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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심식관(心識觀)

수행 통해 얻어진 지혜로 관조한 마음 구조

▲ 그림=김승연 화백

불교에서는 마음(心)을 중시한다. 마음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며 의지처로 마음을 제외하고는 어떤 법도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 불교의 입장이다. 불교에서는 마음을 가리키는 용어들로 심(心)·의(意)·식(識)이라는 표현을 쓴다. 이때 심과 의와 식이라는 용어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초기불교는 뚜렷하게 구분하고 있지는 않다. 심위법본(心爲法本), 자정기의(自淨其意), 식생고명색생(識生故名色生) 할 때에 심이나 의나 식이 마음을 뜻하는 말들이기는 하지만 정확하게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자세히 설명하기 힘들다.

초기불교 육식으로 마음설명
대승불교는 팔식으로 세분화

초기불교 이론은 한계 명확
아뢰야식, 지혜도 함께 구족

이들 용어들에 대해 좀 더 세분화시켜 설명하는 것은 대승불교에 들어와서다. 초기불교의 기본교리는 오온(五蘊) 십이처(十二處) 십팔계(十八界)다. 여기에서 초기불교는 중생의 마음을 여섯 종류인 육식(六識)으로 설명하고 이들이 어떤 과정을 통해 일어나고 사라지는가에 대해 밝히고 있다. 육식은 주지하다시피 육근(六根)에 의해 발생 소멸하는 마음들로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이다. 중생은 이 육식에 의해 사물을 감별하고 그 감별된 사물에 대해 갖가지 심리현상을 일으켜 인과응보의 세계를 만들어간다. 그런데 이와 같은 육식 가운데에 가장 중심이 되는 식은 제육식으로써의 의식이다. 이 의식은 앞의 다섯 가지 의식인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에 의해서 식별되는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 등의 대상들을 다시 확인하며 최종적으로 식별하는 마음을 가리킨다. 제육식은 인간들의 정신활동을 일으키는데 있어 핵심이 되는 마음으로 일체의 대상들에 대해 분석하고 사고하고 판단하는 기능을 가진다. 여기서 제육식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육식의 의지처인 의근을 빼놓을 수 없다. 마음이 발생하려면 반드시 인식대상과 함께 마음을 발생시키는 의지처가 있어야한다. 이 의지처를 불교에서는 근(根)이라고 하는데 안식은 안근이 의지처가 되고 이식은 이근이 의지처가 되며 비식 설식 신식은 각 비근 설근 신근이 의지처가 되는 것처럼 의식의 의지처는 곧 의근이 된다. 그렇다면 이 의근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이는 의근이 어떤 특별히 정해진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닌 현재 생각이 일어나기 전 바로 앞의 생각을 의미한다. 전 찰나의 생각이 사라지고 후 찰나의 생각이 일어날 때에 전 찰나의 생각은 후 찰나 생각의 의지처가 되어 의근으로써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초기불교의 수행은 바로 이 의근을 바르게 확립하고 수호하고 청정히 한다는데 있다. 의근에서 의식이 일어나므로 의근을 맑히면 마음이 청정해져 해탈을 가져온다. 초기불교의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도 실은 이 의근을 중심으로 하여 수행을 삼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초기불교의 심식관에 비해 대승불교의 심식관은 구조면에 있어서나 작용면에 있어 훨씬 세밀하게 분석한다. 대승불교의 심식관이 초기불교와 차이가 나는 것은 무엇보다 말나식과 아뢰야식의 등장이다. 초기불교에서 언급하고 있지 않은 말나식과 아뢰야식은 마음의 구조와 성질을 설명하는데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이 말나식과 함께 아뢰야식은 그동안 육식으로써 마음의 구조를 설명해 왔던 초기불교의 심식관을 더욱 정밀하게 세분해 마음의 구조를 팔식으로 설명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동안 모호하기만 하였던 심·의·식의 차이가 어디에 있는지도 밝혀 놓았다. 대승불교의 심리서라 할 수 있는 ‘유식론’에 의하면 심은 제팔식 아뢰야식으로 이숙식(異熟識)에 해당하고, 의는 제칠식 말나식으로 사량식(思量識)에 해당하며 식은 안식 등을 비롯한 육식으로 요별경계식(了別境界識)에 해당한다. 초기불교에는 없는 말나식과 아뢰야식의 등장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대승불교는 초기불교의 심식관은 중생의 마음을 설명하는데 충분치 않다고 여겼다. 초기불교의 이론대로 의근이 현생각 전의 앞생각이라면 사람이 기절을 하거나 의식불명 되었을 때는 생각이 사라졌으므로 의근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때 의근의 의미를 어떻게 찾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육식만을 가지고 마음을 설명하면 중생들이 지은 업은 어디에 보관되며 윤회의 주체는 어디서 찾을 수 있느냐는 문제도 남는다. 그래서 대승에서는 제칠식을 등장시키되 칠식의 근거를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제육식의 의지처인 의근에 두었다. 그리고 대승은 의근을 초기불교처럼 앞생각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기절상태나 의식불명 상태에서도 정지되지 않는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마음으로 해석하여 초기불교의 심식관을 극복하려 하였다. 초기불교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말나식은 중생의 번뇌를 설명하는데 있어서도 중요한 단서가 된다. 말나식이야말로 중생들을 괴롭게 하는 근원적 번뇌로 유신견을 비롯한 갖가지 악견을 낳게 하는 원인으로 삼았다. 초기불교에서 의근을 수행대상으로 삼듯 대승불교 또한 의근을 수행대상으로 삼는 것은 마찬가지다. 의근은 곧 번뇌식이다. 따라서 수행으로 청정케 할 대상이다. 이 번뇌식 역할을 하는 말나식은 아뢰야식을 오염시켜 아뢰야식까지도 수행정화의 대상으로 만든다. 제칠식 말나식과 함께 등장하는 제팔식 아뢰야식은 마음의 구조뿐만 아니라 중생과 세계의 근원을 밝히는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식이다. 아뢰야식은 육식과 칠식 등 모든 식의 근본일뿐더러 중생계와 열반계를 동시에 포섭하고 있는 심원하고도 거대한 식이다. ‘유식론’에서는 아뢰야식의 기능으로 네 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는 과거생의 모든 선악종자를 보관하며 둘째는 윤회의 주체이며 셋째는 육체의 보존과 활동을 관장하고 넷째는 예언기능이다. 특히 아뢰야식은 대승에서 소중하게 여기는 불성을 내포하고 있다. 초기불교의 심식관과 달리 중생의 마음이 무명만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닌 부처님과 똑같은 지혜 덕상을 보존하고 있다. 불교의 심식관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고도의 수행을 통해 얻어진 지혜로 관조하여 확인된 마음의 구조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대승불교는 초기불교에서 발견하지 못한 심식의 구조를 설하고 있고 이에 따르는 수행을 권장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열 법림법회 법사  yoomalee@hanmail.net
 

[1251호 / 2014년 7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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