선을 강행했다. 전날 “신임 총무원장 선출은 대중의 공의를 수렴해 공명정대하게 시행하라”는 서암 종정 스님의 교시도 그의 3선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의현 총무원장은 치밀하게 준비했다. 이미 이날 중앙종회를 앞두고 그는 과반 이상의 표를 확보한 상태였다. 뚜렷한 경쟁자도 없었다. 형식적인 절차만을 남겨뒀을 뿐이었다.

주간불교신문(1994년 3월29일자)에 따르면 의현 총무원장은 112회 중앙종회를 앞두고 전체 75명의 종회의원 가운데 55명으로부터 동의를 얻어냈다. 이는 총무원장이 중앙종회의원 선출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한 제도 때문이기도 했다. 당시 중앙종회의원은 간선의원선출위원회에서 27명을 뽑았고, 각 교구본사에서 2명씩을 선출했다. 간선의원선출위원회 위원장은 총무원장이 당연직이었다. 교구별로 선출되는 중앙종회의원도 총무원장이 임명한 본사주지가 겸직했다. 종회의원들 사이에서 ‘선거는 이미 끝났는데 왈가왈부 할 일이 뭐가 있느냐’는 말들이 오갈 정도였다.

오전 10시 경, 종회의원들이 청사에 모습을 드러냈다. 의현 총무원장은 혹시 모를 종회의원들의 반발도 염두에 뒀다. 청사 입구에 규정부 스님들을 배치했다. 3선에 반대할 것으로 예상되는 스님들의 입장을 막기 위해서였다.

이날 종회 참석을 위해 청사에 들어선 종회의원 일면 스님과 법등 스님도 제지를 당했다. 이 무렵 이들은 의현 총무원장의 반대 계파로 분류됐다. 일면 스님과 법등 스님은 초재선 종회의원이 중심이 된 ‘중흥회’ 소속이었다. 이들 외에도 정우·영담·자승·성문·원우 스님이 함께 어울려 ‘7인방’으로 불리기도 했다. 중흥회는 의현 총무원장과 대립각을 세웠던 모임이었다. 112회 종회를 앞두고도 의현 총무원장의 3선에 대한 찬반 논의를 진행했다. 자승·성문 스님을 제외한 5명이 반대 입장을 냈다. 자승 스님은 관악산 연주암을 두고 종상 스님과 갈등을 빚을 당시 의현 총무원장으로부터 도움을 얻은 상태였다.

일면 스님은 “의현 총무원장의 3선 찬반을 두고 중흥회는 수차례 논쟁을 진행했다. 그러나 자승·성문 스님은 유보적인 입장을 표했다. 나머지 5명은 반대 입장을 냈다. 법등 스님과 나는 종회를 무산시키기로 했다. 영담·정우 스님은 범종추에 힘을 보태기로 했다”고 기억했다.

법등 스님은 규정부 스님들과 실랑이 끝에 회의장에 들어갔다. 그러나 일면 스님은 끝내 회의장에 들어서지 못했다.

중앙종회 112회 회의록에 따르면 이날 회의는 청사 5층에서 진행됐다. 중앙종회는 전체 73명(2명 결원) 가운데 58명이 참가했다. 종회의장 종하 스님에 이어 의현 총무원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그는 “종단 개혁은 유구한 법통과 법맥을 승계하면서 실현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의현 총무원장은 목소리를 더욱 높였다. 그는 “청사를 난입해 서류를 불태우고 기물을 파손하는 게 개혁이냐”고 범종추를 쏘아붙였다. 절대 권력자로서의 엄포도 놨다. 의현 총무원장은 “앞으로는 이런 폭력적이고 인신공격과 법통을 무시하는 개혁은 용서치 않겠다”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설조 스님이 안건 상정에 이의를 제기했다. 스님은 “중앙종회 소집 공고에서 의장단이 임의로 총무원장 선출의 건을 채택한 것은 종법에 어긋난다”고 주장했다. 총무원장 자격을 갖추면 누구나 출마할 기회가 있는데 적절한 시간과 기회를 주지 않고 임의로 선출 공고를 낸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즉각 의현 총무원장의 지지파들이 반격에 나섰다. 향운 스님은 “종헌종법에서 (총무원장은) 종회에서 선출하도록 돼 있고, 그에 따라 안건을 공고한 것”이라고 말했다. 총무원장 선출 공고는 하등의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설조 스님은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분을 이기지 못한 설조 스님은 회의장을 퇴장했다.

현해 스님은 전날 영담·정우 스님이 조계사에서 기자회견을 연 것을 문제 삼았다. 스님은 “어제 난동과 폭력을 휘두르는 데 현직 의원 두 분이 선동했다는 말이 있다”며 “현직 종회의원이 그랬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토의안건에 넣어 달라”고 요구했다. 기다렸다는 듯 향운·허현 스님이 동의했다.

안건 조정을 위해 정회가 선언됐다. 종회는 오전 11시경 속개됐다. 의장 종하 스님은 27대 총무원장 선출의 건을 상정했다. 후보 추천을 요구했다. 허현 스님이 의현 총무원장을 추천했다. 향운 스님이 재청했다. 태허 스님은 “종단이 안정되고 수습되기 위해서는 오랜 경험과 경륜을 갖춘 의현 스님을 모셔야 한다”고 거들었다. 예정된 각본대로 순탄하게 흘러갔다. 그러나 법등 스님이 제동을 걸었다. 이때부터 법등 스님은 의현 총무원장의 지지파들에 둘러싸여 외로운 싸움을 시작했다. 법등 스님은 “임기를 5개월이나 앞당겨 왜 이 안건을 상정했는지 이해가 안 된다. 정화 이후 이런 예는 없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관례대로 6월 임시종회에서 다룰 것을 제안했다. 스님은 “총무원장 선출보다 종단 사태를 수습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설득했다.

