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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이계호, '포도도'

기자명 조정육

괴로움은 실체가 없다

“이 경전이 있는 곳은 어디든 지 모든 세상의 모든 세상의 천신, 인간, 아수라들에게 공양을 받을 것이다. 이곳은 바로 탑이 되리니 모두가 공경하고 예배하고 돌면서 그곳에 여러 가지 꽃과 향을 뿌릴 것임을 알아야 한다.” 금강경

▲ 이계호, ‘포도도’, 17세기, 비단에 먹, 각 121.5×36.4cm, 국립중앙박물관.

“‘금강경’을 읽으면 뭐가 좋아요?”

이런 질문을 자주 받는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금강경'을 함께 독송하자고 권하면 반드시 듣게 되는 질문이다. 내게 질문한 사람의 속뜻은 '금강경'을 독송하면 어떤 가피를 받을 수 있느냐는 뜻일 것이다. 가피(加被)는 ‘부처나 보살이 자비를 베풀어 중생을 이롭게 한다’는 의미다. 그러니까 '금강경'을 독송하면 소위 기도발을 받을 수 있는가. 기도의 효험은 바로 나타나는가. 이런 뜻일 거다. 이럴 때 떠오르는 모 광고 카피가 있다.

“좋은데, 정말 좋은데 뭐라 표현할 방법이 없네....”

이계호(李繼祜:1574-1645)는 조선 중기에 활동한 문인화가다. 호를 휴휴당(休休堂), 휴당(休堂), 휴옹(休翁)이라 했는데 묵포도를 잘 그렸다. ‘포도도(葡萄圖)’는 이계호가 포도를 잘 그린다는 소문이 결코 거짓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수레바퀴가 굴러가는 걸까. 파도가 출렁거리는 걸까. 8폭으로 된 긴 화면에 포도덩굴이 가득하다. 화면 양쪽에서 원과 반원을 그으며 뻗어나간 덩굴이 꿈틀거린 듯 동적이다. 포도송이는 잎사귀와 덩굴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게 그렸다. 작가의 의도가 포도송이가 아니라 포도덩굴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때문에 그림이 조금 번잡하다. 신사임당의 ‘포도도’에서 느낄 수 있는 정갈한 맛이 결여되어 있다. 이계호는 왜 굳이 예술성에 상처 입히는 줄 알면서도 이런 구도를 택했을까.

포도는 한 가지에 수많은 열매가 주렁주렁 열린다. 다산의 상징이다. 척박한 땅에서도 죽지 않고 잘 자란다. 강인한 생명력과 장생의 상징이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포도송이도 덩굴이 없으면 소용없다. 포도 덩굴을 뜻하는 만대(萬帶)는 만대(萬代)와 동음이의어다. 만대(萬代)는 자손이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는 뜻이다. 포도를 그릴 때 덩굴을 함께 그려야 하는 이유다. 그러니 이계호가 '포도도'에서 특별히 포도덩굴을 강조해서 그린 것은 포도송이처럼 많은 자식들이 오래오래 살기를 염원했기 때문이다. '포도도'는 분명히 선물용으로 그렸을 것이다. 자손이 귀한 집에서 포도송이처럼 많은 자식들을 낳아 번창하기를 바라는 축원의 의미를 담았을 것이다. 감상용으로만 그린 그림인 줄 알았더니 그 안에 이런 살뜰한 의미가 담겨 있다. 꿈틀거리듯 강한 힘이 느껴지는 '포도도'를 보면서 그 집의 자손들도 건강하고 씩씩하게 자랄을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포도 그림으로 이름이 알려진 작가가 여러 명 있다. 지난 번에 살펴 본 신사임당을 비롯해 황집중(黃執中:1533-?), 홍수주(洪受疇:1642-1704), 최석환(崔奭煥:1808-?)등이 모두 포도그림을 잘 그렸다. 또한 심정주(沈廷胄:1678-1750)와 이인문(李寅文:1745-1821)이 담백한 형태의 포도그림을 남겼다. 이들이 그린 포도그림을 보노라면 어느 새 입안에 군침이 돌면서 달콤한 포도가 먹고 싶어진다.

“좋은데, 정말 좋은데 뭐라 표현할 방법이 없네....”

