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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굿 윌 헌팅(Good Will Hunting)

기자명 정장진

‘나’라는 착각은 끊임없이 고통 일으키는 원인

 
‘굿 윌 헌팅(Good Will Hunting, 1997)’은 “내 탓이오”를 연발하면서도 “정말 잘 만든 영화다. 어떤 면에서 그럴까?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문화사적 관점에서 보면 이 영화는 영화라는 장르가 이제 철학과 종교를 충분히 대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영화의 무궁무진한 가능성들 중에서도 철학과 종교를 대신할 수 있다는 영화의 이 가능성은 역으로 보면 오늘날 대중들과의 관계 속에서 철학과 종교가 처한 상대적 빈곤 상태를 암시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조금 겸손하게 말하면, 이 영화는 대중성을 사상시키지 않으면서도, 철학과 종교와 공존하면서 모자라는 부분을 채워줄 수 있는 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놓은 영화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불자의 관점에서 이 영화를 본다면 많은 불자들이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을 같아 더없이 반갑기도 한데, 다름 아니라 주인공의 이름이자 제목에도 나오는 의지(意志)를 뜻하기도 하는 윌(Will)이 바로 불가에서 말하는 보살사상의 핵심인 서원(誓願)이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영화 제목 ‘굿 윌 헌팅’은 서원뿐만 아니라 사냥을 의미하는 헌팅(Hunting)에서는 회향(回向)도 말하고 있다.

종교·철학 무너진 틈 메운 작품
성장소설 구조 이어 받은 영화

아픈 유년기 보낸 천재 청소부
MIT 공대서 인생의 스승 만나
증오심 소멸시킨 뒤 삶 되찾아

“내 탓이오” 연발하는 주인공
“네 탓 아냐”를 가르친 스승

▲ 양아버지에게 맞고 자란 윌은 세상을 조롱하며 청소부 일로 살아간다. 그러나 좋은 스승을 만나 마음의 짐을 덜어가며 성장한다.

서구 문학에 성장소설 혹은 교양소설로 불리는 소설 양식이 있다. 18세기 말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를 비롯해 몇몇 소설들에서 시작된 장르인데 청소년이 성장하면서 거듭되는 꿈과 좌절을 겪는 이야기를 총칭한다. 독일에서 시작되었지만 사실은 소설의 시대라고 할 수 있는 서구의 19세기 내내 거의 모든 소설들은 성장소설들이었다. 그만큼 프랑스 대혁명으로 문을 연 서구의 19세기는 산업혁명까지 더해지며 청년층 전체를 세기의 제물로 바쳐야 하는 시대였다.

영화 ‘굿 윌 헌팅’도 똑같은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다. MIT 공대의 최고 수학교수도 못 푸는 문제들을 단 일분도 안 걸리고 척척 풀어내고 뛰어난 기억력으로 한 번 읽은 책은 거의 모두 기억하는 천재인 윌(맷 데이먼 분. 기가 막힌 캐스팅이다)은 어린 시절 그를 입양한 양아버지로부터 거의 매일 구타를 당하는 혹독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남자는 탁자에 렌치와 막대기와 혁대를 늘어놓곤 선택하라고 했었죠….”

이 끔찍한 기억으로 인해 윌은 어릴 때부터 크고 작은 폭력 사건을 일으키며 소년원도 여러 번 갖다 왔다. 이 모든 일로 인해 윌은 다시는 그 누구로부터도 당하지 않으려는 극도의 방어기제를 작동하며 겉으로는 평범하지만 속으로는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는 고독한 삶을 살아간다. 여자친구를 만나도 헤어지자는 말을 들을까 겁이나 먼저 이별을 통고하는 식이다. 이 방어기제로 인해 월의 천재적 재능은 세상을 가소롭게 보는 냉소로만 표출될 뿐, 월은 그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채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MIT 공대의 청소부로 일을 하던 윌은 복도 칠판에 적어놓은 수학 증명 문제를 우연히 지나가다 풀어버린 것이 계기가 되어 수학교수를 만나게 되는데, 윌의 재능과 인격적 문제를 눈치 챈 이 수학교수가 같은 학교의 심리학과 교수인 친구를 찾아가 윌을 부탁하게 된다. ‘죽은 시인의 사회’로 잘 알려진 로빈 윌리엄스가 역을 맡은 숀 맥과이어가 바로 이 심리학과 교수다. 이 심리학과 교수 역시 어린 시절 알코올 중독에 빠진 아버지로부터 구타를 당한 유사한 아픈 기억을 갖고 살아가던 인물이다. 더군다나 숀은 사랑하던 아내가 암으로 세상을 떠난 지 얼마 안 되는 상황에서 윌을 만나게 된다. 영화는 성장소설의 구도 그대로 세상을 향해 꼭꼭 마음의 문을 닫아 걸고 있던 윌이 다시 마음의 문을 열면서 끝난다.

