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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범종추 재결집과 원로들의 움직임

여론 힘입은 개혁세력, 원로 앞세워 승려대회 추진

▲ 범종추는 4월2일 중앙승가대 정진관에서 ‘불교개혁 기원 및 종교탄압규탄대회’를 열어 종단개혁에 대한 의지를 재천명했다. 규탄대회에서는 3월29일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부상을 입은 스님들도 참여했다. 종단개혁기념사업추진위 제공

“오늘날 한국불교의 모습은 너무나 남루합니다. 왜 자부와 긍지로 살아야 할 출가수행자들이 수치와 수모를 감수하며 지내야 하는지 답답합니다. 종단 상황이 절박한데 원로 중진스님들께서 끝까지 침묵하고 방관한다면 우리는 가슴 깊이 존경하고 따를 수 없습니다. 종단개혁에 적극 나서줄 것을 거듭 호소합니다.”(도법 스님이 1994년 3월30일 밤 경찰에 연행됐다 풀려난 직후 중앙승가대 정진관에서 쓴 글, 선우도량 6호)

1994년 3월31일 서울 안암동 중앙승가대 정진관에 스님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서울 조계사구종법회에 참여했다 경찰에 연행됐던 범승가종단개혁추진위(범종추) 소속의 스님들이었다. 밤샘 조사를 받고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종단개혁에 대한 의지는 더욱 확고해졌다. ‘종단개혁을 위해 목숨까지 걸자’는 강경한 목소리도 흘러나왔다. 명진 스님은 “개혁의지를 모으기 위해 승적부를 불태우자”고 부르짖었다. 지도부들은 조직을 정비했다. 서울 가회동 실천불교전국승가회에 있던 범종추 사무실도 중앙승가대 지하 1층으로 이전했다. 홍보팀을 구성해 언론 홍보에 공을 들였다. ‘양비론’에 무게를 두던 언론을 움직이는 게 시급했기 때문이다. 당시 한겨레신문(한겨레)을 제외한 대다수 언론들은 ‘3·29 폭력사태’만을 주목했다.

조계사 폭력사태가 의현 총무원장의 지지파와 반대파간의 종권다툼이라고 몰아갔다. 심지어 경향신문(1994년 3월31일자)은 1면 만평에서 조계사 현판을 ‘소림사’로 표현하고 스님들이 서로 싸우는 장면을 그려 넣었다. ‘동방제일무협도량’이라는 제목을 달아 조롱 섞인 비판을 가했다.

범종추는 이날 오후 1시 기자회견을 열었다. 3월29일 폭력배 동원의 진상규명과 관련자의 사법처리를 요구했다. 폭력배들이 스님들을 폭행하는 사진과 동영상을 제시했다. 폭력배들이 흘리고 간 무선호출기에서 경찰의 연락처가 나왔다고 알렸다. 의현 총무원장과 경찰, 폭력배의 유착관계 의혹도 제기했다. 그럼에도 언론의 반응은 덤덤했다.

그러나 4월1일 한겨레의 특종보도는 언론들의 관점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한겨레는 이날 “총무원이 폭력배를 동원했다”고 1면에 보도했다. 총무원이 폭력배와 사전모의를 했으며 서울호텔 숙박비도 제공했다고 폭로했다. 경찰이 이를 인지하고 있었음도 부각시켰다. 의혹으로 제기되던 일들이 사실로 드러난 셈이다.

다음날부터 언론은 요동쳤다. 경찰의 조계사 진입을 비판하고 나섰다. 상무대 비리의혹과 맞물려 의현 총무원장과 정치권력과의 유착관계를 파고들었다. 재가자들도 가세했다. 3월31일 대한불교청년회·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우리는선우·청년여래회·경제정의실천불교시민연합·청년선재회·보리방송모니터 등 17개 재가단체들은 ‘불교를 바로 세우기 위한 재가불자연합’을 출범시켰다. 범종추와 함께 종단개혁에 나서기로 뜻을 모았다. 의현 총무원장의 3선 결의도 무효라고 주장했다. 육·해·공군 예비역 법사회도 이날 범종추를 지지하는 성명을 냈다. 최형우 내무부 장관의 해임을 요구하고 나섰다. 정치권도 거들었다. 권일순 민주당 부대변인은 4월1일 검찰과 경찰의 공정한 수사를 촉구했다. 상무대 비리의혹과 조계사 폭력사태에 대한 비판여론은 청와대를 압박해 나갔다. 급기야 김영삼 대통령은 4월2일 엄정한 수사를 지시했다. 경찰은 특별수사본부를 설치하고 폭력사태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에 나설 뜻을 내비쳤다.

