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1. 일본 쇼무천황이 감진에게

“거센 바다 건너 이 나라에 오시니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대덕화상이시여, 멀리 거센 바다를 건너 이 나라에 오셔서 참으로 저의 마음이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깨우침 없이 짐이 이 도다이지(東大寺)를 세운지 어언 10여년이 지나 이제 계단(戒壇)을 세우고 계율을 받아 지니기를 원합니다. 또한 이제부터 계를 받고 율을 전하는 모든 일을 화상께 맡기겠습니다.”
 
▲ 일본 쇼무천황
일본 45대 천황 쇼무(聖武, 701~756)는 종종 사는 게 버거웠다. 모든 사람들이 떠받드는 절대 권력의 자리도 때때로 부질없어 보였다. 아버지 몬무천황(文武天皇)은 그가 7살 때 세상을 떠났다. 마음의 병이 깊었던 어머니 미야코도 떠나버려 얼굴조차 기억하기 힘들었다. 어리고 병약한 그를 대신해 처음엔 할머니가 대리 천황을 맡아 다스렸다. 할머니가 연로하자 이번에는 누나가 대리로 황위를 이었다.
 
쇼무가 천황에 즉위한 것은 24살 때였다. 그러나 기존 세력들의 견제로 황후 책봉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가장 격렬하게 반대하던 나가야왕이 사건에 휘말려 목숨을 끊은 뒤에야 후지와라 집안의 고묘코를 황후로 세울 수 있었다.

日 불교 수계체계 확립 절실
천황 명으로 당에 승려 파견
후쇼 등 감진에 일본행 간청
“불법 위해서라면…” 승낙
 
풍랑·밀고 등으로 5번 실패
제자 죽고 감진은 눈도 멀어
12년 시도 끝에 일본에 입국
율학 전수…의료·빈민사업도
 
끊이지 않는 자연재해와 역병, 권력투쟁과 알력 속에서 쇼무는 자연스럽게 불교로 기울어졌다. 불교가 중국의 선진문화를 대표하기도 했지만 관심을 가질수록 묘한 매력이 있었다. 불교는 고통이 먼지처럼 떠도는 사바세계에서 떨어난 나온 섬처럼 편안했다.
 
불교가 한반도를 거쳐 일본에 이른 지 150여년. 불교는 전역으로 급격히 확산됐다. 국가의 허락을 얻어 승려가 될 수 있도록 했지만 무허가 사도승(私度僧)은 늘어만 갔다. 불도를 이루려 출가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조세부담이나 생계 때문에 출가하는 이들이 급증했다. 사원이 늘수록 승가의 규율은 더욱 어지러워졌다. 국가의 법령으로 막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쇼무가 주목한 것이 계율이었다. 수계제도를 확립해 승려들이 자율적으로 정화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수계제도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통 율맥을 계승한 율사가 꼭 필요했다. 삼사칠증(三師七證)이라는 3명의 스승과 7명의 증명법사 없이 수계제도는 성립될 수 없었다. 당나라로 떠난 일본 승려들이 정식 수계를 받지 않아 홀대받는 일도 잦았다. 쇼무는 당에서 전계율사(傳戒律師)를 초청하기로 결심했다. 숙부인 도네리친왕(舍人親王)이 적극 도왔다. 이는 내부적으로 승풍을 확립하는 초석이었고 대외적으로는 국가의 위상을 높이는 중대한 프로젝트였다.
 
이 임무는 고후쿠지(興福寺)의 요에이(榮叡)와 다이안지(大安寺)의 후쇼(普照)에게 맡겨졌다. 733년 4월, 학승이었던 두 사람은 대륙으로 향하는 사절단의 배에 올랐다. 견당선(遣唐船)은 짧게는 몇 년 길게는 수십 년 만에 한번 있는 배로 언제 돌아올지 기약할 수 없는 고난의 항로였다.
 
