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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늑대와 춤을

기자명 정장진

순환하는 자연의 섭리를 파괴하는 인간의 탐욕을 직시하다

▲ 영화 ‘늑대와 춤을’은 오만한 문명을 꼬집고 있다. 광활한 대지를 아름답고 돌아갈 풍경으로 향수하면서도 파괴하는 인간들을 비판한다.

여러 방법으로 감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영화는 문학, 음악, 미술 등 다른 장르들과 함께 당당하게 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다.
 
해석해야 할 여러 층의 깊이를 간직하고 있는 영화는 문학, 음악, 미술 등 다른 예술 장르들이 섞여 들고 테크놀로지 영향을 거의 직접적으로 받기 때문에 자칫 표면에 가려져 있는 여러 깊이들이 제대로 감상되지 않을 가능성이 많다. 영화 이야기를 하면서 가장 어려운 것도 이 때문인데, 가령 1990년에 나온 케빈 코스트너의 ‘늑대와 춤을(Dances with Wolves, 1990)’ 이야기할 때 거의 처연하다고 해야 할 흔히 OST로 불리는 영화 음악은 도저히 글로 표현할 수 없게 된다.
 
인디언 영화란 생각은 착각
문명사적 침탈 고발도 아냐
언어=총=전쟁 폭력성 알려
 
존엄 자체로서 어머니 대지
인간에 의해 사라지는 자연
불교 자연관 되돌아보게 해
 
음악만이 아니다.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글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은 영화를 구성하는 문학이나 미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스토리 그 이상의 것, 스크린을 통해 눈으로 볼 수 있는 영상 그 이상을 이야기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한 편의 영화가 예술 작품이라는 이름값을 하는 것이라면 영화를 구성하는 개별 장르들의 경계를 넘어서면서 하나의 전체를 향해 나아가는 거의 무의식적인 움직임을 드러내 주어야 한다.
 
전체를 향해 나아가는 거의 무의식적인 움직임이란 무엇인가? 영화 자체에 무의식 같은 것은 없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과연 그럴까? 꼭 인간의 무의식이 아니라, 영화도 그것이 잘 만든 영화라면 살아있는 인간처럼 살아 움직이며 무의식을 발산하고 우리를 멀고 후미지고 음습한 지대로 이끈다.
‘늑대와 춤을’을 보자.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듯이 이 영화는 인디언에 대한 영화가 아니며 서세동점의 제국주의 시대에 서구 문명이 가한 문명사적 침탈을 고발하는 영화도 아니다. 이런 식의 감상은 일차적인 것일 뿐이다. ‘늑대와 춤을’은 영화라는 장르가 문화 전체에 대해 많은 시사점들을 던지는 영화다. 나아가 불교식으로 보면, 예기치 못했던 감동과 깨달음을 주기도 한다.
 