“메아 쿨파, 메아 쿨파(mea culpa, mea culpa)….” 불자라면 이 말을 다들 알겠지만, 가톨릭에서 고해성사를 할 때 외우듯이 반복하는 이 라틴어 문구는 쉽게 옮기면 “내 탓이로소이다”쯤 될 것이다. 영화 ‘굿 윌 헌팅’은 이 ‘메아 쿨파’ 영화이기도 하다.

이미 여러 번 윌을 만났지만 매번 윌의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은 좀처럼 열리질 않는다. 그러기를 반복하던 어느 날, 숀이 연구실 겸 상담실로 쓰는 방에서 다시 윌을 만났을 때 윌에게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말을 무려 10번이나 한다. “It’s not your fault.” 이 말을 한 번 말할 때마다 숀은 윌에게 한 발자국씩 가까이 다가선다. 다가설수록 숀의 발걸음은 점점 더 단호해졌고 얼굴도 더 진지해진다. 윌은 그렇게 다가서는 숀을 밀쳐 내기도 했지만 마침내 얼굴을 맞댄 윌은 숀을 끌어안고 흐느끼며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단선적으로 보면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는 “내 잘못이다”라는 뜻의 ‘메아 쿨파’와는 정 반대다. 하지만 이 감동적인 장면에서 정반대의 뜻을 갖고 있는 이 두 표현은 같은 뜻의 말로 들린다. 왜일까? 영화에서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10번이나 번복되는 이 말은 윌의 어린 시절을 망가뜨려놓은 천하의 죽일 인간인 양부의 잘못을 지적하는 말은 아니다. 그러면, 숀이 말한 대로 윌의 잘못도 아니고 무지막지한 양부의 잘못을 말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없다면, 대체 잘못은 누가 저지른 것인가? 이 질문을 통해 영화는 마침내 철학적, 종교적 차원으로 옮겨간다.

이 영화를 두고 철학이나 종교 운운하는 것은 영화 속에서 니체, 프로이트 등의 이름이 등장하고 반 고흐 등 그림 이야기가 나와서도 또 천재 수학자가 된 일자무식의 비렁뱅이 인도인이 등장해서도 아니다. 수학을 두고 “고등 정리는 교향곡처럼 온 몸에 전율을 준다”는 멋진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도 아니다.

정신과 상담은 고해성사의 심리학 버전이다. 이제 오늘날 거의 누구도 고해성사를 하지 않는다.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은 철학의 생리학적, 의학적, 사회학적 버전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의 문을 결코 열려고 하지 않는 윌에게 한발자국씩 다가서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하는 숀을 현대판 고해신부로 볼 수 있다. 숀의 이 말은 “그건 양아버지의 잘못이야”라고 말하는 것도 물론 아니다. 숀은 단지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을 열어보려고 한 것이다.

 

마음의 문을 어떻게 열 것인가? 지난한 일이다. 아니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불교에서는 심리학이나 정신분석보다 거의 몇 천년 앞서 유식설(唯識設)을 통해 여덟 가지 마음의 움직임을 팔식(八識)이라는 인식체계로 헤아려 놓았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는데 그 근저에는 인간 존재 모든 마음의 움직임은 가상의 표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공 사상과 선정(禪定) 체험이 깔려있다. 이 팔식에서 정말로 흥미로운 것은 말나식(末那識)인데,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끊임없이 자아(自我)라고 오인하여 집착하게 함으로써 항상 아치(我痴), 아견(我見), 아만(我慢), 아애(我愛)의 네 번뇌를 지속시키고 아뢰야식에 저장된 종자(種子)를 이끌어 내어 생각과 생각이 끊임없이 일어나게 하는 마음 작용을 말한다. 복잡한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아뢰야식은 잠재의식이며 말나식은 전(前)의식 그리고 육식은 감각과 상호작용하는 의식을 말한다고 볼 수 있는데 인간의 욕망과 그 충족 그리고 충족에 몰두하는 집착을 가리키는 말에 다름 아니다.