이 광고 카피의 목적은 간단하다. 먹어 보라는 뜻이다. 먹어 봐야 맛을 알고, 먹어 봐야 효험을 알지 않겠는가. 내가 아무리 포도가 맛있다고 설명해줘도 먹어보기 전에는 그 맛을 알 수 없다. 달착지근하면서도 새콤한 포도 맛은 말로 설명이 안된다.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고 백견(百見)이 불여일행(不如一行)이다. 그렇다면 포도 맛은 백문(百聞)이 불여일식(不如一食)이다.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먹어보는 것이 낫다.

'금강경' 독송도 마찬가지다. '금강경' 독송의 맛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 직접 본인이 '금강경'을 맛보는 수밖에 없다. '금강경'이 어떤 경전인가. '금강경'은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의 준말이다. 금강(金剛)은 가장 견고하여 어떤 번뇌라도 깨뜨릴 수 있는 지혜를 뜻한다. 반야(般若)는 깨달음의 지혜를, 바라밀(波羅密)은 ‘저 언덕에 이른다(到彼岸)’는 의미로 지혜의 완성을 뜻한다. 그러니 ‘금강반야바라밀경’은 ‘확고한 지혜의 완성에 이르는 길’이다. 다이아몬드처럼 견고하고 빛나는 깨달음의 지혜로, 번뇌와 고통이 사라져 평화와 행복만이 있는 저 언덕에 도달함을 설하는 경전이다. 불교의 소의경전(所依經典)인만큼 많은 사람들이 수지독송(受持讀誦)한다. 소의경전이란 신행(信行)뿐만 아니라 교의적(敎義的)으로도 가장 크게 의지하는 근본경전(根本經典)을 일컫는다. 이런 심오한 뜻이 담긴 경전독송의 가피를 어찌 몇 마디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어둔하고 지혜롭지 못한 필자지만 그동안 조금이나마 '금강경' 독송을 해온 사람으로서 내가 맛본 '금강경'의 맛을 소개할까 한다. '금강경' 독송을 시작한 지 열흘쯤 지났을 때였다. 아침밥을 먹는데 부엌에서 퍽,하는 소리가 들렸다. 수도에 연결한 정수기가 터진 것이다. 만약 식구들이 모두 다 외출하고 없을 때 터졌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온 집안이 물바다가 됐을 것이다. 독송 13일째. 강남역에서 환승하기 위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던 중이었다. 중간쯤 내려왔는데 어디선가 두두두두 하는 소리가 났다. 무심코 뒤를 돌아봤더니 위쪽에서 큼지막한 여행용 가방이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맨 위에서 이제 막 에스컬레이터를 탄 사람이 가방 손잡이를 놓친 것이다. 다행히 내가 뒤를 돌아본 덕분에 몸을 옆으로 피해 큰 사고는 면했다. 집에 돌아와서 그 얘기를 하자 남편이 맞장구를 친다. 함께 '금강경'을 독송한 남편도 요즘 희한한 경험을 많이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논문을 쓰려고 1년 동안 찾아도 찾지 못했던 선행논문을 우연히 발견하는가 하면 만나는 사람마다 논문에 도움을 준다는 것이었다. 이게 모두 다 '금강경'독송의 공덕인 것 같다고 했다. 

 '금강경'을 보면 이 경전을 수지독송한 공덕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고 적혀 있다. 부처님은 과거에 한량없는 아승기겁 동안 팔백 사천 만억 나유타의 여러 부처님을 만나 모두 공양하고 받들어 섬기며 그냥 지나친 적이 없으셨다. 실로 상상이 어려운 공덕이다. 그러나 그 어마어마한 부처님의 공덕도 우리가 금강경을 수지독송한 공덕에는 감히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백에 하나에도 미치지 못하고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억에 하나에도 미치지 못한다. 아니 그 어떤 셈이나 비유로도 미치지 못한다. 그야말로 대박이다. 부처님께서는 '금강경' 수지독송의 공덕에 대해 자세히 말씀하신다면 그 말을 듣는 사람은 마음이 어지러워서 의심하고 믿지 못할 거라고 말씀하신다. 그만큼 '금강경' 의 뜻은 불가사의하고 과보 또한 불가사의하다. '금강경' 전체가 아니라도 상관없다. 다만 사구게(四句偈:경전의 사상을 집약해서 짧은 네 글귀로 읊은 게송)만이라도 수지독송한 공덕은 항하의 모래 수만큼의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를 가득 채워 보시하는 것보다 더 크다. 수미산만큼의 칠보 무더기를 가지고 보시하는 사람의 복보다 더 크다.

