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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생각의 감옥

기자명 혜국 스님

“눈앞 현실도 생각이 만든 환영…집착하면 벗어나지 못해”

▲ 수처작주의 도량 임제사 대웅전.

“방지자연(放之自然)이니 체무거주(體無去住)라, 놓아버리면 자연히 본래로 되어 본체는 가거나 머무름이 없도다.”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자연(自然)이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자연(自然)이라고 이름 지은 ‘자연’은 이미 자연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연만이 아니고 일체 이름 있는 모든 것은 인간들의 생각으로 포장한 명사(名詞)일뿐입니다. 나무 한그루만 보더라도 참나무니, 소나무니 자신들 스스로 이름을 가지고 온 것도 아니고 나무들이 인간들에게 작명을 부탁한 일도 없이 사람들 임의대로 그렇게 이름 지어 놓은 것입니다. 나무 입장에서는 소나무나 참나무라고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나무만이 아닙니다. 부처니, 중생(衆生)이니, 공(空)이니, 중도(中道)니 이 모두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고 한 겁니다. 조사 스님들의 자비가 이와 같고 이와 같습니다. 오직 법을 소중히 아는 스승만이 해줄 수 있는 가르침인데도 사람들은 그러한 고마움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오히려 자기 생각의 세계로 도(道)를 끌어내리는 바람에 표현이 과격하다느니, 거칠다고 하는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면 진리(眞理)는 일체 이름이 끊긴 자리니까요. 이름 즉, 명상(名相)을 끊어주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 명상을 끊어주기 위해 큰 자비에서 나온 조사 스님 의 말씀이거든요. 수행하는 이들이 자기생각에 속지 말고 도(道)를 향하여 부지런히 정진하여 도에 도달해야 하는데 부지런히 걷지는 않고 가만히 앉아서 도를 자기 생각의 차원으로 끌어 내리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격하다고 생각되는 겁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 스스로 이름 붙여 놓고 그 이름에 얽매여서 모든 것을 판단하고 있는 겁니다. 조용히 생각해보면 이 세상 그 어느 것 하나 생각의 감옥 아닌 게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업(業)을 만들었는데 업이 오히려 주인이 되어 나를 끌고 다닌다고 하는 겁니다. 내 생각에 내가 속는 것이지요. 요즘 학생들이 가상의 세계인 게임에 중독되어간다고 모두들 걱정하고 있는데 게임만 가상의 세계가 아닙니다. 우리가 눈앞에 보고 있는 현실도 생각이 만들어낸 가상의 세계라는 걸 얼마나 믿을 수 있을는지요? 그렇게 볼 때 생각의 세계를 환영이라고, 가상의 세계라고 깨우쳐 주신 부처님이나 스승들을 생각하노라면 옛말이 생각납니다.

중생이란 내가 부처인데도
진리 알지 못하면서 이 몸
‘나’라고 생각하는 잘못 

내 감정 마음대로 안돼서 
억울한데도 당연하게 여겨
그래서 ‘중생’이라고 불러

중생에게 생각의 세계를
환영이라 일러준 스승들
정말 외롭고 안타까웠을 것 

“십년 앞을 내다보면 십년동안 외로울 수밖에 없고, 백년 앞을 내다보면 백년동안 홀로 일수밖에 없다.”
스승들은 참 외로웠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거듭 사족을 붙이자면 자연(自然)이란 자연이라고 하는 내가 없는 자리, 이름이 붙기 이전 소식입니다. 그러니 자연이란 생명이 존재하는데 필요한 만큼은 결코 모자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 몸이니까요. 먹고 사는데 모자란 이유는 인간들의 욕망 때문에 모자라게 되는 겁니다. 이 이치를 알면 참 좋을텐데요, 일체를 놓아버리고 일체 명상(名相)이 끊어지니 자연 그대로 대도(大道)인 겁니다. 여여(如如)한 대도를 허공성(虛空性)으로 비교하자면 허공성은 오거나 가거나 머무름이 없습니다. 우리가 인도를 가거나 미국을 가거나 그 어디를 가더라도 사람이 가는 것이지 허공이 간일이 없듯이 머무름이 있어야 가는 게 있고 가는 게 있어야 머무름이 있지 가고 오는 게 없으면 머무름이 있을 수가 없는 겁니다. 기차를 타고 갈 때 나는 가만히 앉아있는 것 같습니다. 반대로 유리창 너머 풍경이 휙휙 지나가는 것 같거든요. 바로 전도몽상(顚倒夢想)인 겁니다. 그러니 본체는 가거나 머무름이 없다고 하신 삼조 승찬 스님의 신심명은 참으로 우주의 본체를 보여주신 소식이요, 사람들이 언젠가는 깨달아야 할 자연의 본체입니다. 결코 모자람이 없는 자연의 본체를 깨달을 때 서로 상생의 길이 되고 평화의 길이라는 것을 알 때가 와야 할 텐데요.

