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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세계관

부정·긍정 관점 따라 세상 보는 시각 달라

▲ 그림=김승연 화백

불교를 피상적으로 접하는 사람들 중에는 부처님을 비관주의자나 염세주의자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세상을 지나치게 괴롭게만 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왜 이 세상이 괴로움이라고 했는지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는 범부들로서는 당연히 가질 수 있는 회의일 것이다. 그래서 일면 이해되는 측면이 많다.

사실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보면 이 세상은 머물만한 곳이 못 되는 것으로 나온다. 초기불교의 일체개고(一切皆苦)설은 인간들이 누리는 보편적 행복이나 즐거움을 고통으로 보고 있다. 특히 초기불교가 아라한을 목적으로 수행한다는 시각에서 보면 세상에 태어나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바람직하지 않다. 일체개고설은 생명을 지닌 중생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국토에도 해당한다. 가령 사람이 눈으로 사물을 본다면 눈만 괴로운 것이 아니고 사물도 괴롭다는 의미다. 시각과 시각대상인 세상 자체가 함께 괴롭다는 교설이 일체개고설이다. ‘디가니까야’를 보면 부처님이 천상의 왕들을 찾아가 지수화풍을 비롯한 일체의 세계가 어떻게 그 기반이 사라지게 되는지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부처님은 천왕들에게 팔정도(八正道)를 통해 열반을 실현하면 세상의 기반은 흔들리고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가르친다. 이처럼 초기불교에서 열반은 세상이 소멸된 경지이며 그 소멸은 결국 괴로움의 소멸과 뜻을 같이 한다. 이 교설에 의하면 세상은 모두가 무상(無常)이며 무아(無我)며 괴로움이며 더러움이기 때문에 염리(厭離), 즉 싫어하는 마음으로 떠나서 열반을 실현하는 것이 최상이다. 그러나 물론 세상이 모두 사라져 없어진 단멸 그 자체가 열반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열반은 세상의 생성과 소멸이 사라진 중도묘법의 경지이므로 언어로 표현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초기불교를 중생들의 시각으로 들여다보면 눈앞의 꽃도 아름답게 여길 대상이 아니며 딛고 선 땅도 가꾸어야 할 대상이 아닌 것으로 비쳐진다. 세상을 괴로움으로 관찰하고 싫어하고 떠나려는 마음이 있을 때에 열반은 주어진다. 경전을 살펴보면 느끼는 것이지만 ‘니까야’나 ‘아함경’과 같은 경전 어디를 봐도 세상의 아름다움과 머물러야 할 가치에 대해 언급하는 장면은 눈에 띄지 않는다. 이 세상이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곳이고 머물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중생들에게 고통을 강조하는 초기경전의 세계관은 냉정하기만하다. 초기불교의 교설이 날카롭고 빈틈없는 진리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염세적이고 비관적이라는 비판에 대해 반대할 명분도 별로 없어 보인다.

초기불교에서의 세상은
고통과 괴로움의 세계

대승도 괴로움 말하지만
마음 투영된 결과일 뿐

괴로운 세상과 마음찾기 속
모호한 경계가 한국불교 현실

대승불교 역시 세상을 고통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는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중생계를 무명(無明)과 업(業)에 의해 감염된 고통의 세계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대승교설의 특징은 초기경전처럼 이 세계를 고통이라고 단정적으로 가르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대승의 교설에서는 초기불교와 같은 일체개고설을 확고하게 못 박거나 강조하거나 세상에 대한 염리를 요구하지 않는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세계는 괴로움(苦)도 즐거움(樂)도 아니다. 세계는 중생의 마음 여부에 따라 고통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기쁨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어떤 법도 실체가 없다는 제법개공(諸法皆空)의 교리와 마음이 세계를 만들었다는 삼계유심(三界唯心)의 교리에 따라 세상의 괴로움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며 다만 중생의 마음이 투영된 결과로 여긴다. 이로 인해 대승불교에서는 중생들로 하여금 세상에 대한 비관보다는 마음을 깨달아 고통이 본래 없음을 알아야한다고 제시한다. 부처의 열반은 세상을 벗어나 얻어지는 경지가 아니다. 고통으로 얼룩진 이 세상 그대로가 열반의 모습임을 바르게 아는 것이 열반이다. 대승불교는 같은 세상을 말하면서도 초기불교의 세계관과는 확연히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유마경’에 보면 대승불교가 세상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지가 분명하게 나온다. ‘유마경’에 장자의 아들 보적이 부처의 나라에 관해 묻는 장면이 있다. 여기서 부처님은 중생의 국토가 곧 부처의 국토라고 강조하고 중생이 사는 이곳을 떠나 부처의 세계를 찾는다면 허공에서 집을 짓는 것과 같아서 결코 부처의 나라에 갈 수 없다고 답한다. 이때에 흥미로운 일은 초기경전의 최고 제자인 사리풋타의 질문이다. 부처의 나라가 이 세상이라는 부처님의 답변에 사리풋타는 이의를 제기한다. 자신이 볼 때 이 세상은 괴롭고 더럽고 허망하기 그지없는데 왜 부처님은 이 세상을 부처 세상이라고 답하느냐는 것이다. 이에 부처님은 장님과 태양의 비유를 통해 사리풋타의 의문을 풀어준다. 장님이 태양을 보지 못하는 것은 태양의 허물이 아니라 장님의 허물이듯 이 세상이 정토인 줄을 모르는 것은 중생의 마음이 깨끗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대승불교에서는 초기불교의 어두운 세계관을 밝은 세계관으로 바꾸어 놓고 오직 마음을 청정히 할 것을 권고한다. 마음이 청정한 자에게는 눈앞의 꽃이 부처의 모습으로 나타나 중생이 바라보는 꽃보다 훨씬 아름답게 보인다. 꽃향기를 맡는 것도 갈애와 집착으로 여기는 초기불교와는 달리 대승불교에서는 중생 활동의 적극성을 인정하고 세상 속에 행복이 있음을 알게 한다. 시방정토설(十方淨土設)이나 사바즉적광토(沙婆卽寂光土)설처럼 이 세계는 결코 부정적인 장소가 아니다. 물론 초기불교 역시 세상은 중생의 무명이 연기되어 나타난 결과로 보고 오온의 청정이나 법계의 청정을 말하기는 한다. 하지만 대승처럼 적극적으로 세상을 밝은 방향 쪽에서 말하고 있지는 않다. 현재 한국불교는 일체를 괴로움으로 관찰하라는 초기불교의 교설과 마음이 곧 부처라는 대승불교의 교설이 뒤섞여 일반 불자들로 하여금 혼돈을 야기 시키고 있다. 고통이 세상의 본래 모습인지 정토가 세상의 본래 모습인지 불자들의 세계관은 모호하기만 하다. 가뜩이나 살기 힘든 세상에 괴로움을 강조시켜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라고 가르쳐야 할지 본래 괴로움은 없는 것이니 마음을 깨달아 행복을 찾으라고 가르쳐야 할지 그 접합점을 찾게 하는 교육이 참으로 필요하다.

이제열 법림법회 법사  yoomalee@hanmail.net

[1249호 / 2014년 6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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