그런데 과연 이런 얘기를 듣고 사실이라고 믿을 만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수보리존자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더구나 부처님한테 직접 얘기를 듣는 것도 아니고 먼 훗날에 이런 얘기를 전해 듣는 사람은 과연 어떨까. 의심하지 않을까.

“세존이시여. 이와 같은 말씀을 듣고 진실한 믿음을 내는 중생들이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런 말 하지 마라. 여래가 열반에 든 오백년 뒤에도 계를 지니고 복덕을 닦는 이는 이런 말에 신심을 낼 수 있고 이것을 진실한 말로 여길 것이다. 이 사람은 한 부처님이나 두 부처님, 서너 다섯 부처님께 선근을 심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한량없는 부처님 처소에서 여러 가지 선근을 심었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잠깐이라도 청정한 믿음을 내는 자임을 알아야 한다.”

부처님이 어떤 분인가. 부처님은 ‘바른 말을 하는 이고(是眞語者), 참된 말을 하는 이며(實語者), 이치에 맞는 말을 하는 이고(如語者), 속임없이 말하는 이며(不?語者), 사실대로 말하는 이(不異語者)’가 아니던가. 이렇게 수지독송한 공덕이 크면 그 복도 바로바로 드러나야 한다. 그런데 '금강경'을 수지독송 했는데도 나쁜 일이 많이 생긴다면 어떨까. 갑자기 몸이 아프거나 다른 사람과 불화가 생기거나 사고를 당하게 된다면 왜 그럴까. '금강경' 수지 독송의 효험이 없는 걸까. 아니면 '금강경'이 특별히 맞지 않는 사람이 있는 걸까.

나 또한 '금강경'을 독송한 백일 내내 갖가지 병에 시달렸다. 20일쯤 지나서였다. 독송을 많이 한 탓인지 침을 삼킬 수 없을 정도로 목이 부었다. 이비인후과에 가서 감기약을 지어다 먹었는데 이번에는 약이 너무 독했던지 위경련이 일어나서 가슴을 쥐어뜯는 것 같았다. 다시 내과에 가서 약을 지어다 먹었다. 위경련이 진정될 쯤 해서 허리에 계란크기만한 염증이 생겼다. 절대로 염증이 생길 부위가 아닌데 벌겋게 부어오르면서 짓물렀다. 손도 못 댈 정도로 아프던 염증은 열흘 정도 지나자 저절로 나았다. 염증이 낫자 이번에는 눈에 다래끼가 났다. 일주일 정도 약을 먹자 겨우 가라앉았다. 그러나 결코 '금강경' 독송을 멈추지 않았다.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또한 수보리여. 이 경을 수지독송한 선남자 선여인이 남에게 천대와 멸시를 당한다면 이 사람이 전생에 지은 죄업으로는 악도에 떨어져야 마땅하겠지만, 금생에 다른 사람의 천대와 멸시를 받았기 때문에 전생의 죄업이 소멸되고 반드시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다.”

몸 아픈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동안 쌓인 업장이 소멸되고 내 몸의 세포가 바뀌면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생각된다. 그러지 않고서야 독송하는 내내 방안에서 향냄새가 나는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다. 그 향냄새는 내 몸에서도 나고 내가 입은 옷에서도 나고 심지어는 세탁기에 돌려 햇볕에 말린 옷에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향냄새의 근거를 나는 오늘 읽은 경전 내용에서 찾고자 한다.

“이 경전이 있는 곳은 어디든 지 모든 세상의 천신, 인간, 아수라들에게 공양을 받을 것이다. 이곳은 바로 탑이 되리니 모두가 공경하고 예배하고 돌면서 그곳에 여러 가지 꽃과 향을 뿌릴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러다보니 날마다 숙제하듯 독송하는 '금강경' 횟수를 확인할 때마다 마음이 넉넉해진다. 마치 다달이 늘어가는 적금통장을 보는 듯하다. 그러나 어찌 이런 공덕이 '금강경'독송에만 담겨 있겠는가. ‘법화경’에도 ‘화엄경’에도 ‘지장경’ ‘관음경’ ‘능엄경’ ‘아미타경’에도 모두 다 똑같이 들어 있는 것을. 중요한 것은 진실한 마음을 내어 부처님 말씀을 듣고 실천하려는 자세가 아닐까. 그 마음을 내는 것이 몸이 건강해지고 불화를 겪던 이웃이 이사 가고 뜻하지 않게 집이 생기고 아들이 시험에 합격하는 가피보다 더 큰 가피일 것이다.

조정육 sixgardn@hanmail.net

[1250호 / 2014년 6월 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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