‘늑대와 춤을’은 우선 문화에서 언어와 기록이 지니는 중요성을 놀라운 방식으로 강조하고 있다. 인디언들은 기록을 하지 않는다. 반면 미육군 소속의 존 덴버 중위는 그날그날 일기를 작성하며 많은 삽화도 곁들여 놓는다. 영화가 후반부에 들어왔을 때 수우족 전체가 이동을 해야 하는데 그 때 덴버는 요새에 남겨두고 온 일기책을 가지러 갖다 오겠다고 한다. “내 일기장! 그 일기는 내 인생의 기록이야. 그걸 버리고 갈 수는 없어.” 말을 달려 도착한 덴버 중위는 기병대를 만나고 생사의 갈림길에 서고 만다. 얼핏 그 중요성에 비해 많은 이들이 간과하고 봤을 이 일기책이라는 소품은 영화 전체를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영화 제목이기도 한 ‘늑대와 춤을’을 비롯해 인디언들은 우리와도 전혀 다른 작명법을 쓴다. ‘두 개의 죽음’, ‘발로 차는 새’, ‘머리속의 바람’, ‘열 마리 곰’, ‘주먹 쥐고 일어서’, ‘헤픈 웃음’ 등 사람들의 이름이 모두 이런 식이다. 너무나도 시적이라는 인상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이름들 속에는 아버지의 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특이점이 발견된다. 이는 인디언 문화가 전혀 다른 문화적 기반에 서있다는 것을 일러준다. 인디언 문화는 기록을 남기지 않는 문화며 이 문자와 기록 부재 문화는 교육과 제도의 부재를 의미한다. 영화 속에 나타난 대로 해석을 하자면, 이 기록 부재의 인디언 문화는 사람들의 이름을 자연 속에서 구하는 데에서 나타나듯이 자연과 일체가 된 그들의 삶의 방식에서 나온다. 인디언들은 자연과 인간을 구분하지 않는 혹은 그 구별이 아주 희미한, 특이한 문화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자연과 일체’라는 말은 쉽게 해서는 안 될 말들 중 하나다. 현대인들에게 자연과 일체라는 말은 순간적인 정서적 반응을 지칭하거나 많이 듣던 느낌이 배제된 표현이기 쉽다. 인디언의 경우는 그러나 결코 순간적이지도 않고 남의 말도 아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인디언들의 언어는 바람 소리라고 말할 수 있다. 모르긴 몰라도 가을을 인디언들은 ‘바람에 떨어지는 잎사귀’라고 칭했을 것이다.
영화를 이런 식으로 보면, 하나의 멋진 풍경화로 영화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광활한 미 서부 평원은 인디언들에게는 언제나 그 자리에 그 모습 그대로 있을 불변하는 그 무엇이었다.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며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는 평원은 그래서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신성한 그 무엇이었다. 인디언들은 극히 적은 수의 어휘만을 구사한다. 그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상징적 의미의 아버지도 존재하지 않는다. 매일 대하는 거친 자연이지만 그 자연은 단순한 인디언의 언어만큼이나 단순하고 시간도 정지된 자연인 것이다.
 
이 땅에 총이 들어 온 것이다. 신성한 들소들은 총을 든 서구인들에게는 사냥이라는 놀이의 대상이 되어 살육당하고 사람도 살육당한다. 영화는 늑대가 죽는 날 늑대와의 춤도 끝났음을 암시한다. 인디언들도 총을 들고 싸운다. 이것은 이웃의 다른 인디언 부족으로부터 겨울 양식과 아녀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인디언 부족 전체의 비극이다. 이제 인디언은 끝난 것이다. 활과 창을 버리고 총을 드는 순간 인디언은 끝난 것이다. “헤아리기 힘들 정도의 백인들이 몰려 올 것이다.”
 
영화에서 총은 언어와 어떤 관련을 지닐 것인가? 총은 상징으로서 대포와 미사일까지를 의미할 수 있다. 정교한 장치로서 총은 하나의 언어다. 총을 제작하기 위해 필요한 설계도, 총포의 활용으로 인해 바뀐 전술과 전략 그리고 무엇보다 총을 통해 얻게 된 지배와 확장의 문명사….
 
아버지의 성을 물려받지 못한 인디언 문명은 자연이라는 어머니의 품 안에서 돌고 도는 자족적인 문명이었다. 따라서 이 영화를 보면서 서부의 광활한 평원이 만들어 내는 풍경에 도취되어서는 안 된다.
 
이 도취는 현대인의 관점에서 본 결과이며, 영화를 한 측면에서만 즐기도록 할 것이다. 인디언들에게는 풍경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이 신적인 세계와 단선적으로 연결되는 문화가 인디언 문화인 것이다. 풍경은 서술과 묘사를 통해 자연을 감상하고 나아가 이용할 수 있었던 고도화된 문명 세계의 자연관이다.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돌아가고 싶은 이상향으로서 자연이 대두되면서 풍경이 등장하는 것이다. 광활한 평원을 풍경으로 보는 것은 인디언들에게는 자연이 아버지를 대신하는 존엄 그 자체로서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는 점을 놓치게 한다.
 
