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9. 당 현장이 즈냐프라바에게

“배는 고해에 침몰했고 천신과 인간은 눈을 잃었구나”

“지난해 사신이 돌아와 정법장(正法藏)께서 입적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스승의 입적 소식에 제 마음이 쪼개지는 것을 억누르려 해도 그럴 수 없었습니다. 아, 배는 고해(苦海)에 침몰했고, 천신과 사람들 모두 눈을 잃은 듯합니다. 어찌 이리도 통한의 슬픔이 빨리 왔단 말입니까.”

653년 여름, 장안 자은사(慈恩寺)에 머물던 현장(玄奘, 602~664)은 어느 때보다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낮이면 여러 유능한 역경승들과 불경을 번역했고, 저녁이면 매일 2시간씩 학승들에게 경론을 강의했다. 자신을 보려는 이들의 발길이 잦은 탓에 밤에도 역경 준비에 몰두해야 했다. 현장은 오랜 구법순례로 지병이 생기고 종종 심한 경련을 일으켰다. 그렇다고 한가하게 쉬고 있을 수는 없었다. 누구나 쉽게 불경을 읽을 수 있도록 하는 역경사업에 중국불교의 미래가 달려있음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난 2년간은 서역에서 가져온 범어 경전과 불상을 모실 탑도 세워야 했다. 경전이 흩어지거나 화재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는 탑이 꼭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현장은 분주한 일과에도 틈틈이 직접 삼태기를 지고 벽돌을 운반했다. 주변에서 극구 말리고 황제까지 걱정했지만 현장은 지극한 정성 없이 ‘법의 보배’를 봉안할 탑이 어찌 오래갈 수 있으랴 싶었다. 그렇게 그의 땀방울로 자은사 대안탑(大雁塔)이 완성된 지 오래지 않아서였다.

현장은 천축에서 보낸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즈냐나프라바(智光, Jnanaprabha)와 프라즈냐데바(慧天, Prajnadeva) 법사가 인편에 편지를 보낸 것이다. 즈냐나프라바는 1만 명의 승려가 불교를 공부하는 날란다사원을 이끄는 대학승으로 대·소승 교학은 물론 바라문 학파의 사상에도 정통했다. 프라즈냐데바도 천축 최대 불교사원인 마하보리사에 주석하는 최고의 논사였다.

이 중 프라즈냐데바와는 유독 인연이 깊었다. 그는 현장과 달리 소승이라 불리는 아비달마 교학의 대가였다. 현장과 자주 논쟁을 벌였던 것도 그 때문이다. 특히 642년 인도의 제왕 하르샤 왕의 주관으로 갠지스 강변에서 열린 무차대회에서 둘은 쟁론을 펼쳤다. 인도 전역에서 내로라하는 고승 6000여명이 참여한 대회였다.

이 때 현장은 대승의 이론을 내세웠고, 프라즈냐데바는 아비달마 관점에서 입론을 펼쳤다. 하지만 그는 현장이 제시한 논증식인 ‘진유식량(眞有識量)’을 끝내 논파하지 못했다. 자신뿐 아니라 그곳에 참여한 어떤 논사도 현장의 논리를 깰 수 없었다. 18일 동안의 무차대회가 끝나고 최고 논사라는 영예와 함께 ‘해탈천(解脫天)’ ‘대승천(大乘天)’ 존칭도 현장에게 넘어갔다. 그럼에도 프라즈냐데바는 이역만리에서 온 현장을 진심으로 존경했다. 비록 중국이라는 변방의 승려였지만 인도 전역을 통틀어도 그의 식견과 통찰을 넘는 이는 없으리라 확신했다. 프라즈냐데바는 그 멀고 험난한 길을 거쳐 고국으로 돌아간 도반에게 편지를 썼다. 자신이 직접 저술한 책도 함께 보냈다.

