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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몽환공화(夢幻空華)

기자명 혜국 스님

“꿈속 허깨비는 현실속 망상 일어나고 지는 것과 같다”

▲ 소림사 대웅전, 달마 대사의 수행도량답게 부처님을 보좌하고 있는 달마 대사의 모습이 이채롭다.

“미생적란(迷生寂亂)이요 오무호오(悟無好惡)이니라”, “미혹(迷惑)하면 어지러움과 고요함이 생기고 깨달으면 좋음과 미움이 없거니”라고 하셨습니다.
 
미(迷)했다는 말은 깨달음에 미(迷)했다는 말입니다. 미(迷)한 게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눈을 뜨지 못했다는 겁니다. 눈을 뜨지 못하면 캄캄할 수밖에 없고 눈을 뜨면 환하게 마련입니다. 눈만 뜨면 어두움 즉, 미(迷)함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했다면 이미 양변(兩邊)에 떨어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미(迷)함만 없는 게 아니라 깨달음도 없을 때 바른 깨달음이니까요. 어두움이니 밝음이니 분별하는 ‘놈’은 누구며 이렇게 아는 이는 누구냐는 얘기입니다. 이 몸이 분별하는 게 아니요, 그렇다고 허공이 보고 듣는 게 아닌데 역력하게 보고 듣고 하지 않습니까? 고요하다, 어지럽다고 느끼는 그 자리나 좋다, 나쁘다고 느끼는 자리나 같은 자리 즉, 그 이름이 자리이거든요. 어지러움을 싫어하고 고요함을 좋아하는 그 생각이 남아 있는 동안은 분명한 깨달음을 성취하기가 어렵습니다. 결국 생각에 놀아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참선(參禪) 문(門)에서는 좋다, 나쁘다, 미혹했다, 깨달았다 하는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 본래 주인자리를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무엇이냐?” 하고 이것을 줄여서 “이뭣꼬?” 이렇게 참구(參究)합니다. “부모님 몸에서 나기 이전 참나는 누구인가?”하고 참구하는건데 여기서도 자칫 속기가 쉬습니다. 왜냐하면 ‘참나’라고 하면 나라고 하는 실체가 따로 있는 걸로 알기 때문입니다. 조사 스님들께서 ‘참나’라고 하는 나는 연기공성(緣起空性)으로서의 나, 제법무아(諸法無我)로서의 나인데 다시 말해서 있는 내가 아니고 없는 나를 말함입니다. 그런데 이를 잘못 듣는 이들은 ‘나’라고 하는 실체가 있는 것처럼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생멸(生滅)이 없는 도리, 제법무아(諸法無我) 연기공성(緣起空性) 인데 뭔가 있다는 전도몽상(顚倒夢想)에 빠지는 결과가 됩니다. 우리는 있다 아니면 없다 둘 중에 하나라야만 되는 걸로 잘못알고 있습니다. 양변(兩邊)에 떨어져서 사는 삶에 익숙해진 거죠. 그런 까닭에 옳다, 그르다 하는 흑백논리에 빠져드는 겁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벗어나는 길이 중도연기(中道緣起)인데 연기공성에 대해서 아무리 설명한다고 하더라도 공(空)은 설명할수록 그르치게 됩니다.
 
부처님 세계가 100% 광명이면
지옥세계는 100% ‘암흑’ 의미

불교에서 보는 극락과 지옥은
이것이다 정해져 있는게 아니라
지옥이 광명세계 될 수도 있고
극락이 지옥세계 될 수도 있어

인간세계는 광명 50% 암흑 50%
광명세계 향해 부지런히 수행해
광명 기운이 70%로 올라간다면
암흑은 30%로 줄어드니 ‘극락’
 
공(空)이란 체험이 중요합니다. 부디 체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일체이변(一切二邊)은 양유짐작(良由斟酌)이로다”, “모든 상대적인 두 견해는 자못 짐작하기 때문이로다”라는 의미입니다.
 