요에이와 후쇼는 4개월의 항해 끝에 당나라에 도착했다. 낙양 대복선사에 머무르며 율법에 정통한 승려를 수소문했다. 그러나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마땅한 인물을 찾기 어려웠을 뿐더러 있더라도 완곡히 거절하고는 했다. 고국을 등지고 망망대해의 바닷길을 건너 낯선 나라에 간다는 것은 오로지 전법에 뜻을 두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3년 뒤 도선(道璿)이라는 승려가 두 사람의 요청을 받아들여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렇지만 학문이 깊지 않은데다가 승려수도 적어 수계의식을 완성할 수는 없었다.
 
요에이와 후쇼는 다시 시작했다. 장안의 대안국사와 숭복사에 머무르며 많은 승려들과 교유했다. 성과 없이 한해 한해가 지나갔고 그들의 시름도 깊어졌다. 도항(道航)을 만난 것은 당나라에 머문 지 9년째 되던 742년이었다. 요에이와 후쇼는 도항에게 일본 불교계에 전계율사가 꼭 필요하다는 점과 이를 간절히 바라는 일본 천황의 뜻을 전했다. 도항은 스승 감진(鑑眞, 688~763)에게 추천해달라고 요청할 것을 제안했다. 도항으로부터 감진이 어떤 인물인지 전해들은 그들은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고 확신했다.
 
▲ 당나라 감진화상좌상. 이 좌상은 감진의 생전에 제자들이 조성한 것으로 현재 일본 국보로 지정돼 있다.

감진은 양주(楊州)지역의 최고 고승이었다. 14살 때 불상을 보고 감동한 그는 얼마 뒤 대운사(大雲寺)로 출가했다. 20살 때 구족계를 받은 감진은 낙양과 장안을 오가며 율학과 천태학의 대가들로부터 불교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 26살 때 고향 대명사(大明寺)로 돌아와 계율을 가르치기 시작한 그는 곧 양주 지역을 대표하는 율사로 주목받았다. 경과 율에 정통한데다가 자비로운 성품의 감진에게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렇게 감진에게서 계를 받은 사람이 4만 명에 이르렀다.
 
감진은 율학 외에도 건축·조각·수학·의학에 대한 이해도 깊었다. 퇴락한 사찰을 수리하고 그곳에 불보살상을 조성했다. 그의 손을 거쳐 복원된 절이 무려 80여곳이었다. 감진은 양주지역에 불교의 거센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핵심 인물이었다.
 
요에이와 후쇼는 양주 대명사로 감진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 감진은 “천태지자의 스승이신 남악혜사께서 입적한 뒤 일본불교를 부흥시킨 쇼토쿠(聖德)태자로 태어나셨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반갑게 맞이했다. 그런 뒤 감진은 제자들을 불러 모아 누가 가겠냐고 물었다. 한참이 지나도록 누구도 선뜻 나서지 않았다. 감진이 말했다.
 
“불법을 위한 일이거늘 어찌 목숨을 아낄 것인가. 너희가 가지 않는다니 내가 직접 가겠다.”
 
스승의 비장한 선언 앞에 도항, 징관, 여혜, 상언, 도흥, 덕청, 사탁 등 제자들도 함께 갈 것을 맹세했다. 55살 감진의 모진 고난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 무렵 당나라는 민간인들이 나라 밖을 나가는 것은 철저히 법으로 금지했고, 이를 어기면 중벌에 처했다. 감진의 결심은 국법을 어기더라도 전법의 길을 가겠다는 천명이었다. 감진과 제자들은 도일(渡日) 계획에 착수했다. 그는 직접 나서서 배를 만들도록 지시하고 뱃사람을 고용했다. 743년 3월 모든 준비를 마쳤으나 절강성 일대에 해적들이 소란을 피우는 일이 발생해 배가 바다에 뜨지 못했다. 그때 제자 중 하나가 밀고해 배가 압수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첫 번째 일본행의 실패였다. 요에이와 후쇼는 크게 실망했다. 그러나 감진은 전법의 뜻을 꺾지 않았다.
 
