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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사종 스님의 새아버지

기자명 성재헌

칼 앞에 목 내민 무명 스님을 아버지 삼다

▲ 일러스트=이승윤

아무나 스승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남에게 이끌리지 않고 남들을 이끌기 위해서는, 남들이 가지지 못한 빼어난 식견과 설득력을 갖춘 말솜씨와 모범이 되는 아름다운 행실이 확고한 습관으로 익어져야만 한다. 하지만 빼어난 능력과 재주를 이미 갖춘 자가 있다고 해도 혼자만의 힘으로는 그 역량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다. 즉 스승다운 자가 스승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이들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스승다운 자를 스승노릇 할 수 있도록 돕는 자, 그들은 천하에 널린 햇살처럼 의외로 평범하고 무 토막 하나 제대로 자르지 못하는 칼집처럼 의외로 무능한 사람들이다.

북송 말기, 요를 정벌한 북방의 금나라가 국경을 넘어 송나라로 쳐들어왔다. 온 나라가 전란의 불길에 휩싸였고, 승속을 가리지 않는 무자비한 약탈과 살육이 천지에 횡횡하였다. 결국 왕족은 물론 백성들까지 도성을 버린 채 남하하였고, 스님들도 그 대열에 합류하였다. 그 무렵 장로사(長蘆寺)에서 있었던 일이다.
 
대부분의 스님들은 금나라가 쳐들어왔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곧바로 보따리를 쌓다. 그래도 절을 지키겠다고 남아있던 스님들도 들판 끝에서 붉은 먼지가 날리고 피 뭍은 함성이 들리자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결국 그 커다란 장로사에는 세 분의 스님만 남게 되었으니, 한 사람은 혜휘(慧暉), 한 사람은 사종(嗣宗), 또 한 사람은 회계를 맡아보던 이름 모를 스님이었다.
 
마을을 불태우는 메케한 연기가 산문까지 흘러드는데도 혜휘와 사종 두 스님은 태연히 법당에 앉아 좌선을 하고 있었다. 회계를 보던 스님이 마당과 법당으로 종종걸음을 치며 발을 굴리다가 문간에서 고함을 쳤다. “스님, 오랑캐가 아랫마을까지 쳐들어왔습니다.”
 
그래도 꿈쩍 않자 좌선하던 두 스님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이러다 다 죽습니다.”
 
어깨가 들썩이도록 잡아 흔들자 그제야 혜휘 스님이 얼굴을 돌렸다. 회계를 보던 스님의 눈동자와 목소리가 공포에 떨고 있었다. 혜휘가 타이르듯 말했다.
 
“스님, 왜 아직도 떠나지 않으셨습니까? 저희는 괜찮습니다. 스님이나 어서 몸을 피하십시오.”
 
회계를 보던 스님은 두 스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스님, 고집부리지 마시고 제발 제 말 좀 들으세요. 저들은 불법은커녕 인륜도 모르는 도살자들입니다. 저런 놈들에게 개죽음을 당하려고 이러십니까?”
 
혜휘는 미소를 지으며 회계를 보던 스님의 손을 잡았다. “마음 써주신 것은 참 고맙습니다. 하지만 스님,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참선이란 본래 생사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한 평생 참선했다는 사람이 죽음이 두려워 절집을 버리고 줄행랑을 쳐서야 되겠습니까?”
 
회계를 보던 스님은 눈물로 애원하였다.
 
“이렇게 허망하게 죽어버리면 스님들이 그 동안 온갖 신고 마다하지 않고 불법을 배운 보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스님들께서야 이미 생사에 자재하시겠지요. 하지만 스님 같은 분들이 사라지면 전란에 신음하며 공포에 떠는 저 많은 백성들을 도대체 누가 위로한단 말입니까? 저 많은 중생들을 누가 열반의 언덕으로 이끈단 말입니까?”
 
애원하는 스님의 등을 혜휘가 토닥였다.
 