꿈을 꾸고 있는 동안 꿈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왜냐하면 “꿈이냐, 꿈이 아니냐”로 나누어져 있으니까요. 꿈이라고 하면 밤에 잘 때 꾸는 꿈만 꿈이 아닙니다. 마음을 깨닫지 못하고 감정에 끄달려 다니는 일, 이것 또한 꿈인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상대적인 견해에 빠져 살다보니 새해니 묵은 해니 나누게 되고 너니 나니 분별하게 됩니다. 우리나라 절에서는 아침, 저녁으로 예불 모실 때 반야심경을 독송합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생(生)하는 일도 없고 멸(滅)하는 일도 없다는 겁니다. 추상적인 얘기가 아니고 사실이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오온(五蘊)이 공(空)하기 때문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우리가 대나무 바구니를 들고 바다로 가봅시다. 바구니를 바닷물 속에 집어넣으면 내 바구니든지 다른 사람 바구니든지 꼭 같은 바닷물이 가득 들어옵니다. 이 때 각자 자기 바구니 입장에서 보면 분명히 바닷물이 들어왔으니 생(生) 즉, 태어난 게 맞습니다. 그리고 각자 바구니를 들어 올리면 바닷물이 흔적도 없이 빠져 나갑니다. 멸(滅)이 맞거든요. 바구니 가득 들어왔던 바닷물이 없어졌으니 죽음이 맞는 것 같지만 바닷물 입장에서 보면 생(生)한 일도 없고 멸(滅)한 일도 없습니다. 대나무 바구니에 물이 가득 들어왔다고 할 때도 들어온 일이 없이 바닷물은 그 자리 그대로였고 빠져 나갔다고 할 때 역시 그대로이니 불생불멸(不生不滅)입니다. 이와 같습니다. 우리 몸이라는 바구니에 영혼이 들어왔느니 나갔느니 하는 일이 이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볼 때 우리가 한평생 살아가면서 얻었다느니, 잃었다느니, 태어났다느니, 죽었다느니 모두가 꿈속에서 착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달리기 경주를 할때 보면 제일 먼저 들어오는 선수를 일등이라고 합니다. 우리 입장이 아니고 대지(大地)의 입장에서 보면 일등과 꼴등은 따로 없습니다. 지구위에 있는 존재 자체일 뿐입니다. 우리가 왼손에 들고 있는 물건을 오른손에 옮겨 들었다고 해서 내 입장에서 보면 전혀 달라지는 게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토끼와 거북이의 달리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를 토끼가 충분히 일등할 수가 있었는데 한잠 자는 바람에 거북이한테 졌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우리 인간들 입장에서만 그렇게 생각할겁니다. 대지(大地) 즉, 지구입장에서 보면 일등이던 꼴등이던 운동에너지가 있었을 뿐 달라진 게 없습니다. 만일 운동에너지 활동량에서 판단한다면 아마도 토끼의 운동량보다 거북이의 운동량이 훨씬 더 많을 겁니다. 당연히 뒤에 들어왔다고 해도 일등이라고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양변(兩邊)을 떠난 중도(中道)의 입장에서 보면 일등이니 꼴등이니 자체가 없습니다. 거북이 에너지나 토끼의 에너지나 같은 에너지이기 때문입니다. 너니 나니 분별하기 이전 이름까지 끊어진 중도연기(中道緣起)에서 볼것 같으면 삶이란 그냥 그대로 참으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래서 신심명에서는 상대적인 견해란 깨어있는 현재가 되지못하고 생각에 끌려 다니는 짐작 때문이라고 가르쳐 주시는 겁니다.
 
“몽환공화(夢幻空華)로 하로파착(何勞把捉)가”, “꿈속의 허깨비와 헛꽃을 어찌 애써 잡으려 하는가”라고 이어집니다.
 
