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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눈빛과 소낙비

옛날 중국사람들은 심장 속에 우리마음이 들어있다고 생각했고 요즘에는 뇌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연구가 진행되고 있지만 마음은 심장에 있는 것도 아니고 뇌에 있는 것도 아니다. 시신이 되어버리면 심장도 달려있고 뇌도 매달려있건만 꼼짝안하고 병풍 뒤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말소리를 들어야 한다. 병풍 앞에서 향을 맡느냐 병풍 뒤에서 향을 맡느냐 하는 차이가 생사의 소식이기도 하다.

뇌를 통해서 온 몸을 통해서 작용을 하고 있는 마음이라는 대광명(大光明)은 예나 이제나 우리가 회복해야할 빛줄기임에 틀림없다. 이름이 졸(拙)이고 성씨가 장(張)인 장졸 수재(秀才)가 광명을 찾은 이야기가 있다.

번뇌 끊으려는 것 병 깊게 하고
새삼 깨달으려는 것도 삿된 것
소낙비 먹구름 함께 거두듯이
세간 인연 따르면 걸림이 없어

지방에서 시행되는 과거시험을 통과하고 중앙과거시험을 보기 위해서 서울에 올라온 사람을 수재(秀才)라고 부른다. 석산 큰스님을 만나서 정중하게 자신의 이름을 밝힌다. 큰스님께서 대뜸 심장의 핵을 찔러 들어가는 비수 같은 질문을 던진다.

“그대의 이름이 졸이라고. 여기에서는 교(巧)를 찾아도 끝내 찾을 수 없다. 그놈의 졸은 어디에서 왔느냐?”

노자에서는 대교약졸(大巧若拙)이라고 했다. 큰솜씨는 서툰듯하기도 하다는 뜻이다. 우주허공이 빚어놓은 예술품이 금강산이고 백두산이고 지리산이다. 어느 컴퓨터 전문가가 컴퓨터그래픽으로 한라산을 화면에 제작한다면 실제의 한라산보다 더 매끈하게 잘 뽑아낼 수 있을 것이다. 허나 우주허공의 큰솜씨를 어떻게 흉내라도 낼 수 있겠는가.

기계로 빚어내는 것이 교(巧 )라면 손으로 빚어내는 것이 졸(拙)이다. 그러나 큰스님이 뿜어내는 형형한 안광 속엔 교와 졸 둘 모두가 사라지고 없다. 장졸수재는 심장을 찔러 들어오는 비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큰스님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명을 알아차렸다. 그리고는 게송을 즉석에서 지어바쳤다.

光明寂照遍河沙 (광명적조변하사)
凡聖含靈共我家 (범성함령공아가)
一念不生全體現 (일념불생전체현)
六根纔動被雲遮 (육근재동피운차)
斷除煩惱重增病 (단제번뇌중증병)
趣向菩提亦是邪 (취향보리역시사)
隨順世緣無罣碍 (수순세연무가애)
生死涅盤等空花 (생사열반등공화)

그 빛줄기가 향하사 세계를 두루 꿰뚫어 비추니 / 범부와 성인이 모두 저와 한가족입니다 / 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으면 전체 모습이 환하게 나타나지만 / 육근이 움직였다하면 구름에 가리워집니다 / 번뇌를 끊으려는 것은 병을 더 깊게 하는 것이고 / 새삼 깨달으려는 것도 삿된 것입니다 / 세간의 인연을 따르면서도 걸림이 없으니 / 생사와 열반도 허공에 피어오른 헛꽃입니다.

월드컵 축구선수들 중에도 호흡이 맞는 선수끼리는 눈빛으로 축구를 한다. 멀리 떨어져 있는 선수끼리 눈빛이 일순 교화되면 한 선수는 빈 공간을 향해 달려가고 뒤에 있던 선수는 텅 빈 공간으로 공을 순식간에 보낸다. 축구만이 아니라 모든 스포츠 종목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말은 사실 한 마디도 길다. 지네보다 훨씬 길다. 그렇지만 시에 대한 감상도 써야하고 설명도 하고 있다. 자신이 하고 있는 말이 쓸데없이 긴 말임을 알고 말하면 불행 중 다행이다. 자신이 하는 말에 취하지 않을 수 있으면 다행 중 다행이다.

신문을 보면서 한 글자도 읽지 않는 독자를 혹 만날 수 있다면 그건 영광이다. 날이 무더워지면서 글쓰기가 더위 먹은 것 비슷하게 되어버렸다. 때때로 지나가는 한 줄기 소낙비가 하늘의 먹구름을 함께 데리고 가듯이 글자로 흘러내리는 소낙비를 쓰는 이나 읽는 사람 모두가 비 맞지 말고 먹구름만 걷어낼 일이다.

박상준 고전연구실 ‘뿌리와 꽃’ 원장 kibasan@hanmail.net
 

[1251호 / 2014년 7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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