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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남산율종 도선이 자인에게

“아침저녁 너를 생각하건만 제자여 너는 나를 잊었는가”

“요즘 말법 중생은 마음이 엷어서 은혜와 절의(節義)를 쉬이 배반하고, 쉽게 은사를 싫어해 홀로 지내고 노는 것을 좋아하는구나. 정에 이끌려 법에 어긋나니 네가 악도에 떨어질까 염려된다. 어찌할 수 없어 네가 늘 가까이 해야 할 경계의 글을 지어 안부를 대신한다. 잊지 말지니, 바로 너의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이 오히려 천 마디의 좋은 말을 초월하는 것이니라.”

 ▲ 일러스트=강병호 화백

칠순을 넘긴 도선(道宣, 596~667)은 제자 자인(慈忍)을 떠올릴 때면 가슴 밑바닥에 슬픔이 흥건히 고였다. 도선은 자인이 자신의 곁에 머물며 계율부터 익히기를 원했다. 부처님도 수행의 근본은 계율을 지키는 청정한 생활에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도선은 번뇌란 계에 의해 청정해지고 계가 온몸에 배어야 선정도 깊어질 수 있음을 잘 알았다.

그러나 자인은 스승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달마에서 혜가로 이어지면서 불기 시작한 거센 선의 열풍은 젊은 승려들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불문에 든지 오래지 않은 자인도 그 중의 하나였다. 도선은 끝내 태산 영암사로 떠나버린 제자가 안타까웠다. 영특했던 자인에게 걸었던 기대만큼 서운함이 적지 않았다. 도선은 아침저녁으로 자인을 생각했고 행여 다시 돌아올까 싶어 산문 밖을 서성였다. 허나 몇 달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도선은 세태가 그러려니 하면서 애써 마음을 달랬다. 동시에 그 옛날 스승 혜군(慧頵, 564~637)은 자신이 떠났을 때 심정이 어땠을까 싶었다. 도선은 깊은 상념에 젖어들었다.

도선이 혜군과 인연이 닿은 것은 부친의 영향이었다. 사부상서(史部尙書)라는 고위관리를 지낸 부친은 유독 혜군과 친분이 두터웠다. 그 덕에 도선은 그의 법문을 듣고 대화도 자주 나눌 수 있었다. 도선의 눈에 비친 혜군은 천성이 화통하고 간소했다. 불경은 물론 외전에도 박학다식했다. 그 중 반야사상에 조예가 깊어 ‘중론’ ‘백론’ ‘반야론’에 대해 강의할 때면 어린 그이지만 그 명료함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도선은 혜군을 보며 평생 출가자의 길을 걸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뜻을 처음 내비췄을 때 도선의 부모는 드디어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그를 갖기 전 도선의 어머니는 꿈에 달이 품안에 들고 서역의 승려가 나타나 뱃속의 아이는 양나라 승우율사의 후신임을 계시했던 터였다.

도선은 15살 때 일엄사(日嚴寺)에서 혜군을 은사로 출가했다. 그는 그곳에서 밤잠을 줄여가며 부지런히 경전을 익혔다. 혜군은 도선이 20살 되던 해 그를 장안 흥복사 지수(智首, 567~635)에게 보냈다. 율사였던 그에게 구족계를 받으라는 이유에서였다. 허나 속내는 따로 있었다. 혜군은 총명하고 행동이 반듯했던 도선이 정말 율사 승우의 후신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인물을 무작정 경전 공부만 하라고 붙드는 건 제자의 숨은 재능을 꺾는 일이라 여겼다. 혜군은 언젠가 도선이 율사로서 큰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도선은 스승의 뜻에 따라 지수에게로 향했다. 지수는 ‘오부구분초(五部區分鈔)’ 21권을 찬술한 당대 율학의 거장이었다. 그의 반듯한 계행에 제후들은 물론 황제도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신이한 일들도 종종 일어났다. 그가 매월 그믐과 보름에 계를 설할 때마다 법당 안에 아름다운 향기와 광채가 일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지수는 혜군의 소개로 왔다는 도선이 뛰어난 재능을 갖췄음을 한 눈에 알아봤다. 구족계를 받은 도선도 지수의 언행이 부처님 가르침에서 한 치도 어긋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도선이 지수처럼 율사의 길을 걷겠다는 마음은 없었다. 오히려 먼 훗날 자신의 제자 자인이 그랬듯 도선은 선에 관심이 많았다. 그것이 자신의 천성이라 확신했다.