“한량없이 많은 경율론 삼장의 이치에 정통하신 현장 대덕께 글을 띄웁니다. 몸과 마음 다 평안하신지요. 제가 이번에 ‘불대신변찬송(佛大神變讚頌)’ 등을 지었기에 법장에게 부탁해 보냅니다. 노대덕인 즈냐나프라바 법사께서도 안부를 전하십니다. 필요한 경론 목록을 그에게 보내면 꼭 기록해 법사께 보내드리겠습니다.”

16년간 구법순례 마친 현장
자은사서 불경번역에 매진

천축의 스승 입적 소식 듣고
도반에게 비통한 심정 전달

불법 올바로 세우는 게 보은
죽는 날까지 역경·교화 외길

편지를 받은 현장은 이토록 마음 써주는 프라즈냐데바가 고마웠다. 반가움과 더불어 얼마 전 사신으로부터 스승 실라바드라(戒賢, Silabhadra)가 입적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기에 비통함도 더욱 커졌다.

천축의 대학승 실라바드라. 그가 없었다면 현장의 구법순례는 뜻을 이루기 어려웠다. 수만리 떨어진 옛 도반으로부터 온 편지를 받아든 현장의 슬픔은 하염없이 깊어져갔다.

현장은 602년 낙양에서 대대로 학문을 숭상하던 집안의 4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일찍 출가한 둘째 형 장첩(長捷)의 영향으로 그는 13살에 승가고시에 합격해 불문에 귀의했다. 유독 총명했던 그는 어린 나이에 “출가란 무위법(無爲法)이다. 애들 장난만 하고 있다가는 백년을 허송세월하기 십상이다”라며 인생의 방향을 일찍 정했다. 출가한 그는 마른 논이 단비를 빨아들이듯 수많은 경전을 익혀나갔다. 천재적인 두뇌에다 침식을 잊을 정도로 공부에 매진한 현장은 20대 중반 ‘석문(釋門)의 천리마(千里馬)’라 불릴 정도로 명성이 자자했다.

허나 현장은 경전과 논서를 보면 볼수록 종지(宗旨)가 제멋대로였고 앞뒤가 맞지 않는 곳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 각 종파를 이끄는 고승들이 무비판적으로 자기 종파의 가르침만 따른다는 것도 알았다. 경전에 눈먼 자들이 코끼리의 다른 부분을 만지고 그것을 코끼리의 전체로 간주하는 것과 비슷했다. 현장이 의역으로 인해 온갖 해석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원전을 통해 오류를 바로잡겠다고 원을 세운 것도 그 때부터다. 구법순례를 떠났던 법현(法顯, 337?~422?)과 지엄(智嚴, 350~427)의 영향도 컸다. 현장은 장안에 들어와 있는 서역의 이방인들에게 천축어와 중앙아시아 언어를 배웠다.

만반의 준비를 마친 현장은 천축으로 떠날 수 있게 해달라고 청원서를 올렸다. 그러나 젊은 군주 태종(재위 626~649)은 불교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과 외교적 분쟁으로 승려조차 국경을 넘지 못하게 철저히 통제했다.

▲ 현장은 16년간 무려 1만6000km에 이르는 구법순례를 다녀왔고, 이후 19년간 74부 1335권의 방대한 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해냈다. 그의 번역에 힘입어 불교는 비로소 동아시아에 깊이 뿌리 내리고 화려한 꽃을 피울 수 있었다.

629년 8월, 현장은 국법을 외면하고 서역으로 향했다. 그가 28살 때였다. 현장은 붙잡히지 않기 위해 낮에는 숨고 밤에는 뛰듯이 길을 재촉했다. 혈혈단신으로 사막을 건너는데 오직 쌓여 있는 해골과 말의 분뇨를 이정표 삼아 나가야 했다. 때로는 화살 세례를 받았으며 휘몰아치는 거센 모래바람 속에서 길을 잃고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

한 번은 옥문관에서 40킬로미터 쯤 지나 끝도 없이 펼쳐진 황량한 벌판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목이 말라서 목을 축이려고 말에서 물주머니를 내리는데 실수로 떨어뜨렸다. 현장은 망연자실했다.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왔던 길을 4킬로미터쯤 되돌아갈 때였다. 그는 문득 멈춰 서서 생각했다.