얼마 후 감진 일행은 18명의 선원을 다시 고용하고 옥공, 화공, 조각가 등 기술자도 태워 12월 하순 출항했다. 배에는 모두 80여명이 탔고, 불상, 경전, 향로, 약품이 가득 실렸다. 그러나 바다는 그들을 순순히 보내주지 않았다. 폭풍을 만나 배가 부서진 것이다. 이를 수리해 한 달 뒤 떠났으나 절강 해역에서 암초에 부딪쳐 배는 침몰하고 목숨만 간신히 건질 수 있었다.
 
이듬해 봄 감진일행은 다시 일본행을 시도했다. 월주(越州)지역에서 감진에게 계율을 설하고 수계를 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을 때였다. 그곳에서 수계를 마치고 일본으로 떠날 준비를 하던 중 한 승려가 이를 눈치 채고 요에이와 후쇼를 관청해 고발했다. 후쇼는 피했지만 요에이는 붙잡혀 장안으로 압송되는 도중 겨우겨우 탈출했다. 세 번째 일본행도 실패로 돌아갔다.
 
감진은 방법을 바꾸었다. 그는 제자 한 명을 복주(福州)로 먼저 보내 식량과 배를 사놓도록 했다. 감진은 30여명의 제자들과 천태산으로 순례를 떠난다며 절강을 통해 복주로 향했다. 그곳에서 천태산을 순례한 감진 일행은 사찰을 다니며 배가 기다리는 복주로 향했다. 그런데 양주에 남아있기를 바라는 감진의 제자가 이를 막아달라는 상소문을 올려 모두 붙잡히고 말았다. 네 번째도 실패였다. 감진 일행은 용흥사로 보내졌다. 그들은 이제 요주의 인물이었다. 관청에서는 그들을 감시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요에이와 후쇼는 크게 절망했다. 한 없이 자비로운 고승 감진에게도 죄스러웠다. 745년 2월 두 사람은 감진에게 양주를 떠나겠다고 말했다. 감진은 그들에게 말했다.
 
“감시가 심하니 일단 그렇게 하시오. 허나 내가 일본에 가려는 마음은 변함이 없소.”
 
두 사람은 거처를 옮겼다. 3년이 지나자 관청의 감시도 느슨해졌다. 이들은 감진을 만나 다시 바다를 건널 준비에 들어갔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비밀스럽게 일을 진행해나갔다. 748년 6월26일 밤 그들은 양주의 바닷가에 모였다. 감진과 14명의 제자들, 선원과 기술자 등 모두 35명이었다. 일행은 신하(新河)에서 배를 띄워 동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바다에 나서자마자 큰 풍랑을 만났다. 이들은 해역을 표류하다 월주에 배를 정박시켰다. 다시 10월 바다로 향했다. 그런데 거대한 폭풍을 만나 배가 표류하면서 14일간 죽음과 사투를 벌여야 했다. 그들은 붙잡혀 다시 인근 사찰로 보내졌다. 다섯 번째도 실패였다. 나라에서는 감진이 떠나려는 것을 잘 알았지만 어쩌지는 못했다. 노구를 이끌고 일본에 가려는 것은 오로지 전법 때문임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감진이 가는 곳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계를 받겠다고 모여들었다. 그 대열에는 고위관리들도 많았다.
 
하지만 요에이와 후쇼는 달랐다. 그들은 이제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750년 초 건강이 급격히 나빠진 요에이가 시름시름 앓다가 마침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율사 초빙을 위해 17년간 불철주야 노력했던 요에이가 이역만리에서 숨을 거둔 것이다. 홀로 남은 후쇼의 충격도 컸다. 관청에 더 이상 쫓겨 다니느니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무렵 감진의 몸에도 이상이 왔다. 침침하던 눈이 피로가 겹치면서 아예 한치 앞도 보이지 않게 됐다. 어떤 약이나 치료도 소용없었다. 게다가 감진과 일본행을 다섯 번이나 시도했던 애제자 상언까지 병으로 죽고 말았다.
 