일엄사로 돌아온 도선은 혜군에게 이제 선정수행을 하고 싶다고 털어놓았다. 도선은 스승이 반대하지 않을 거라 내심 생각했다. 스승이 정통한 반야사상은 계율보다 선에 가깝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잠시 후 도선은 자신의 예상이 크게 빗나갔음을 알았다. 혜군은 정색하며 말했다. “계행이 청정하면 선정은 스스로 맑아진다. 마땅히 계학을 먼저 이룬 후에 선을 닦음이 옳으니라.” 혜군은 도선에게 선수행은 나중에 할 수 있으니 일단 자신의 말대로 10년 간 계율 공부부터 하라고 당부했다.

도선은 선뜻 내키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부모는 7생의 인연이지만 스승은 누겁(累劫)의 인연이라 하지 않았던가. 사제지간의 의(義)와 지중한 은혜를 저버릴 수 없었다. 도선은 스승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고 얼마 후 지수가 있는 흥복사로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그곳에서 도선은 지수의 계율 강의들을 경청했다. 그렇게 한해 두해 듣다보니 계율에 대한 자신의 견해가 대롱이로 하늘을 보듯 관견(管見)에 불과했음을 알 수 있었다. 계율은 선정에 이르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다. 계율을 지켜나가는 과정에 선정이 있고 지혜가 완성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게다가 승단이 계율을 외면하면 세속화를 초래할 뿐 아니라 대중의 신뢰를 잃게 되리라 확신했다. 권력층과 밀접한 관계도 바람직해 보이지 않았다. 승단이 권력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부패는 시작되고 불교에 대한 사람들의 원성도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북위(北魏) 태무제나 무주(北周) 무제가 일으킨 혹독한 폐불정책이 언제든지 재현될 수 있음을 도선은 절감했다. 계율은 승단이 존속할 수 있는 유일한 생명줄이었던 것이다.

당나라 남산율종 도선율사가
멀리 떠난 제자에게 보낸 글
올곧은 출가자로 살 것 당부

정에 이끌리면 악도에 떨어져
계율이 모든 수행 관문 강조
자비관·연기관·수식관도 권유

도선의 변화된 계율관은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그는 계율을 정립하는데 일생을 걸겠다고 다짐했다. 그런 도선 앞에 해결할 과제는 산처럼 쌓여 있었다. 율을 소승이라 폄하하는 풍조도 큰 걸림돌의 하나였다. 도선은 해결 방안을 찾기 위해 촌음을 아껴가며 계율을 연구했다. 율사 지수도 하루가 다르게 계율의 이해가 깊어지는 도선을 보면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도선은 지수의 권유로 계율 강의를 맡았다. 새로운 계율해설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도 그 무렵이다.

도선은 여러 율장 중에서도 ‘사분율(四分律)’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당시 ‘십송율’과 ‘마하승기율’이 크게 성행했지만 중국이라는 토양에 뿌리내리지는 못했다고 판단했다. 중국불교 전체가 대승으로 정착하고 있음을 파악한 도선은 ‘사분율’이 대승에 부합함을 이론적으로 증명하려 했다. ‘사분율’이 행위의 결과보다 동기를 중시하고 있음에 주목했다. 이 땅의 승려들이 ‘사분율’을 외부적인 강제 없이 따를 수 있는 대승의 계율로 인식한다면 보다 적극적으로 계율을 지키리라 본 것이다. 도선은 이러한 독특한 계율관을 정리해 ‘사분율행사초’라는 저술로 펴냈다. 그의 나이 32살 때였다. 이 책은 젊은 도선을 일약 계율의 대가로 알려지도록 했다. 훗날 남산율종을 완성하고 계율중흥의 지대한 역할을 담당했던 율사로서의 첫 걸음이기도 했다.