여론은 급격히 기울어갔다. 범종추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범종추는 4월2일 중앙승가대 정진관에서 ‘불교개혁 기원 및 종교탄압규탄대회’를 개최했다. 대정부 촉구서를 발표해 내무부 장관의 사퇴와 종로경찰서장, 정보과장의 구속을 요구했다. 의현 총무원장의 참회와 즉각 사퇴, 중앙종회의원 전원 사퇴, 총무원 집행부 스님의 체탈도첩도 요구했다. 범종추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의현 총무원장의 3선 반대를 넘어 종권창출을 위한 수순을 밟았다. 범종추 기획실장 현응 스님은 승려대회를 준비했다. 인원동원과 조직구성에 대한 준비계획도 마친 상태였다. 시기만 남겨뒀을 뿐이었다.

경찰에 연행됐던 스님들
승가대서 개혁의지 다져
총무원·폭력배 유착 의혹
한겨레 특종보도로 확인

범종추, 승려대회준비착수
종단개혁 명분 얻기 위해
원로들 동원이 최대 과제

궁지에 몰린 의현 총무원장
서암 종정에 4월3일 사퇴약속
원두 스님 돌연 납치되면서
종단 혼란 조기수습 ‘물거품’

이무렵 범종추 사무실에는 하루에도 2~3차례 팩스 전문이 도착했다. 발신인이 없는 상태였다. 전문에는 조계사 인근 경찰 동향과 의현 총무원장 측의 움직임 등이 담겨 있었다. 이에 대한 범종추의 대응방안에 대한 조언도 빼곡히 담겼다.

현응 스님은 “발신인이 없는 전문이 매일 들어왔다. 구체적인 정보가 담겨 범종추가 활동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그런데 누가 보내는지 궁금했다. 발신인이 법응 스님이었던 사실을 안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법응 스님은 “그 당시 나는 출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전면에 나설 위치가 안 됐다. 그럼에도 범종추를 돕고 싶었다. 당시 범종추의 대응은 아마추어 수준이었다. 이슈를 선점할 수 있도록 조언했다. 경찰병력이 조계사에 들어온 것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도록 했다. 조계사에서 촛불문화제를 열도록 했다. 원로회의가 열리는 대각사에 학인들을 집중적으로 배치하도록 제안했다”고 밝혔다.

범종추 집행부는 4월10일 승려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범종추가 직접 승려대회를 소집하는 것은 적지 않은 부담이었다. 종단의 대표성을 인정받기가 쉽지 않았다. 범종추는 원로들을 동원하기로 했다. 원로회의가 승려대회를 소집하는 것은 범종추의 정당성과 종단개혁의 명분을 함께 얻자는 의도였다.
이무렵 원로들의 움직임도 부산했다. 종정 서암 스님과 몇몇 원로들은 이미 3월23일 수안보 회동에서 ‘의현 총무원장이 3선을 강행할 경우 인준을 거부하기’로 뜻을 모은 상태였다. 3월30일 저녁 원로회의 부의장 혜암 스님은 사무처장 원두 스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4월1일 오후 서암 스님이 주석하는 문경 봉암사에 원로들을 모으라고 요구했다. 예정했던 대로 의현 총무원장의 사퇴와 종단 수습방안을 논의하자는 것이었다. 4월1일 봉암사에는 서암 스님을 비롯해 원로의원 혜암, 도견, 원담, 응담, 도천 스님이 모였다. 원로들은 의현 총무원장의 사퇴를 재차 확인했다. 서암 스님이 마련한 개혁안을 토대로 종단 개혁을 추진하기로 뜻을 모았다.