그러나 의현 총무원장 측 스님들은 요지부동이었다. 명선 스님은 “이 시점에서 원장 스님이 그만 두시면 큰 문제가 생긴다”며 “오히려 원장 스님이 더 맡아 위화정책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향운 스님은 “원장을 선출하는데 어느 시점에 하라는 법이 없다”며 서둘러 진행할 것을 독촉했다. 정대 스님은 “원장이 임기가 지나도 뽑지 않을 것을 우려해 관례상 2~3개월 전에 선출했던 것”이라며 “본인이 재출마할 때는 1년 전에 뽑아도 법률상 아무런 하자가 없다”고 두둔했다.

법등 스님은 물러서지 않았다. 스님은 “회의를 할 때마다 법에 아무런 하자가 없다고 결의했지만 왜 이렇게 많은 문제가 생기는 것이냐”며 “잘못된 것은 바로 잡는 게 종회가 할 일”이라고 호소했다. 삼지 스님은 “그런 이야기는 들어야 할 필요가 없다”며 말꼬리를 잘랐다. 그럼에도 법등 스님은 발언을 이어갔다. 스님은 “종회의원의 양심과 (종단의) 미래를 위해 후회 없는 일을 해야 한다. 5개월이나 앞당겨 할 이유도 없고, 종도들에게 알리지도 않았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의현 총무원장 측 스님들의 반응은 더 냉랭했다.

봉주 스님은 “지금 말장난 하는 자리가 아니다”며 서둘러 진행할 것을 요구했다. 종하 스님은 “의현 스님이 단독 후보로 추천됐다”고 선언하고 표결 방식을 물었다. 향운 스님은 “단독 추천이니 만장일치로 추대할 것”에 동의를 구했다. 현근 스님은 “만장일치에 앞서 원장 스님이 지난 8년간 어떻게 이끌어 왔고,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소신을 들어야 한다”며 여유를 부렸다. 향운 스님은 “(정견발표 없이) 기립박수로 통과시키자”고 말했다. 영도 스님이 거수로 처리할 것을 요구했다. 성문·삼지 스님도 동의했다.

종하 스님은 거수표결을 시작했다. 그 결과 종하 스님은 “찬성 55표, 기권 1표, 퇴장 1표, 무효 1표로 의현 스님이 27대 총무원장에 당선됐음”을 선포했다.

그러나 불교신문(1994년 4월6일자)과 주간불교신문(1994년 4월5일자), 경향신문(1994년 3월31일자)은 “56명이 표결에 참석해 55명이 찬성, 1명이 기권했다”고 보도했다. 한겨레신문(1994년 3월31일자)은 “58명이 참석해 56명 찬성, 2명이 기권했다”고 보도했다. 혼란한 종단 상황만큼이나 총무원장 선출에 대한 언론보도도 제각각이었다.

어찌됐든 의현 스님은 종단 사상 처음으로 3선 총무원장으로 등극했다. 그는 소회를 밝히는 것으로 소감을 대신했다. 종단을 위해 헌신했음에도 일부 반대파들의 중상모략으로 인해 부도덕한 스님으로 내몰린 것에 대한 서운함을 드러냈다. 자신을 둘러싼 상무대 비리의혹 사건에 대해서도 결백함을 호소했다. ‘달변’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그는 준비된 원고 없이 10여 분간 담아뒀던 말보따리를 풀어냈다.

결코 불명예스럽게 퇴진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도 내비췄다. 의현 총무원장은 “오늘이라도 사퇴하고 싶지만, 이대로 나가면 종단에 부담이 가중된다”며 “종단을 수습하고 시간과 날짜에 구애받지 않고 퇴진할 수 있도록 기회를 달라”고 호소했다.

중앙종회의 3선 가결은 의현 총무원장에게 새로운 자신감을 심어줬다.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의현 총무원장의 3선은 거센 후폭풍을 예고했다. 종회의원 영담·정우·설조·월탄·현호·설정·원우·지하·중원·일면·정휴 스님은 기자회견을 열어 “의현 총무원장 3선 무효”를 주장했다. 중앙종회 불참도 선언했다.

설조·설정·정우·지하 스님은 범종추의 단식에 동참했다. 재가단체도 가세했다. 전국대학생불교연합회(대불련)와 동국대 불교학생회는 동국대에서 규탄집회를 열었다. 경제정의실천불교시민연합(경불련)은 종회 무효를 선언하고 조계사 공권력 투입과 관련해 최형우 내무부 장관의 사과를 요구했다.

이 시각 경찰에 연행됐던 범종추 스님들이 풀려나 개운사로 속속 모여들었다. 범종추 지도부도 사무실을 개운사 중앙승가대 지하 1층으로 이전했다. 홍보와 기획 등 조직을 꾸리고 의현 총무원장 퇴진을 위한 전열을 재정비했다. 이들은 4월6일 종단개혁을 위한 ‘범불교도 대회’와 10일 ‘승려대회’를 예고하면서 의현 총무원장의 숨통을 옥죄어 갔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247호 / 2014년 6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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