계율서 집필을 끝낸 도선은 스승이 있는 절로 돌아왔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일엄사는 문을 닫아야할 처지에 놓였다. 수대 왕조의 자취가 많이 남아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도선은 스승을 모시고 숭의사(崇義寺)로 옮겼다. 도선은 그곳에서 부패한 승려들의 실상을 볼 수 있었다. 승려들이 고리대금업과 축산업에 종사하는가 하면 백성들의 토지를 빼앗아 대지주로서 횡포를 자행하는 일도 있었다. 도선은 출가자들의 사표를 제시할 필요가 있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래야 승려들이 올곧게 설 수 있으리라 믿었다. 대중들에게도 진리와 중생구제를 위해 치열하게 한 생을 살아갔던 승려들이 많았음을 전해주고 싶었다.

도선은 양나라 혜교(慧皎, 497~554)가 쓴 ‘고승전’을 떠올렸다. 이 책은 67년부터 519년까지 453년 동안 있었던 257명의 고승에 대한 전기를 담고 있었다. 그러나 도선이 보기에 빠진 인물이 많았고 체계에 대한 보완도 시급했다. 그는 구체적인 자료를 수집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도선은 혜군에게 자신의 뜻을 밝혔다. 늙은 스승은 제자의 뜻을 이해했지만 선뜻 승낙하기 어려웠다. 지금 떠나면 다시는 이생에서 제자를 만날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도선은 눈물을 글썽이는 스승에게 오래지 않아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그는 전국 각지를 돌며 옛 고승들의 자료를 수집했다. 옛 고승들에 대한 새로운 내용을 확보할 때면 뛸 듯이 기뻤다. 반대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인물이었음에도 자취조차 찾기 쉽지 않을 때는 한없이 안타까웠다.

처음 몇 년이면 충분하리라 여겼지만 그렇게 10여년이 훌쩍 지나갔다. 637년, 도선의 만행(萬行)이 10년째 이르던 해, 이제 스승이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가도 될 만큼 자료를 모았을 때 도선은 비보를 전해 들어야 했다. 스승이 얼마 전 돌아가셨다는 내용이었다. 도선은 통한의 눈물을 쏟아냈다. 하루하루 자신을 기다렸을 늙은 스승을 떠올리니 가슴이 미어졌다.

도선은 지중한 스승의 은혜를 갚는 길은 자신의 생애를 던져 불교가 바로 설 수 있도록 일조하는 길이라 믿었다. 그는 ‘사분율계본소’ ‘사분율비구니초’ ‘사분율갈마소’ ‘석가방지’ ‘석문장복의’ ‘속고승전’ ‘대당내전록’ ‘광홍명집’ 등 18부 110여권을 저술하는 놀라운 활동을 이어갔다.

17년간의 구법순례를 마치고 돌아온 현장(602?~664)도 도선에게 지극한 존경을 표했다. 그에게서 자신에 못지않은 불굴의 의지와 열정을 보았기 때문이다. 현장은 도선에게 서명사(西明寺) 주지를 맡기며 한역된 경전을 감수해 줄 것을 요청했다. 경·율·론 삼장에 대한 깊은 이해와 방대한 인문지식을 갖춘 도선이 감수의 최고 적임자로 판단했던 까닭이다.

도선은 현장의 요청을 받아들여 역경사업에 참여했다. 그는 현장이 자신보다 6살이 적었지만 진심으로 존경했다. ‘속고승전’을 편찬하면서 수많은 불문(佛門)의 천재들과 마주할 수 있었지만 현장 같이 뛰어난 이는 처음이었다. 그는 세상 그 누구보다 지혜로웠으며 진리를 위해 털끝만큼도 몸을 돌아보지 않았다. 도선은 때때로 현장과 동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다. 664년 2월, 현장이 세상을 떠났을 때 도선은 비통함을 감출 수 없었다. 아직 번역해야 할 경전들이 숱하게 남았는데 누가 현장을 대신할 수 있을까. 도선은 현장의 추천으로 맡게 된 서명사 주지를 내려놓고 종남산 정업사(淨業寺)로 향했다. 도선의 나이 68살 때였다.