751년 감진은 양주로 돌아왔다. 감진은 실명했음에도 계를 주고, 사찰 전각을 수리했으며, 불상을 조성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동시에 어떻게 해야 일본으로 건너가겠다는 약속을 지킬 수 있을 지 고민했다.
 
753년, 일본에서 사절단이 도착했다. 꼭 20년 만이었다. 이들은 천황의 명에 따라 당 현종에게 감진과 제자들이 일본에 계를 전파할 수 있도록 정식 요청했다. 당 현종은 도교를 함께 선양하겠다면 그렇게 해도 좋다고 허락했다. 사절단은 양주로 감진을 찾아가 같이 떠나자고 간청했다. 감진은 흔쾌히 승낙했다.
 
753년 11월19일 감진은 여러 제자들과 견당선에 올랐다. 일본행 배를 기다리던 후쇼도 동승했다. 여섯 번째 시도였다. 파도는 이번에도 잠잠하지 않았다. 폭우와 격랑을 만나 표류를 거듭하던 끝에 구사일생으로 12월20일 규슈 남부의 아키메야우라에 도착했다. 여섯 번 도전 끝에 이룬 성공이었다. 항구에는 감진일행을 보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감진이 일본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황실에 전해졌다. 천황 쇼무는 감격했다. 65세의 노승이 5번의 실패하면서 포기하지 않고 이 땅에 법을 전하러 온 것이다. 쇼무는 칙사를 보내 자신의 마음을 전하도록 했다. 거센 바다를 건너 멀리서 이렇게 오셨으니 기쁘기 한량없다는 것과 불법을 전수하고 수계하는 일을 감진법사에게 일임한다는 내용이었다.
 
쇼무는 그동안 불교홍포를 위해 무진 애를 썼다. 743년 도다이지(東大寺)를 세우고 대불 조성에 혼신의 노력을 쏟았다. 70미터가 넘는 거대한 전각에 대불도 16미터가 넘고 무게만 300톤이나 됐다. 10년간 진행된 대작불사를 위해 시주한 이가 42만 명이 넘었고 기술자도 51만 명이 넘었다. 이를 위해 가장 애쓴 이는 백제 왕인의 후손이었던 승려 행기(行基, 668~749)였다. 평생 가난한 이들을 위해 자선사업을 벌였던 그가 있었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불사에 동참했다. 행기를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대승정(大僧正)에 추대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752년 4월9일 열린 대불 점안식에 행기는 참석할 수 없었다. 대불의 완성을 앞두고 입적했기 때문이다. 쇼무는 자신을 지탱해주던 큰 기둥이 무너져내리는 듯했다. 딸에게 천황의 자리를 양휘하고 ‘삼보(三寶)의 하인’이라 스스로 칭하며 출가해버린 것도 행기의 입적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런 쇼무에게 감진의 도래는 엄청난 희소식이었다. 새로 천황에 오른 딸 고켄도 아버지 태상천황의 마음을 이해했다. 고켄은 감진이 도다이지에 머물도록 했다. 이어 전등대법사(傳燈大法師)라는 칭호도 내렸다. 감진은 도다이지에 계단을 세웠다. 제자들로 삼사칠증을 구성해 승려들은 물론 천황과 황태자에게도 계를 주었다. 일본에 적법한 수계의식을 거친 승려들의 첫 배출이었다.
 
▲ 감진이 쇼소인에 불경 대여를 요청하는 내용으로 이 편지는 현재 쇼소인에 보관돼 있다. 기억력이 비상했던 감진은 실명을 했음에도 황실의 요청을 받아들여 불경의 오류를 바로 잡았다.