다음은 “임성합도(任性合道)하야 소요절뇌(逍遙絶惱)”하고 이렇게 이어집니다. 조사 스님 말씀에 “천야만야(千耶萬耶)한 허공 중에 매달려서 두 손을 놓아버리지 않고 어찌 임성합도(任性合道)를 얘기하려는가”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참으로 그렇거든요. 성품(性品)이 하는대로 노닐어도 전혀 도(道)에서 벗어남이 없을 때 바로 성품이 도(道)요, 도(道)가 곧 성품이니 합(合)하고 말고 할 게 없습니다.

“일체 집착심이 멸하고 생각이 끊어지면 자성(自性)이 독로(獨露)라.”

그대로 도(道)와 하나입니다. 번뇌 망상이 모두 사라지니 소요(逍遙) 그대로요, 도(道) 그대로인겁니다. 하기야 그대로 번뇌가 끊어진 곳이라고 해도 이미 그르친 겁니다. 이미 입을 열면 그르쳤다는 말도 추상적으로 들으면 안 됩니다. 소요(逍遙)라고 하면 벌써 소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짚을 이고 불속으로 들어가는 줄 알고 이 글을 쓰는 것이고 듣는 것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허공이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합(合)한다는 말이 맞지 않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허공은 잠잘 때도 늘 같이 있고 걸을 때도 같이 있으며 행주좌와(行住坐臥), 그 어느 때도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상태 아닙니까. 도(道) 역시 늘 같이 있는 허공과 같다고나 할까요. 그럼에도 우리는 허공과 하나 되어 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내 생각, 내 감정에 끄달려서 울고웃고 감정에 끄달려 다니거든요. 그러니 허공은 완전 평등에서 온 삼라만상을 떠안고 있건만 사람들은 자기가 만들어 놓은 불안 속에 힘들어 하고 불평등을 만들어 서로 경쟁을 하고 있는 겁니다. 성성적적(惺惺寂寂) 본마음으로 살아가면 완전한 평화요, 일체가 구족되어 모자람이 없는 삶입니다. 일어나는 감정대로 살아가면 생멸무상법(生滅無常法)이라 항상 모자란 삶이니 일어나는 감정대로 사느냐, 주인공 자연본체로 사느냐는 오로지 각자 자기가 알아서 해야 할 몫입니다.

“계념(繫念)하면 괴진(乖眞)하야 혼침(昏沈)이 불호(不好)니라. 생각에 얽매이면 참됨에 어긋나서 혼침함이 좋지 않느니라.”

사실 혼침 아닌 것은 없습니다. 내가 내 자신을 깨닫지 못한 상태 성성적적이 아니면 모두가 혼침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수행을 잘 관찰해보면 혼침 아니면 산란(散亂)이거든요. 그러나 참 진리에는 어긋남이라는 게 없습니다. 생각에 얽매인 그자체가 어긋난 것 뿐입니다. 생각이 얼마나 간사한지 지난 겨울 한참 추울 때는 여름을 그리워하다가 벌써 금년 초여름 날씨가 좀 덥다 싶으니 이제 겨울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생각이라는 게 그때그때 자기감정과 자기욕망에 따라 움직이는데 우리는 그 간사한 생각을 따라가느라 ‘참자기’를 늘 배신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내가 생각을 일으키는 주체인데 내감정이 내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게 정말 억울한 일인데도 우리는 그게 당연한 것처럼 길들여져 있습니다. 그래서 중생이라고 이름을 하는 겁니다.