도선은 그곳에서 집필에 몰두했다. ‘속고승전’에 현장의 일대기와 업적을 포함시키는 작업을 비롯해 마무리 지어야할 계율 해설서도 여럿 있었다. 무엇보다 도선은 죽기 전에 수계의식과 계를 설할 수 있는 계단(戒壇)을 세워야겠다고 다짐하고는 했다.

하지만 나이 탓일까.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에도 도선은 오래 전 입적한 스승을 떠올리는 횟수가 잦아졌다. 동시에 제자들에 대한 애정도 더욱 각별해졌다. 도선은 태산 영암사에서 수행하는 자인이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그가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자인에게 ‘정심계관법(淨心戒觀法)’이라는 장문의 수행편지를 쓴 것도 이 때문이다.

도선은 자인과 마주 앉아 가르치듯 하나하나 간절히 일러나갔다. 마음을 청정히 하는 ‘정심(淨心)’이 바로 신심과 발심의 근원이자 수행의 장애물을 제거할 수 있는 근원적인 힘이라고 했다. 재물과 음욕을 다스릴 수 있다면 온갖 분쟁과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도 가르쳤다.

또 문자가 궁극적으로 공(空)임을 관하더라도 경전을 폭넓게 섭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널리 선지식의 가르침을 구함으로써 지혜를 완성할 수 있다는 것, 늘 공경하는 마음으로 사람을 대해야 할 것, 탐욕·분노·어리석음의 삼독을 끊은 자리가 곧 열반이라는 것, 선한 일을 행해 공덕을 쌓을 것 등에 대해 상세히 얘기했다.

“출가자로서 확고한 신심과 교리에 대한 깊은 지식이 없으면 세간 사람들로부터 경시를 받고 그들의 신심을 떨어뜨리게 된다. 불법이 쇠퇴하는 것도 모두 여기에서 비롯된다. 타락한 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워 만대(萬代)에 떨치기 위해서는 출가자 모두가 투철한 신심과 사명감을 가져야만 한다.”

도선은 자인에게 계율이야말로 불법에 들어가는 첫 관문이란 점을 거듭 일러주었다. 마음을 다스리고 청정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길을 고구정녕하게 설명했다. 계율을 지키는 데에만 머물지 말고 부정관, 자비관, 연기관, 계분별관, 수식관을 행할 것도 적극 권유했다. 특히 글의 말미에서 도선은 지극히 인간적인 심경을 드러냈다.

“아침저녁으로 나는 너를 생각하는데 너는 나를 생각하느냐.… 내가 몹시 아프고 쇠약해져 잠자리조차 편치 못하니 만일 이 글을 받은 이후로 나를 못 만난다면 이 글이 너에게 유촉하는 글이 될 것이다.”

도선은 이 글을 쓴 지 몇 해 뒤인 667년, 정업사에 그토록 염원하던 계단을 세우고 이를 설명한 ‘관중창립계단도경(關中創立戒壇圖經)’을 마지막으로 불법을 위해 살았던 긴 생애를 마무리했다. 세수 72, 법랍 52세였다.

도선의 ‘정심계관법’을 읽은 자인이 훗날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가 스승 도선의 기대에 부응했는지도 확인할 수 없다. 그렇지만 도선이 자인에게 보낸 이 글은 지난 1400여년 가까이 수많은 출가자들에게 감동을 주고 나침반 역할을 했음은 분명하다. ‘정심계관법’은 1997년 지운 스님의 번역으로 ‘스승이 제자에게 보내는 글’(도서출판 토방)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1247호 / 2014년 6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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