‘나는 처음에 발원할 때 만약 천축에 이르지 못한다면 끝내 한 걸음도 동쪽으로 옮기지 않겠다고 했는데 지금 어째서 되돌아오고 있는가. 차라리 서쪽으로 가다가 죽을지언정 어찌 동쪽으로 되돌아가 살기를 바라겠는가?’

현장법사는 물 한 모금 없이 되돌아서 천축으로 향하는 사막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일주일간 사경을 헤매다가 여러 차례 사막을 오갔던 노련한 말 덕분에 겨우겨우 살아날 수 있었다.

서역 각국의 왕들은 대부분 불법을 받들었기에 구법승이 온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열렬히 환영했다. 젊은 고승 현장은 그들을 위해 법을 설하며 한 걸음 한 걸음 천축을 향해 나아갔다. 그를 떠나보내지 않으려는 고창의 왕을 설득하기 위해 목숨을 건 단식을 해야 했으며, 때로는 각국의 고승들과 열띤 논쟁을 벌였다.

“이 중국의 승려는 섣불리 상대할 사람이 아니다. 아마 인도에 가도 저 젊은이 같은 이는 없으리라.” 논쟁에서 진 승려들은 현장의 학식과 안목에 혀를 내둘렀다.

그는 난주(蘭州)를 거쳐 돈황, 하미, 투르판, 카라샤르, 쿠처 등 실크로드 북로를 경유해 우즈베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등 중앙아시아 지역을 거쳐 카시미르로 향했다. 그 길은 찌는 더위와 살을 에는 강추위, 거친 폭풍우와 잔인한 도적들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현장은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과 같은 신통한 제자 하나 없이 ‘발길을 돌리느니 차라리 길을 가다 죽겠다’는 각오로 온갖 난관을 극복해 갔다.

그렇게 천축에 도착한 현장은 부처님의 발자취가 스며있는 성지를 순례했다. 특히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보드가야 마하보디사원에서 눈물로 절을 올리며 탄식했다.

“부처님께서 성도하시던 순간, 이 몸은 대체 어느 악도(惡道)에 빠져 헤매고 있었는가. 내 죄업이 어찌 이다지도 깊고 무겁단 말인가!”

현장이 구법의 목적지인 날란다사원에 도착한 것은 31살 때인 632년. 장안을 떠난 지 만 3년째 되는 해였다. 당시 날란다는 인도 불교문화의 중심지로 1만 명의 승려들이 공부하고 있었다. 매일 100여곳에서 강좌가 열리고, 과목도 대·소승 경전을 비롯해 베다, 수학, 논리학, 지리학 등 다양했다. 현장은 날란다에 오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에게 실라바드라의 얘기를 전해 들었다. 동인도 마가다국의 바라문 출신으로 불법의 당간을 세웠다는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대소승을 떠나 모든 이들이 존경했으며, 법을 완전히 통달해 정법장(正法藏, dharmakara)으로 불렸다. 무엇보다 현장이 그토록 알고 싶어 했던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의 최고 권위자이기도 했다.

실라바드라를 만난 현장은 극진한 존경의 예를 표했다. 무릎을 꿇고 그의 발에 입 맞춘 후 오체투지의 절을 올렸다.

실라바드라가 물었다.
“어디서 오셨소?”
“중국에서 정법장님께 ‘유가사지론’을 배우고 싶어서 왔습니다.”

