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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이인문, ‘대택아회’

기자명 조정육

어떤 보물보다 값진 유산은 부처님 가르침

“장자는 바로 그 거지가 자신의 아들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법화경

50년 만에 만난 아들에게
전 재산 물려주려는 장자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는
부처님 수기, 비유로 표현
 
▲ 이인문, ‘대택아회’, 종이에 연한 색, 38.1×59.1cm, 국립중앙박물관.

“유산이요? 저한테요?”
 
변호사 사무실에서 연락이 왔다. 먼 친척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내 앞으로 남겨둔 유산이 있으니 와서 확인하라는 내용이었다. 세상에…. 살다 보니 별 일이 다 있네. 이게 꿈은 아니겠지.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득달같이 달려갔다. 사실이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할머니가 물려준 땅은 한강변에 있었다. 부자들만 사는 요지 중의 요지였다. 진짜 내꺼 맞아? 서류를 보면서도 믿기지가 않았다. 그동안 전셋집을 전전하며 살아온 시간들이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행여 전세금을 더 올려 달라고 하면 어쩌나 노심초사했던 기억이 생생했다. 이제 다시는 과거처럼 살지 않아도 된다. 나도 이제 부자다. 대박이다.
 
‘대택아회(大宅雅會)’는 고송유수관도인(古松流水館道人) 이인문(李寅文:1745-1824이후)의 작품이다. 지난번에 살펴 본 ‘연정수업’과 함께 ‘고송유수첩(古松流水帖)’에 들어있다. 대택(大宅)은 큰 집이다. 아회(雅會)는 아취 있는 모임이다. 그러니 대택아회(大宅雅會)는 큰 집에서의 아취 있는 모임이란 뜻이겠다. 어떤 모임이 아취 있는 모임일까. 살펴보자. 듬직한 바위를 배경으로 단층 누각이 서 있다. 석축 위에 세워진 누각은 팔작지붕이다. 우람하다. 누각 안에는 지필묵(紙筆墨)이 놓인 널찍한 탁자를 사이에 두고 여섯 명의 선비가 앉아 있다. 그들 뒤에는 여섯 명의 시중꾼들이 서서 행사 진행을 돕는다.
 
지필묵은 오늘의 모임이 아회임을 암시한다. 아회는 글을 짓거나 그림을 그리기 위해 만나는 풍아로운 모임을 일컫는다. 소주를 마시거나 삼겹살을 구워먹기 위한 모임에는 붙일 수 없다. 격조 있는 모임에만 사용가능한 용어다. ‘대택아회’는, 아회가 어떠해야 하는 지를 교과서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오늘 모인 선비들은 하루 종일 시를 짓고 자신들의 시를 번갈아가면서 낭송할 것이다. 가끔씩 흥이 일어나면 거문고를 뜯는 선비도 있으리라. 조선 후기에는 이런 아회가 곳곳에서 자주 열렸다. 고아한 모임에 차가 빠질 수 없는 법. 시흥에 취한 손님들을 위해 앞쪽 별채 마당에서 동자가 열심히 화로에 부채질을 하고 있다. 불땀이 센 화로 위에서 주전자가 달그락거린다. 찻물이 알맞게 식으면 동자는 곁에 놓인 찻잔에 따뜻한 차를 부어 누각으로 향할 것이다.
 
마당에서 놀고 있는 두 쌍의 사슴과 학은 이곳이 아회가 열리는 운치 있는 공간임을 의미한다. 사슴과 학은 십장생(十長生)에 속한다. 장수와 영생의 상징이다. 사슴의 출현은 좋은 일이 생길 것을 예시한다. 학은 천 년 이상을 사는 신비스러운 새로 인식됐다. 학은 새의 무리에서 멀리 떨어져 홀로 외진 곳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은둔하는 현자(賢者)에 비유됐다. 아회를 그린 많은 그림에 습관적으로 학을 그려 넣은 이유는 그 모임이 시끌벅적한 시정잡배들의 유흥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대택아회’의 모임도 그러하다. 사슴과 학이 있는 마당에서는 세 명의 아이들이 놀고 있다. 이 아이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아녀자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을 보면 오늘의 아회가 부부동반모임은 아니다. 그렇다고 아회에 참여한 남정네들이 아이들을 데려올 리 만무하다. 추정컨대 이 집 주인의 아이들일 것이다. 누각 오른쪽으로 아담한 집 한 채가 보인다. 누각이 세워진 장소가 살림하는 안채 곁임을 알 수 있다.
 
