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법충 스님의 물레방아
28. 법충 스님의 물레방아
  • 성재헌
  • 승인 2014.07.28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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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레방아에서 물이 아래로 흐름을 깨닫다
▲ 일러스트=이승윤

진리를 설파하고, 진리에 부합하는 삶으로 이끄는 이를 스승이라 한다. 하지만 진리라 여기는 바가 부류에 따라 제각각이니, 스승이라 여기는 바 또한 집단에 따라 각각이라 하겠다. 부처님 가르침에서는 무엇을 진리라 하는가? 만법의 실상을 밝힌 인연법을 진리라 하고,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의 삼법인을 진리라 하고, 고집멸도의 사성제를 진리라 한다. 또한 대승에서는 이를 몽땅 하나로 뭉그러뜨려 공(空)으로 제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한 가지 고려할 바가 있다. 부처님께서 진리라 밝히신 것이 정말 만물의 실상이라면, 부처님의 말씀을 빌리지 않더라도 만물은 본래 그러해야만 한다. 즉 진리는 누군가의 설명에 선행하는 것이지, 누군가의 설명에 기반하여 구축된 이론이 아니라는 것이다. 적어도 불교에서는 그렇게 본다.
이를 인정한다면 여러 선지식은 물론 부처님과 조사들까지도 몽땅 전달자의 위치로 전락하고 만다. 그들은 재미난 이야기꾼이고, 친절한 안내자이고, 살가운 길동무일 뿐이지, 진리의 소유자도 진리 그 자체도 아니다. 도리어 그들이 최고의 가치로 제시하고, 밝히고자 하고, 이끌고자 하는 진리는 도리어 몽땅 만물의 특성으로 귀속된다. 우주 공간 어디에고 빈틈없이 꽉 들어찬 것이 만물이고, 과거 현재 미래에 한시도 없었던 적이 없는 게 만물이니, 진리는 곧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 항상하고 보편한 것이 된다. 즉 항상 어디에나 진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진리를 모를까? 다만 모를 뿐이다. ‘법화경’의 비유처럼 가난뱅이가 천하에 둘도 없는 귀한 보배구슬이 자기 주머니에 있다는 것을 모를 뿐이고, 다이아몬드 원석을 공깃돌로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만약 스스로 알아차리는 눈치 빠른 자가 있다면 이보다 좋을 수 없다. 그런 이에게는 스승의 친절한 가르침도 군더더기에 쓸데없는 잔소리일 뿐이고, 스승이란 자들에게 세상이 부여하는 특별한 권위도 양머리를 걸고 개고기를 파는 악덕업주의 허울 좋은 간판으로 보인다. 법충 스님이 그런 분이었다.
법충(法忠) 스님은 열아홉에 경전시험을 통과해 구족계를 받고, 천태교학을 익혀 일심삼관(一心三觀)의 이치를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이 깨달은 진리의 가부를 확인받기 위해 유명한 고승들을 두루 찾아다녔다. 그러던 그의 발길이 용문사(龍門寺)에 이르렀을 때였다. 정중히 예를 갖춘 법충은 불안 청원(佛眼淸遠)선사께 자신이 깨달은 바를 소상히 말씀드렸다. 불안선사는 곧 고개를 돌려버렸다.
 
“뭘 좀 안 놈인가 했더니, 아무 것도 모르는 놈이었군.”
 
당황스러웠다. 물러난 법충은 불안선사 회하에 발우를 풀고 참구에 참구를 거듭하였다. 아무리 돌이켜 봐도 자신이 깨달은 바에 허물이 없고, 스님께 드린 말씀에도 허술한 구석이 없었다. 게다가 스님이 하시는 법문 또한 자신이 깨달은 바와 크게 상치되지 않는 말씀들이었다. 그런데도 방장실만 찾아가면 돌아오는 답은 매 한가지였다.
 
“자넨 아직 몰라!”
 
법충은 의심에 사로잡혔다.
 
‘나는 모르고 스님은 알고 있는 것이 도대체 뭘까?’
 