‘금강경’에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이라고 하는 사구게(四句偈)가 바로 이 의미입니다. 유위법(有爲法)이란 모양있는 세계만이 아니라 생각이 있는 세계는 모두 유위법입니다. 우리 생각이라는 게 잠깐도 쉬지 않고 이 생각에서 저 생각으로, 저 생각에서 이 생각으로 금방 좋았다가 금방 우울해졌다가 쉼 없이 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꿈속에 본 헛꽃이나 생각 일어나고 없어지는 허깨비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꿈속에서 무엇을 보았던지 잠에서 깨고 나면 없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모르고 꿈속 일까지, 꿈에 얽매어 사는 이들도 없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돼지꿈을 꾸었답니다. 동네 아는 삼촌이 있어서 “삼촌, 제가 어제 저녁 돼지꿈을 꾸었는데요”하니 “어 자네 오늘 잘 얻어먹겠는걸”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 당시만 해도 배를 곯으며 살 때라 어디에서 잘 얻어먹을까 했는데 웬걸 동네 어른이 크게 성공한 분이 있어서 회갑잔치를 하느라고 온 동네 사람들이 실컷 먹도록 잔치를 차렸다는 겁니다. 이 사람이 “아! 돼지꿈만 꾸면 매일 이렇게 잘 얻어먹겠구나” 싶어서 오늘 저녁도 꼭 돼지꿈을 꿔야지 했는데 돼지꿈을 못 꾸었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헛일 삼아서 “삼촌, 오늘 또 돼지꿈을 꾸었는데요”하니 “어 오늘은 좋은 옷 얻어 입겠는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고 집에 왔는데 회갑잔치한 집에서 시골동네라서 크지 않기 때문에 온 동네 사람들에게 옷을 한 벌씩 돌렸다는 겁니다.
“와 꾸지도 않은 돼지꿈이 딱딱 맞는구나! 이제부터는 맨날 돼지꿈만 꿨다고 해야지.”
 
그래서 그날 저녁에도 돼지꿈을 안 꿨는데 삼촌한데 가서 “오늘도 또 돼지꿈을 꿨어요” 하니 “어, 오늘 되게 두드려 맞겠는데”라는 겁니다. 그 말을 듣고 나오는데 회갑잔치 집에서 술을 잔뜩 먹고 나오는 건달이 있거든요. 그래 “어이쿠, 정말 저 사람한테 맞을라나 보다”하며 얼른 골목길로 숨었는데 그걸 보고 그 건달이 쫓아오더니 그 건달이 “야, 이놈아. 왜 나를 보고 피해?”하면서 신나게 두들겨 패는 겁니다. 실컷 맞고 나서 다시 삼촌을 찾아갔습니다.
 
“삼촌! 사실은 첫날 저녁만 돼지꿈을 꿨지 뒷날하고 또 뒷날은 꾸지도 않은 꿈이 왜 그렇게 꼭꼭 맞아요?”하니 삼촌이 하는 말이 “응, 그거 별거 아니야. 돼지가 처음 꿀꿀대면 배가 고파서 그러는가 하고 먹을 것을 주고, 그거 얻어먹는 꿈이여. 또 꿀꿀대면 자리가 질어서 그렇구나하고 볏짚을 넣어주니, 그거 옷 얻어 입는 꿈이야. 그래도 꿀꿀대면 들고 패야지 별수 있는가”라고 설명을 해줍니다.
 
바로 이겁니다. 모든 것은 우리 생각의 환영에 속고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불교에서는 세계관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게 됩니다. 부처님 세계 즉, 해탈(解脫)의 세계, 지옥(地獄)세계, 인간(人間)세계 이렇게 셋으로요. 부처님세계가 100% 광명(光明)세계라면 지옥은 100% 암흑세계입니다. 그런데 불교에서 보는 극락과 지옥은 정해져 있는 게 아니고 지옥의 암흑세계가 극락의 광명세계로 될 수도 있고 광명세계인 극락이 암흑세계인 지옥세계로 될 수도 있습니다. 인간세계는 광명 50%, 암흑 50%인데 광명을 향하여 부지런히 수행하면 광명기운이 70%로 올라간다면 암흑은 30%로 줄어드니 바로 극락이 되는 것이요, 반대로 게으르고 나태하여 흑색기운인 암흑기운이 90%로 올라가면 광명기운은 10%로 줄어들게 되니 결국 극락도 지옥이 된다는 겁니다. 마음 따라 변하니 몽환(夢幻)과 공화(空華)인 겁니다. 몽환과 공화이니 꿈속에서 꿈을 잡는 거와 같다는 가르침입니다. 부디 몽환, 공화에서 벗어나 보십시다. 크게 용맹 정진(勇猛精進)해 볼 일입니다.

[1254호 / 2014년 7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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