중생이란 내가 부처임을 모르고 이 몸을 ‘나’라고 잘못 생각하는 상태를 말함입니다. 이 몸이란 어머니 태안에서 10개월 동안 지수화풍(地水火風) 네 가지 원소를 빌려다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빌려온 기간만큼 사용하다가 빌려온 기간이 끝나면 다시 지수화풍 사대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니 이 사대(四大)가 보고 듣고 걸어다니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고 허공이 보고 듣고 하는 게 아닐진대 과연 이 몸을 운전하고 다니는 나의 주인은 누구인가 연기공성(緣起空性) 제법무아(諸法無我)인 ‘참나’를 바로 보면 부처요, 미(迷)하면 중생입니다. 그래서 허응 보우 선사는 선 과거에서 “본래 청정한데 운하홀생산하대지(云何忽生山河大地)냐?”라는 문제를 제시했던 겁니다.

“본래 성성적적한 주인공, 본래 부처인데 왜 죄가 생겼느냐? 우주는 어떻게 해서 생긴 것이냐?”

그러한 과거 시험문제를 전국에 방을 붙인 겁니다. 시험문제를 몰래 내는 게 아니라 온 전국에 방을 붙였습니다. 그때 내로라하는 스님들이 와서 대답을 했으나 불합격이었습니다. 해가 뉘엿뉘엿 질 때 우리가 알고 있는 서산 대사가 늦게 도착합니다. 꼭 같은 문제를 거량하되 “본래 청정한데 운하홀생산하대지냐?”하니 바로 답하기를“본래 청정고니다”고 합니다. 참으로 멋있는 답이거든요. 그래서 선과거에 급제를 하신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설명을 안 붙이겠습니다.

혼침에 대해서 조금 더 얘기를 하겠습니다. 제가 해인사 선방에서 성철 큰스님 모시고 참선을 할 때 새벽 3시가 되면 성철 큰스님이 가끔 경책을 나옵니다. 경책이라고 하는 것은 참선할 때 앉아서 조는 사람을 때려서 깨우는 것을 경책이라고 합니다. 그 경책하는 모습을 보면 선지식 따라, 스승 따라 다 다릅니다. 구산 방장 스님 같은 분은 주장자로 때로는 큼직한 장군죽비로 사정없이 두들겨 패기도 하고 성철 스님 같은 어른은 물푸레나무 회초리를 3개 정도 들고 와서 그 3개를 한손에 들고 사정없이 등짝을 후려갈깁니다. 한번 맞고 나면 정신이 번쩍 들지만 감정이 상할대로 상하게 됩니다. 그러니 화두 드는데는 집중하지 못하고 성철 스님이 들어오는가 안 들어오는가 그 발자국소리 듣느라고 거기에 온통 신경을 쓰게 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비록 졸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산란이라 혼침과 다를 바 없습니다.

화두일념이 안되고 성철 큰스님께 두들겨 맞지 않을 생각만 하고 있었으니 혼침과 산란은 같은 말이라는 얘기입니다. 번뇌, 망상이 위로 오르면 산란이라고 하고 밑으로 가라앉으면 혼침이라고 하니 성성적적 본래 내 자신을 놓친 세계를 모두 다 혼침이라고 합니다. 그 모든 것이 본래 주인공과 하나가 돼서 사는 게 아니라 생각에 얽매여서 맞지 않으려고, 아니면 잘한다는 말 들으려고 생각에 얽매이니 이미 본체에서 빗나간 겁니다. 참됨에 어긋나게 되는 것이요, 혼침에 속고 있음이라, 그러니 혼침이 좋지 않을 수밖에요. 본래의 참됨에는 어긋나고 어긋나지 않음이 없지만 생각에 얽매였기 때문에 어긋난 것이거든요. 한 생각 일어나면 바로 혼침인 것이니 항상 깨어 있으라고 강조하신 겁니다.


 [1248호 / 2014년 6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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