밥을 먹을 때도, 참선을 할 때도, 법문을 들을 때도, 오고 갈 때도, 잠자리에 들 때도 그 생각이 놓아지질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우두커니 방앗간에 앉아 물레방아가 빙빙 돌아가는 것을 보다가 마음의 핵심을 크게 깨달았다. 그는 손뼉을 치면서 그 자리에서 게송 한 수를 읊었다.
 
큰 법륜이 도네
바로 눈앞에서
뭐가 그거냐고
물은 밀고 돌이 갈지
 
그날 저녁, 법충은 방장실로 찾아가 그 게송을 적은 종이를 내밀었다. 게송을 읽어본 불안선사가 종이를 휙 던져버렸다.
 
“그래, 너는 물레방아를 어떻게 돌릴 거냐?”
 
스승으로부터 처음 제대로 질문을 받았다. 법충은 절을 올리고 말씀드렸다.
 
“개울 아래로 물은 늘 흐릅니다.”
 
눈을 감고 선상에 기대 한참을 묵묵히 있던 불안선사가 허리를 곧추세우며 말씀하셨다.
 
“내가 누구에게도 하지 못한 최후의 한 마디가 있다. 그걸 이제 너에게 일러주마.”
 
그러자 법충이 귀를 막고 나가버렸다. 곧장 용문사를 떠난 법충은 산천을 떠돌면서 헤진 옷에 머리도 깎지 않고 뱀과 호랑이를 이웃해 몇 년의 세월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봄날에 황룡사(黃龍寺) 사심(死心)선사의 명성을 듣고 그를 찾아갔다. 하지만 이미 황룡사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여기저기서 찾아온 스님들과 함께 인사를 올리고 입방을 청하자, 사심선사가 말씀하셨다.
 
“이번 결제는 인원이 너무 많아 더 이상 납자를 받을 수 없습니다. 며칠 쉬었다 가십시오.”
 
가파른 봉우리처럼 준엄한 풍모와 호랑이처럼 빛나는 눈빛에 누구도 입을 떼지 못했다. 그때 법충 스님이 앞으로 나섰다.
 
“사찰은 사방승물(四方僧物)이고, 결제에 동참하길 청하면 거절하지 않는 것이 총림의 법규입니다. 스님이 누구라고 감히 부처님과 총림의 법규를 깹니까?”
 
곧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법충은 객실로 내려와 게송 한 수를 지었다. 그리고 그 게송을 승당 벽에다 붙였다.
 
미친 중이 사심을 욕한다고 괴이타 마오
사심의 여름결제 총림의 법규 깨뜨렸네
총림의 눈 밝은 납자들이여, 제 말이 미덥거든
이 말을 꼭 전해 고금에 퍼트려 주시오
 
그 게송을 보고도 사심은 눈도 꿈쩍 않았다. 떼란 말도, 미안하단 말도, 방해하지 말고 가란 말도, 여장을 풀고 머물라는 말도 일절 하지 않았다. 산천을 떠돌던 이름 없는 한 납자와 천하에 명성이 자자한 한 선지식의 팽팽한 대립으로 온 황룡사가 웅성거렸다. 그리고 며칠 후였다. 초저녁에 법충이 하얀 목검을 들고 사심선사의 방문을 쾅하고 열어젖혔다. 그리고는 온 절집이 들썩이도록 고함을 쳤다.
 
“노스님은 생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사실입니까!”
 
사심선사가 대답하려는 순간, 법충이 곧바로 목검을 휘둘렀다. 윙하는 소리와 함께 목검이 사심선사의 코끝을 스쳤다. 그러자 사심선사가 빙그레 웃으며 목을 길게 내밀었다. 그 미소를 본 법충은 목검을 땅에 팽개치더니 훨훨 춤을 추면서 방장실을 나왔다.
 
그렇게 용문사를 떠난 법충은 또다시 산천을 떠돌다 풍제천(馮濟川)의 주청으로 승업사(勝業寺)에서 후학을 교화하였다.
 
 
[1255호 / 2014년 7월 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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