다시 말해 프로이트의 심층심리학에 의거해서 보든 아니면 불교식으로 보든 인간과 대상 사이에서 일어나는 마음(기억, 잠재의식, 연상, 망상, 인식의 비약과 왜곡 등)의 움직임은 마음의 주인이라고 착각을 하는 자아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말나식과 아뢰아식의 움직임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를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우리가 흔히 자아(自我)라고 하는 존재는 초자아(超自我)와 이드(Id, 충족을 향해 움직이는 본능적 에너지이자 그 저장소를 지칭하는 라틴어)와의 타협의 산물이며 이 타협이 깨지면 잠재의식이 그만큼 활성화되어 이드의 지시를 받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초자아는 아버지로 상징되는 가상의 이미지에 지나지 않고 그래서 언제든지 그 자리에는 초월적 지위를 부여받은 여러 존재들이 대신 들어갈 수 있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을 하나님 아버지로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윌은 이 초자아와 심한 갈등을 겪고 있는 유년기의 기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청년이다. 다시 말해 현실에서 초자아의 역할을 해주어야 할 양부를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윌은 현실 속의 초자아인 양부를 증오하면서 동시에 초자아라는 표상 자체를 함께 증오하게 된 것이다. 인간의 마음을 구성하고 조직하는 심상과 상징체계 자체가 일대혼란에 빠진 것이다. 눈앞의 아버지에 대한 부정과 증오가 초자아라는 표상과 그 필요성 자체마저도 부정하고 증오하게 한 것이다.

수학은 그래서 아주 적절한 모티브였다고 말 할 수 있다. 수학은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초자아 중의 초자아이기 때문이다. ‘1+1’은 어디서나 그리고 언제나 ‘2’이다. 이 고정불변의 진리를 윌은 “그까이 것”이라며 조롱하고 있는 것이다. 윌은 초자아 중의 초자아인 신과 대결하고 있는 것이다. 숀이 윌에게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열 번이나 말해주었을 때 진정으로 숀이 하고 싶었던 말은 “신을 조롱하고 부정했던 것은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말이었다. 그는 이제 용서를 받은 것이다. 사실 고해성사의 최대 주제이자 고해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기도 한 말은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죄를 지었습니다”이다. 숀은 윌에게 “신을 부정하는 건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을 한 것이다. 숀은 상징체계를 다시 회복시킨 것이며 신이라는 초자아의 자리와 표상을 복원시켜 준 것이다.

 

영화 ‘굿 윌 헌팅’을 철학과 종교를 대신할 수 있는 영화라고 할 때 이는 비단 정신분석과 불가의 인식론이 보이는 유사성 때문만은 아니다. 실제로도 이런 천재들이 존재하긴 하지만 우리 모두가 이 천재들일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태어날 때 모두 ‘천상천하유아독존’을 고고성으로 외치며 세상과 만나기 때문이다. 부처님만 천상천하유아독존인 것이 아니다. 인간 모두는 마야 부인의 옆구리에서 나온 것이다. 너는 나처럼, 나는 너처럼 유일한 존재인 것이며 그 유일성은 지문이나 성문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의 문제이며 나아가 생명 이전과 이후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 유일성을 부정하면 세상은 정글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물질주의의 가장 무서운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솔직해져야 한다. 부처님도 예수님도 상징과 수사법 속에서만 존재하며 실재하지 않는다는 무서운 생각이, 구원파에서 보듯이, 종교가 물질과 권력과 육신의 안일을 위해서 동원되는 한낱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적지 않은 이들의 허탈감과 함께 있는 것이 오늘 아닌가. ‘굿 윌 헌팅’은 종교와 철학의 허물어져가는 한 귀퉁이를 채울 수 있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정장진 문화사가 jjj1956@korea.ac.kr

[1249호 / 2014년 6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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