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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어른들의 잃어버린 시간

기자명 하림 스님

서울에서 지하철을 탔습니다. 재잘거리는 이야기 소리가 들려 보았더니 여학생 세 명이 한참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두 아이는 서 있고 한 아이는 앉았습니다. 무슨 이야기들을 하는지 허리를 휘어가며 자지러지게 웃는 것입니다. 그 모습이 너무 좋아서 자꾸 곁눈질을 했습니다. 어떤 꽃을 보는 것보다 아름다웠습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집니다. 마음 한 구석에서 청량한 기운이 생깁니다.

아이들이 저렇게 웃고 떠들고 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이 정화되는 듯한 느낌입니다. 해맑게 웃는 한 아이의 얼굴에서 백제의 미소라고 불리는 마애불의 미소가 떠오릅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아! 저렇게 행복한 장면들이 이곳에서 시현되고 있구나’를 느꼈습니다. 꼭 멋있는 경치가 있고 음악이 있고 좋은 의자가 있어야 행복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복잡한 지하철에서도 시끄러운 기차소리와 불편한 자리지만 행복한 느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엉뚱한 곳에서 행복을 찾아다녔는지도 모릅니다.

재잘대는 여학생들 보며
어릴 때 기억 떠올라
이젠 굳어버린 내 얼굴
그 시절 처럼 웃고 싶어

문득 창문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습니다. 저렇게 즐겁게 웃어본 적이 언제였던지 기억이 가물거립니다. 누군가와 이야기 속에 빠져서 허리가 휘도록 즐거워했던 적이 있었던가? 그것도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저 창문에 비친 내 모습은 어쩐지 굳어진 얼굴입니다. 남들이 눈치 채지 않게 살짝 입가를 올려보지만 왠지 어색하고 아까 본 그 아이의 표정이 나오질 않습니다.

그러고 보니 어리시절의 장면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갑니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되고, 남동생이 초등학교를 입학했을 때입니다. 지리산 실상사에 있었습니다. 그때는 하루 종일 찾아오는 사람을 보기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큰 방이 하나 있었는데 둘이 그 방에서 일대일 축구를 했습니다. 양말을 말아서 공으로 삼고 양쪽 벽에 작은 표시를 하고 서로 골을 넣는 경기였습니다. 둘이 얼마나 열심히 뛰었던지 땀이 비 오듯 했습니다. 공양주 보살님이 어디서 들었는지 구들이 꺼진다고 호통을 치셨습니다. 그러면 잠시 멈추었다가 조용히 제2라운드를 시작했습니다. 둘이서만 하는 월드컵이었습니다. 헐떡이는 숨소리가 밖으로 들릴까봐 끌어안고 서로 입 가운데를 손가락으로 세우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또 양말 공을 향해 미끄러져 갑니다. 지금도 그때 그 장면을 생각하면 즐겁습니다. 가끔 그 때처럼 이제는 더 큰 방에서 양말 축구하자고 신도님들께 조르기도 해보지만 별로 반응이 없습니다. 얼마 전에 서울에 인드라망 회의를 갔습니다.

서로 살아간 이야기들을 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 한 젊은 아가씨가 “저는 요즘 데이트하느라 좋은 시간 보내고 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자리에 함께한 사람들 모두 박수를 치고 축하해 주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아! 사랑은 젊은이들의 특권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어른들은 즐거운 시간들을 보내면 안 되나?’ ‘그냥 길바닥에 앉아서 친구끼리 즐거운 대화로 배꼽을 잡고 웃으면 안 되나?’ ‘방에서 땀 흘리며 뛰어놀면 안 되나?’ ‘좋은 사람과 만나서 즐거운 시간 보내면 안 되나?’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지나갑니다.

어른들은 이런 시간들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도 누군가에게 좀 혼나더라도 몰래 웃으며 장난치고 놀면서 살고 싶습니다. 그러면 상대도 그런 심정을 이해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늘 하루의 계획에 즐거운 놀이가 있는 삶이되기를 기원해 봅니다. 

하림 스님 whyharim@hanmail.net

[1249호 / 2014년 6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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