다른 추정도 가능하다. 아이들은 아회라는 그림 주제와 특별한 관련성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럼에도 굳이 그림 속에 아이들을 그려 넣은 이유는 상징성 때문이다. 화려한 건물을 배경으로 멋진 정원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은 상서로움의 표현이다. 복록(福祿)과 장수(長壽)와 다자(多子)의 상징이다. 수많은 아이들이 대궐 같은 건물 앞에서 천진난만하게 놀고 있는 모습은 ‘백자도(百子圖)’라는 제목으로 그려져 손이 귀한 집 안방을 장식했다. 그러니 ‘대택아회’가 열리는 이 집에 아이들이 있는 지 없는 지 그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아이들은 그려질 수 있다. 노는 아이들은 차 끓이는 아이와 나이가 비슷하다. 물론 신분에서 차이가 크게 나는 만큼 그들이 받는 대우는 비교할 수가 없을 것이다. 신분사회에서는 아이라도 전부 귀한 아이가 아니다.
 
별채에 앉아 차 끓이는 동자를 바라보는 선비는 누구일까. 주인이라기보다는 겸인(?人)으로 추정된다.
주인은 언제나 손님과 함께 있는 법. 안주인도 아닌데 바깥주인이 손님 치다꺼리하느라 주방을 왔다갔다하며 동분서주할 리 만무하다. 이 밖에도 건물 안팎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눈에 띈다. 석축 아래서, 솟을대문 앞에서, 망루 같은 누각위에서 서 있거나 앉아 있는 사람들이다. 모두 아회에 참석한 그들의 주인들을 모시고 온 사람들이다. 길옆에는 손수레가 보이고 나룻배도 한 척 정박해있다. 오늘 모임을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수고가 곁들여있는 지 확인할 수 있다. 어디 그뿐인가. 양반들의 풍류와 상관없이 논에서 쟁기질하는 농사꾼의 노동은 어떠한가.
 
삶의 현장에서 저만큼 물러 나 있는 아회 장소에는 솟을대문 앞뒤로 소나무가 세 그루 서 있다. 오랜 세월이 느껴지는 소나무다. 이인문은 이인상(李麟祥:1710-1760)과 더불어 조선 소나무를 가장 잘 그린 화가다. 그의 대표작인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 ‘송계한담도(松溪閑談圖’ ‘누각아집도(樓閣雅集圖)’ 등에도 잘 생긴 소나무가 등장한다. ‘대택아회’의 구도는 ‘연정수업’과 마찬가지로 오른쪽에 무게중심이 쏠려 있고 왼쪽이 가볍다. 오른쪽은 복잡하고 왼쪽은 단순하다. 오른쪽은 꽉 들어차 있어 여유가 부족한 반면 왼쪽은 걸림이 없어 시원하고 넉넉하다. 오른쪽의 들썩거림은 왼쪽의 고요함이 눌러준다. 왼쪽의 밋밋함은 오른쪽의 아기자기한 이야기로 분위기가 살아난다. 상반된 두 세계가 만나 조화로운 세상을 만들었다. 조화로운 세상을 보여주기 위해 이인문은 화가의 재주를 적절히 사용했다. 담장과 석축과 계단은 대각선으로 배치해 깊이감을 느끼게 했다. 위에서 밑으로 내려다본 조감도법은 사람들의 행동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게 했다. 잘 그린 작품이다. 나도 저런 곳에 초대를 받아 차 마시고 시를 지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워낙 탐나는 그림이다보니 슬그머니 그림 속 주인공들이 부러워진다. 나도 이참에 물려받은 땅을 이인문이 그린 그림 속의 대택처럼 꾸며볼까. 생각만 해도 행복하다.
 