감진은 이 땅에 온 목적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감진은 일본승려들에게 계율과 천태학을 가르쳤다. 그가 당에서 가져온 ‘천태삼부경’을 비롯해 많은 불전들이 널리 필사됐다. 일본 율종은 물론 후에 사이초에 의해 천태종이 성립할 수 있는 기반을 다진 것이다. 감진은 눈이 멀었음에도 끊임없이 공부했다. 쇼무가 도다이지에 만든 황실 유물창고인 쇼소인(正倉院)에 편지를 써서 불경을 빌려 읽기도 했다.
 
“(쇼소인에) 기거하시는 스님들께 올립니다. 도체(道體) 편안하십시오. 사대부경(四大部經)을 받들어 청합니다. 화엄경(花嚴經) 1부, 대집경 1부, 대품경 1부, 그리고 화엄경(華嚴經) 1부도 읽고자 합니다. 3월18일 감진 올림”
 
어느 날에는 황실에서 감진에게 불경을 감수해달라는 요청을 했다. 현재 일본에 있는 불경들에 상당수 오류가 있다는 얘기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감진의 기억력은 비상했다. 제자들이 불경을 읽는 걸 들으며 잘못된 부분을 지적해 이를 모두 바로잡았다.
 
감진은 755년 11월 황실에서 하사받은 니다베친왕의 땅에 사찰을 지었다. 도쇼다이지(唐招提寺)라는 중국식 사찰이었다. 수많은 승려들이 이곳을 찾아 공부했다. 감진은 백성들에게 의학과 건축기술을 가르쳤고, 히덴인(悲田院)을 열어 가난과 질병을 구제하려 힘썼다. 도쇼다이지는 가장 영향력 있는 사찰로 떠올랐다.
 
그러나 쇼무가 죽고 준닌(淳仁)이 황위에 오르자 새로운 조칙이 선포됐다. 감진의 사원 관리를 중단시키는 명이었다. 일본 불교계의 노골적인 반발이 원인이었다. 감진은 이에 굴하지 않고 그들을 설득해가면서 계단설립을 추진해나갔다. 그 결과 761년 시모쓰케 지역의 야쿠시지(藥師寺)와 지쿠젠 지역의 간제온지(觀世音寺)에도 계단을 설립했다. 조정에서는 이곳에서 수계의식을 거치지 않으면 승적을 얻을 수 없도록 했다.
 
763년 감진의 건강은 갈수록 악화됐다. 제자들은 스승의 입적이 멀지 않았음을 알고 감진의 모습을 조각해 만들었다. 건칠에 채색을 입힌 80cm 높이의 좌상이었다. 오늘날 일본 국보로 지정된 ‘감진화상좌상(鑑眞和上坐像)’이 그것이다. 감진은 입적을 며칠 앞두고 이렇게 말했다.
 
“원컨대 내가 앉아서 죽음을 맞이할 수 있기를….”
 
마지막까지 육체의 고통에 꺾이지 않고 명료한 의식으로 죽음을 직시하겠다는 다짐이었다. 그해 5월6일 감진은 서쪽을 향해 단정히 앉아 입적했다. 그가 76살 되던 해였다. 감진의 일대기를 다룬 ‘동정전(東征傳)’에는 감진을 화장할 때 온 산에 그윽한 향기가 자욱했다고 전한다. 일본의 숱한 관료들과 문인들도 도쇼다이지를 찾아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5번의 실패를 겪고도 불굴의 의지로 전법의 원력을 성사시킨 감진. 그가 일본의 불교를 비롯해 문화, 건축, 의학, 미술 등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지금도 일본에서 감진이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꼽히는 이유다. 1963년에는 감진의 입적 1200주년을 기념해 중국과 일본에서 성대한 기념행사가 열렸으며, 1973년 감진이 머물던 양주 옛터에 도쇼다이지 금당을 본떠 기념관을 만들기도 했다. 13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감진은 중일 교류의 상징인 것이다.
천황 쇼무가 감진에게 보낸 글은 일본 최초의 불교문화사라는 ‘원형석서(元亨釋書)’ 등에 전한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1253호 / 2014년 7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 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