이 시각 의현 총무원장도 봉암사를 향해 속도를 높였다. 상무대 비리의혹과 폭력배 동원 사건은 의현 총무원장의 설자리를 점점 빼앗아갔다. 그의 버팀목이었던 공권력도 여론에 뭇매를 맞으며 그 힘을 잃어갔다. 의현 총무원장에게서 마지막 보루는 원로들뿐이었다. 원로들의 지지를 얻어낸다면 불리한 여론을 돌릴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미 그에게서 돌아선 원로들의 마음을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원두 스님은 “4월1일 저녁 봉암사 다리 위에서 의현 총무원장과 단 둘이 만났다. 처음에 그는 도움을 호소했다. 그러나 도와줄 수 없다고 했다. 이미 원로들도 3선 반대와 사퇴를 요구하고 있음을 전했다. 살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총무원장에서 물러나는 것뿐이라고 설득했다”고 회고했다.

거듭된 설득 끝에 마침내 원두 스님은 의현 총무원장의 결심을 이끌어냈다. 4월3일 오전 11시 서울 대각사에서 서암·혜암 스님이 참석한 가운데 총무원장직에서 사퇴한다는 약속을 받아 냈다. 의현 총무원장의 사퇴표명과 동시에 서암 스님이 원로회의를 소집해 종단 상황을 수습하기로 했다. 종단개혁의 기본안도 발표하기로 했다. 의현 총무원장의 사퇴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갑작스런 사퇴에 따른 종단의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였다. 파국으로 치닫던 종단 사태는 곧 수습될 듯 보였다. 그러나 4월3일 범종추 소속 학인 스님들이 원두 스님을 납치하면서 의현 총무원장의 사퇴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원두 스님에 따르면 이날 새벽 의현 총무원장은 약속대로 측근을 통해 사퇴서를 보내왔다. 이를 서울 동승동 한 신도 집에서 머무르던 서암 스님에게 보고하고 대각사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오전 8시30분경 느닷없이 3명의 학인 스님들이 나타나 강제로 차에 태웠다. 그리곤 서둘러 시외지역으로 벗어났다. 원두 스님이 풀려난 것은 납치된 지 3시간여 뒤 한 통의 전화를 받고 난 뒤였다.

원두 스님은 “나를 납치한 학인 가운데 한 명이 범어사 정야였다. 그 스님은 어디에선가 걸려온 전화를 받고 나를 풀어줬다. 그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현응 스님이라고 답했다. 순간 범종추와 혜암 스님이 서로 교감을 나누고 있었음을 직감했다. 3일 오전 대각사에서 의현 총무원장이 사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사람은 나와 서암, 혜암 스님뿐이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현응 스님은 “내가 풀어주라고 했다는 것은 기억이 잘 안 난다. 다만 그 당시 대각사 주변에는 원로회의를 앞두고 중앙승가대 학인 60여명이 ‘금강호법단’을 구성해 활동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고 술회했다.

원두 스님의 납치 소식은 서암 스님과 의현 총무원장에게 빠르게 전달됐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서암 스님은 급히 금산 태고사로 거처를 옮겼다. 의현 총무원장도 대각사에 나타나지 않았다. 4월3일 의현 총무원장의 전격 사퇴가 이뤄졌다면 굳이 4월10일 승려대회로까지 이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어떤 언론도 이날의 사건을 주목하지 않았다. 오히려 범종추 측에서 흘린 정보만을 기사화했다. 한겨레는 “서암 스님 원로회의 소집”(1994년 4월4일자) “의현 총무원장은 4일 서울 시내 모처에서 서암 스님을 만나 사퇴불가 의사를 표명했다”(1994년 4월5일자)고 잇따라 보도했다. 그러나 서암 스님은 원로회의를 소집하지 않았다. 4월4일에는 서울에 있지도 않았다는 점에서 이들 보도를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렵다.

4월3일 범종추는 5일 대각사에서 원로회의를 열기로 했다. 원로회의에서 채택할 결의문도 미리 마련했다. 원로회의는 4월4일 밤 부의장 혜암 스님에 의해 원로들에게 통보됐다. 이때까지 원로회의 의장은 종정 서암 스님이 겸직하고 있었다. 의장조차 모르는 원로회의 소집이었다. 다만 언론들은 4월5일 원로회의를 전하면서 혜암 스님에게 종헌종법에도 없는 ‘원로의장 직무대행’이라는 직책을 부여했다. 4월5일 원로회의가 적법성을 두고 논란을 빚는 이유이기도 하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249호 / 2014년 6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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