수보리, 가전연, 가섭, 목련 등 부처님의 제자들은 부처님으로부터 ‘성문승(聲聞乘)과 연각승(緣覺乘)도 모두 성불할 수 있다’는 수기를 받았다. 성문승(聲聞乘)과 연각승(緣覺乘)은 보살승(菩薩乘)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열한 탈 것(乘), 즉 저열한 교법(敎法)에 의지해 성도(聖道)를 향해가는 수행자를 뜻한다. 즉 자신만의 깨달음과 열반의 증득에만 치중하여 보살승이 실천하는 자리(自利)와 이타(利他)행을 상대적으로 가볍게 여기는 수행자들이다. 보살은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을 실천해야 한다. 위로는 보리(깨달음)를 구하는 동시에,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 보살의 역할이다. 그런데 성문 연각은 보살심이 부족하다. 그 때문에 대승불교에서는 성문 연각승의 2승(二乘)을 소승(小乘)이라고 폄하한다. 나 혼자 깨달음을 성취하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나 혼자 부처가 된다한들 곁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고통에 빠져 있다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래서 대승불교에서는 성문 연각의 상구보리만으로는 아라한의 경지, '아공(我空)의 이치는 완전히 깨달은 성자'는 될 수 있어도 '아공과 법공을 모두 깨달은 성자'인 부처는 영원히 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수행자라면 깨달음 못지않게 하화중생하는 6바라밀의 실천이 그만큼 중요하다.
 
그런데 부처님이 성문 연각승도 보살승과 마찬가지로 언젠가는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수기를 내려주셨다. 어이 아니 기쁘겠는가. 제자들은 그 기쁨을 환희로운 마음으로 부처님께 고백했다.
 
“저희들도 성불할 수 있다는 희유한 법을 듣고 보니, 매우 다행스런 일이며 큰 이익을 얻어 한량없는 보배를 얻은 기분입니다. 저절로 얻은 보배와 같은 것으로써 저희들이 이런 내용을 비유로 말해보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오늘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내용은 이렇다. 한 장자가 자식을 잃어버린 지 50년이 되었다. 장자는 자신이 죽으면 재산을 물려줄 아들이 없어 걱정했다. 그런 어느 날 아들이 거지가 되어 유랑하던 중 장자의 집 앞을 지나갔다. 장자는 바로 그 거지가 자신의 아들임을 한눈에 알아봤다. 장자는 당장 뛰쳐나가 ‘네가 나의 아들이다’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아들이 그 소리를 듣고 놀라서 달아날까 염려돼 멀리서 기웃거리며 바라봤다. 장자는 하인을 유랑자의 모습으로 변장시켜 아들을 잘 타일러 집에 데려오도록 했다. 장자는 아들에게 거름치는 허름한 일을 시키면서 차츰차츰 아들과 친해지게 됐다. 장자는 아들을 양자로 삼고 재산을 주었지만, 아들은 ‘저는 천생이 거지입니다. 받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며 자신을 천하게만 여겼다. 세월이 흘러 장자가 죽을 때가 되었음을 알고 친척, 국왕, 식구들을 모아놓고 그간의 사정을 말한 뒤, 자신의 모든 재산을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아들은 비로소 장자가 자신의 친아버지이며, 재산이 바로 자신의 것임을 받아들이고 기뻐했다.
 
‘법화경’에 나오는 내용이다. 여기서 장자는 바로 부처님이고, 거지 아들은 모든 중생이며, 모든 재산이란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수기를 말한다. 부처님은 항상 중생을 ‘나의 아들’이라고 부르고 계신다.
 
변호사 사무실에서 전화가 와서 먼 친척할머니가 유산을 물려주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나의 상상이다. 이인문의 ‘대택아회’를 보고 나서 나도 이런 멋진 저택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을 발전시켜 본 것이다. 과대망상증 환자라고 흉보지 마시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많은 소설과 영화에 백마 타고 온 왕자님을 기다리는 이야기가 등장한 것을 보면 나와 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닌 것 같다. 성경 내용을 소재로 그린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도 ‘법화경’의 내용과 유사하다. 이런 상상을 신데렐라증후군이라고 비난한다. 비난해도 할 수 없다. 사실이니까.
 
그런데 ‘법화경’의 이야기는 우리의 상식을 완전히 뒤바꿔놓는다. 거지 아들이 물려받은 재산이 한강변 땅이 아니라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수기’란다. 유산이라고 하면 동산과 부동산만 생각한 우리의 고정관념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순간이다. 거지 아들이 우리 중생이라면 우리는 이미 거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것이 아닌가. 삶을 변화시키고 인생을 의미 있게 해주는 부처님의 가르침이야말로 진짜 유산이라는 생각을 왜 하지 못했을까. 이래서 경전은 끊임없이 읽어야 한다. 보물이 보물인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고려청자도 개 밥그릇밖에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혹시 우리도 거지 아들처럼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1254호 / 2014년 7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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