“말씀은 참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몸까지 허약합니다. 지금 피난을 간다 해도 도중에서 잡힐 것입니다. 그러니 저는 부처님 전에서 편안히 죽게 해주시고, 사종 스님이 데리고 얼른 피하십시오.”
 
곧이어 말발굽 소리가 산문까지 들이닥치고, 광기를 발산하는 괴성이 숲을 울렸다. 상황이 다급해지자 그 스님은 혜휘를 포기하고 곁에 있던 사종을 일으켜 세웠다. 사종 스님 역시도 손을 뿌리치며 다시 자리에 앉으려 들었다. 그러자 힘이 장사였던 그 스님은 사종의 허리를 잡아 불끈 들쳐 업고 광을 향해 달렸다. 광의 문을 닫고 볏단 뒤에 숨자마자 마당에서 고함소리가 들렸다. “샅샅이 뒤져라. 돈이 될 만한 것은 하나도 빠짐없이 챙치고, 복종하지 않는 놈은 죽여라.”
 
벌떼처럼 달려들어 절집을 쑥대밭으로 만들던 금나라 군사들이 법당에 태연히 앉아있는 혜휘를 발견하였다.
 
“당장 나와 무릎을 꿇어라!”
 
호통과 협박에도 혜휘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군사들은 그런 혜휘를 비웃으며 활쏘기 시합을 하듯 마당에 서서 차례차례 화살을 쏘았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화살이 모두 빗나갔고, 마지막 한 발만이 혜휘의 소맷자락을 뚫고 궤짝에 박혔다. 그래도 혜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화가 난 대장이 칼을 뽑아들고 법당으로 들어서려던 차에 한 병사가 고함을 쳤다.
 
“여기 두 놈이 더 있습니다.”
 
군사들이 두 스님을 광에서 끌어내 마당에다 무릎을 꿇렸다. 회계를 보던 스님은 군사들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살려 달라 애원하였다. 하지만 사종은 곧 다리를 바로 하여 가부좌를 틀고 태연하게 눈을 감아버렸다. 그 모습에 더욱 화가 난 대장이 뽑아든 칼을 높이 들고 법당에서 뛰어내려 왔다. 사종을 향해 시퍼런 칼날을 휘두르려던 순간, 회계를 보던 스님이 두 팔을 벌리고 막아섰다. “차라리 저를 죽이십시오. 이 스님만큼은 제발 살려주십시오.”
 
목숨을 대신 내놓겠다며 애원하는 모습에 대장도 분이 삭았다. 대장이 칼을 내리고 물었다. “저 사람과 어떤 관계냐? 네 형제라도 되느냐?”
 
“아무 관계도 없는 분입니다.”
 
“아무 관계도 없는데 대신 목숨을 내놓겠단 건가?”
 
“저는 사판승입니다. 평생 절집에서 살림이나 살면서 참선이라고는 해보지도 못한 놈입니다. 그러니 저 같은 놈은 수백 번 죽는다 해도 안타까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 두 스님은 다릅니다. 이분들은 오랫동안 참선을 해 완전히 깨치신 분들입니다. 훗날 큰 선지식이 되어 세상에 나가 중생을 제도하실 귀한 분들입니다. 그러니 제발 저를 대신 죽여주십시오.”
 
눈물어린 그의 호소에 감동한 대장은 칼을 칼집에 거두었다. “이 스님들을 풀어주어라.”
 
그리고 큰 소리로 명령하였다. “이만하면 됐다. 당장 멈추고 마을로 돌아간다.”
 
훗날 천동 정각(天童正覺)선사 회상에서 깨달음의 깊이를 더한 사종선사는 선권사(善權寺) 취암사(翠巖寺) 설두산(雪竇山) 등지에서 크게 교화를 펼쳤고, 회계를 보던 이름 모를 그 스님 역시 항상 사종 스님 휘하에 머물렀다. 그리고 사종선사는 사람들에게 그 스님을 소개할 때마다 “저를 다시 낳아주신 아버지이십니다” 하고 소개하였다.
 

[1254호 / 2014년 7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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