그 말에 106세의 노학승인 실라바드라가 눈물을 흘렸다. 그러면서 3년 전 있었던 얘기를 들려주었다. 자신의 병세가 너무 심해 목숨을 버리려 했을 때였다. 어느 날 꿈에 세 분의 보살이 나타나 전생에 왕이었을 때 백성을 고통스럽게 한 과보를 받는 것이라며 목숨을 끊지 못하게 만류했다. 이어 보살들은 중국에서 ‘유가사지론’을 배우러 온 승려를 가르치면 병세가 호전되리라고 예언했다. 실라바드라는 ‘유가사지론’을 가르쳐야할 의무가 있었고, 현장은 이를 꼭 배워야만 할 인연이었던 것이다.

실라바드라는 현장을 위해 ‘유가사지론’을 직접 강의했다. 실라바드라를 괴롭히던 지병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 강의를 들은 현장도 오랜 세월 그를 괴롭혔던 의문들을 말끔히 씻어낼 수 있었다. 현장의 지적 호기심은 끝이 없었다. 그는 ‘유가사지론’ 외에도 ‘순정리론’ ‘현양론’ ‘대법론’ ‘인명론’ ‘성명론’ ‘집량론’ ‘중론’ ‘백론’ ‘구사론’ ‘대비바사론’ 등 강의를 경청했다. 여기에다 범어학, 베다 등 타학파의 철학까지 두루 익혔다. 뛰어난 현자가 있다면 천리가 멀다 않고 찾아가 물었다. 그의 경론에 대한 이해와 안목은 중국은 물론 인도에서도 따라갈 자가 거의 없었다.

현장은 그곳에서 수많은 논사들과 마주했으며, 그들의 논리를 하나하나 꺾어나갔다. 심지어 현장에 도전장을 던진 한 브라만은 논쟁에서 지는 사람이 목을 내놓자는 제의까지 했다. 허나 그도 현장을 이길 수는 없었다. 현장은 그에게 목 대신 자신의 노복이 될 것을 명했다. 그와의 여러 차례 대담을 기초로 현장은 힌두교와 아비달마의 이론을 논박하는 ‘파악견론(破惡見論)’을 집필했다. 이 책을 본 실라바드라는 탁월한 논서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얼마 후 현장이 브라만을 풀어주자 그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그의 지혜와 덕행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현장은 실라바드라에게 이제 중국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날란다 대덕들은 중국이 변경이고 불교를 홀대하니 떠나지 말라고 붙잡았다.

실라바드라는 현장에게 떠나려는 이유를 물었다. 현장이 대답했다.

“이 나라는 부처님이 탄생하신 곳입니다.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단지 제가 여기까지 온 것은 큰 법을 구해 널리 중생을 이롭게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스승님의 ‘유가사지론’ 가르침을 듣고 의구심도 풀렸습니다. 부처님의 성지를 참배하고 다른 종파의 심오한 교리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 저의 바람은 돌아가서 제가 익힌 것을 다른 이들을 위해 번역하고 설명하려 합니다. 그들이 듣고 이해하게 해 스승님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실라바드라는 기쁘게 말했다.

“이는 실로 보살의 마음과 같도다. 내가 바라는 것 역시 그렇다네. 이제 편히 짐을 꾸리게나. 이제 누구도 그에게 천축에 머물라고 강요하지 말라.”

현장은 641년 가을 귀국길에 올랐다. 그것이 일생의 스승 실라바드라와의 마지막임도 잘 알았다. 그 무렵 현장의 명성은 이미 천축 각지에 퍼져있었다. 고창 왕과 사마르칸트의 왕이 그랬듯 인도의 왕들도 현장의 마음을 붙잡으려 애썼다. 큰 세력을 형성했던 아삼왕은 현장이 자신을 보러오지 않으면 이제부터는 불법을 파괴하고 보리수를 잘라내겠다고 협박했다. 천축의 제왕 하르샤도 현장이 자신의 곁에 머물면 100개의 사찰을 지어주겠다고 회유했다.