늑대와 춤을 출 수 있는 곳, 결코 장난으로 들소들을 죽일 수 없는 곳, 그런 곳이 자연이다. 바람 소리를 듣고 물이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그 소리에 맞추어 이동하던 인디언들은 이제 사라졌다. 탄생도 죽음도 자연의 순리 그 자체로 수용되던 문화가 사라진 것이다. 영화 ‘늑대와 춤을’은 분명 미국 문명이 사라진 인디언 문화에 대한 반성문이자 진지한 사과문으로 읽힐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식의 독법 속에는 얼마든지 미국을 옹호할 수 있는 논리가 숨겨져 있다. 글과 기록 위에 서있는 문명은 모두 미국식 문명이기 때문이다.
 
영화 ‘늑대와 춤을’을 불교식으로 봐야 할 필요성이 여기에 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소리 속에서, 물 위에서 흔들이는 연꽃 속에서 그리고 나이 어린 동자의 눈망울 속에서 시작도 하지 않은 번뇌를 볼 수 있는 이는 늑대와 춤을 출 수 있을 것이다. 존 덴버 중위는 탈영 했다. 그러나 그는 소속 부대만을 떠난 것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국가 전체를 떠났다. 나아가 문명을 떠난 것이다. 그는 잠시지만 문명 밖으로 출가를 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얼마나 많은 종교들이 이 문명과 문화를 떠나려고 하면서 이단으로 흘러가버렸는지 우린 잘 알고 있다.
 
덴버 중위는 인디언들과 어울리다 요새로 돌아온 어느 날 밤, 마당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마치 인디언들처럼 불 주위를 빙빙 돌며 야릇한 춤을 춘다. 괴성도 지른다. 그러나 이 춤과 괴성은 그를 인디언으로 만들어 주지 못한다. 그럴 수가 없었다. 미국은 그리고 전쟁과 문명은 덴버 중위가 늑대와 춤을 출 수 없게 한다. 늑대는 죽었다. 총에 맞아서. 덴버 중위 역시 백인 여인을 데리고 인디언들과 헤어져 어디론가 떠난다. “13년 후 수우족은 항복했다”는 엔딩 메시지가 없어도 우린 인디언들의 운명을 잘 알고 있다.
불교는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이 거대하고 지속적인 상징의 문화사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죽어서도 남는 아버지의 이름, 아니 죽어야만 지속되는 이 이름의 끝없는 연쇄를 불교에서는 어떻게 해석하는가? 석가세존이신 부처님은 아버지인가, 아니면 어머니인가? 우리의 이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의 명칭들인가? 명칭 없이 존재는 가능한 것인가?
 
불교는 들판에 부는 바람, 그 들판을 달리는 수만 마리의 들소 떼를 어떻게 해석하는가? 영화 ‘늑대와 춤을’ 불교식으로 본다면 어떤 해석이 가능할 것인가? 불교는 총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가? ‘늑대와 춤을’은 이렇게 해서 다시 봐야 할 영화다.
 
오늘날 전쟁은 대포와 총이, 이어 핵과 미사일과 무인기가 도입되면서 완전히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총으로 싸우는 시대가 오자 인디언 전체는 사라지고 말았다. 늑대도 사라지고 늑대와의 춤도 사라진다. 이제 무엇이 사라질 차례일까? 불교는 이 질문에 답을 해야만 한다. 마음을 다루는 종교라고 반은 진실이고 반은 핑계인 말 뒤로 숨어서는 안 된다.
 
전쟁은 인간을 죽이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자연을 죽인다. 인간을 자연 앞에 일대일의 대결자로 맞서게 하는 것이 전쟁이다. 총을 사용하는 전쟁이 시작되면서 그리고 핵과 무인 로봇을 사용하는 전쟁이 시작되면서 이제 삶과 죽음을 순리로 받아들이던 자연은 사라지고 말았다.
 
정장진 문화사가 jjj1956@korea.ac.kr

[1253호 / 2014년 7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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