현장은 귀국하면서 만난 왕들에게 법을 설하고 무차대회에도 참석했다. 천축의 왕과 백성들은 현장의 지혜와 언변에 경탄했다. 세상 누구도 그의 발길을 멈추게 할 수 없음을 깨달은 왕들은 현장의 귀국을 적극 도왔다. 말과 코끼리를 내주고 그가 지나갈 나라의 왕들에게 편의를 봐줄 것을 요청했다.

천축 왕들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돌아오는 길도 고난의 연속이었다. 여러 차례 도적들과 맞닥뜨렸으며 인더스 강을 건널 때는 돌풍으로 인해 50여권의 경전을 잃기도 했다. 수천 미터 높이의 힌두쿠시와 파미르고원을 넘고 타클라마칸과 고비사막을 횡단했다.

645년 2월, 우여곡절 끝에 현장은 경전 520묶음을 20필의 말에 나눠 싣고 장안에 입성했다. 구법순례를 떠난 지 16년만으로 현장이 43살 되던 해였다. 황실과 수많은 백성들은 그의 귀국을 열렬히 환영했다. 처음 구법을 막았던 당태종도 “목숨을 바쳐 법을 구하고 중생을 이롭게 했다”며 현장을 크게 반겼다. 태종은 현장을 불러 그가 다녀온 나라의 군주, 기후, 산물, 풍습에 대해 물었다. 외국에 대한 현장의 해박한 지식에 감동한 태종은 당의 국제관계를 자문해 줄 신료가 돼달라고 부탁했다. 현장은 완곡히 거절했다. 이에 태종은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해 줄 것을 요청했고, 현장은 다음해에 불후의 명저 ‘대당서역기’를 지어 황제에게 올렸다.

▲ 자은사 대안탑. 현장이 인도에서 가져온 경전과 불상을 봉안하기 위해 만든 이 탑은 당시 현장이 직접 삼태기를 지고 벽돌을 운반한 것으로 유명하다.

태종은 현장의 역경사업을 적극 지원했다. 그러면서도 현장을 만날 때면 은근히 환속할 것을 권유하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현장은 자신이 꼭 해야 할 일이 역경이고 이로써 국은(國恩)에 보답하겠다는 약속을 되풀이했다.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하러 떠날 때도 현장에게 함께 갈 것을 요청했다. 이에 현장은 자신이 전투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며, 율(律)에 승려는 군대의 전투를 봐서도 안 된다는 이유로 단호히 거절했다.

처음 도교를 크게 숭상했던 태종은 현장을 자주 만나면서 점점 바뀌어갔다. 전국 각지에 있는 절마다 도첩을 내려 승단을 크게 확장토록 했다. 현장이 심혈을 기울여 번역한 ‘유가사지론’ 100권을 읽어본 태종은 이렇게 말했다.

“짐이 불경을 보건대 하늘을 쳐다보고 바다를 바라보는 것 같아 높이와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구려. 유가나 도가는 이에 비하면 작은 연못에 불과하오. 그런데도 세상에서는 삼교(三敎)의 뜻이 일치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망령된 말이로다.”

649년 무리한 고구려 원정으로 건강이 악화된 태종은 현장을 자주 초청했다. 현장은 황제의 쓸쓸함과 죽음에 대한 깊은 두려움을 알았다. 그는 황제에게 인연법이나 인과응보와 관련된 설화에서부터 심오한 불교사상까지 알기 쉽게 들려주었다. 감동을 받은 태종은 현장에게 “짐은 법사와의 만남이 늦었기에 널리 불사(佛事)를 일으키지 못했구려”라는 말을 남기고 얼마 뒤 세상을 떠났다.

태종의 뒤를 이은 고종도 현장을 지극히 존경했다. 역경사업에 대한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현장은 촌음을 아껴가며 불경을 번역하고 학승들에게 경론을 지도했다. 그것이 곧 자신이 목숨을 걸고 구법을 떠났던 이유이자 자신을 위해 아낌없이 법을 설해준 고령의 스승에 대한 보은이라 여겼다.

그 때 천축에서 온 사신으로부터 스승 실라바드라의 입적 소식을 전해들은 것이다. 현장은 자신을 잊지 않고 도움을 주려는 천축의 두 법사에게 깊이 감사했다. 현장은 실라바드라의 뒤를 이어 날란다사원을 이끄는 즈냐나프라바에게 자신의 심정을 털어놓았다.

“저 현장은 예전에 구법여행을 떠났기에 그분을 뵙고 가르침을 이어받는 즐거움을 누렸습니다. 정법장께서 주신 연꽃 줄기와도 같은 가르침은 어리석은 제게 마치 쑥이 곧게 자라도록 의지가 돼주는 마(麻)와 같았습니다. 제가 본국으로 돌아가고자 인사드렸을 때 하셨던 말씀이 아직도 은은히 제 귀에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만고(萬古)로 돌아가셨다는 말입니까? 참으로 비통함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현장은 애써 슬픔을 억누르며 스승이 입적하셨으니 이제 즈냐나프라바께서 청담탁설(淸談卓說)이 사해에 항상 흘러 퍼질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현장은 프라즈냐데바에게도 편지를 썼다. 인더스 강을 건널 때 잃어버린 경전들을 보내주면 고맙겠다는 점과 아비달마에 머무르지 말고 대승으로 나아갈 것을 당부했다.

현장은 역경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고, 세월은 무심히 흘러갔다. 마지막 원을 세워 착수한 ‘대반야경’ 600권이 완성되면서 현장의 기운이 급격히 쇠락했다. 황제가 어의와 귀한 약재를 보내왔지만 그의 지치고 병든 몸을 낫게 할 수는 없었다.

663년 10월, 죽음이 멀지 않았음을 직감한 현장은 제자들에게 유언을 남겼다.

“이제 경전과 관련된 일은 끝났고, 나의 생애 역시 다했네. 내 목숨이 다하면 자네들은 나를 검소하게 보내주게. 나를 들풀로 두르고, 한적한 산을 골라 안치해 주게나.”

현장은 옥화사에 머물며 수행에만 전념했다. 664년 2월5일, ‘반야심경’을 독송한 현장은 미륵부처님께 “제가 목숨을 버리고 나면 반드시 미륵부처님 회상에 태어나게 해주옵소서”라는 기도를 마지막으로 이승의 인연을 접었다.

현장의 입적 소식을 전해들은 고종은 “짐은 나라의 보배를 잃었다”며 통곡했다. 또 “망망한 고해에서 갑자기 배가 가라앉고 어두운 방이 아직 밝기 전에 횃불이 꺼져버렸다”며 성대한 장례를 치르라고 명했다. 비통한 것은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절을 에워싸고 장례가 끝나도록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백만 명의 울부짖음 속에 떠나는 장례행렬은 대단히 화려했다. 그러나 현장의 유언은 황제와 제자들도 어쩔 수 없어 시신만은 거적으로 만든 상여에 안치된 상태였다.

현장은 16년간 무려 1만6000km에 이르는 구법순례를 다녀왔고, 이후 19년간 74부 1335권의 방대한 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해냈다. 그의 번역에 힘입어 불교는 비로소 동아시아에 깊이 뿌리 내리고 화려한 꽃을 피울 수 있었다. 138개 국가의 지리, 역사, 문화, 종교, 풍속, 설화, 정치, 경제 등을 기록한 ‘대당서역기’는 지금도 실크로드를 이해하는 최고의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당대 최고의 학승, 여행가, 논사, 역경승이었던 현장, 2000년 중국불교사에서 이토록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 또 있을까. 현장과 인도의 고승들이 주고받은 편지는 현장의 제자가 기록한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에 전한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1249호 / 2014년 6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 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