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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여래 사후관

인간으로서의 부처가 진리의 부처로 확장

▲ 그림=김승연 화백

부처님의 설법방식 가운데에 무기(無記)라는 것이 있다. 무기는 제자들의 형이상학적 질문에 직접적인 답변을 하지 않고 침묵으로 대하는 방법이다. ‘독전(毒箭)의 비유경’에는 부처님 제자 마륭까풋타 이야기가 나온다. 마륭까풋타는 부처님을 찾아와 세계의 영원성에 대한 문제를 비롯해 몇 가지 형이상학적 문제를 질문했다. 마륭까풋타의 질문에 부처님은 침묵한다. 의와 법에 상응하지 않고 지혜와 깨달음과 열반에 아무런 이익을 주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그리고 대신 수행에 힘쓰라고 당부했다. 여기서 마륭까풋타의 질문 중 부처님의 사후에 관한 내용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마륭까풋타는 여러 질문 중 하나로 여래는 사후에 존재 하는지,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지,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지,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하지 않기도 하는지를 물었다. 이에 관해 부처님은 역시 침묵으로 일관했다. 부처님 사후존재 여부를 묻는 장면은 ‘비유경’ 외에 ‘께마경’ ‘아누라다경’ 등에도 나온다. 이들 경전에서도 부처님은 일관되게 부처님의 사후에 관해 파악하려는 행위는 바람직하지 못한 태도라고 비판한다.

부처님 사후 묻는 질문에도
초기불교는 침묵으로 일관


대승은 생멸 떠난 법신불로
형이상학 질문에 해답 제시

부처님은 괴로움의 발생과 괴로움의 소멸에 관한 것만 언급할 뿐이라고 가르친다. 특히 초기경전에서는 부처님의 사후문제에 관해 직접적인 답변을 얻어 내는 모습을 찾기 어렵다. 그럼에도 부처님의 사후에 관해 질문하는 모습이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보면 사람들이 부처님 사후에 대해 많은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상식적으로 사람들이 부처님 사후존재 여부에 호기심에 갖는 것은 당연하다. 아마도 사람들은 부처님이 사후에도 영원히 존재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리고 부처님으로부터 확답을 받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초기경전에 따르면 부처님은 사후에 확정적으로 존재하는 분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부처님은 오온(五蘊)의 결박을 끊었으며 미래의 생존으로 이어지는 갈애와 업을 제거했다. 따라서 세상 어디에도 다시 태어나거나 존재하는 일은 없다. 만약 어떤 형태로든 세상에 존재한다면 부처님은 윤회를 벗어나지 못한 중생에 불과하다. 초기불교에서는 부처님이 이룬 해탈의 의미를 다음 생에 몸을 받지 않는 경지로 본다. 단멸은 아닐지라도 존재의 지속성은 종식된다는 의미다. 초기불교 수행자들이 목표로 삼고 있는 아라한은 다음 생에 윤회의 태중에 들지 않는 경지다. 이러한 사후관으로 보면 부처님과 중생의 관계는 부처님의 입멸과 동시에 사라지고 만다. 부처님은 더 이상 세상에 영향을 미치거나 교류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이 중생을 교화하고 또 복전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기간은 몸을 지닌 채 세상에 머물러 있을 때만 가능하다. 초기경전 어디를 보아도 부처님이 사후에 중생들을 위해 남아 있거나 활동한다는 내용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대승불교의 고민은 시작된다. 대승불교는 초기불교의 부처님 모습만으로 중생들을 교화하기에 한계가 있음을 직시했다. 중생은 허무하고 나약한 존재다. 이러한 중생에게 필요한 것은 완벽성과 영원성을 지닌 부처님이다. 몸을 버렸다 할지라도 죽지 않는 존재가 되어 항상 중생들에게 감응하며 복전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절대적 생명을 지닌 구원의 부처님을 원하는 것이다.
 
이에 대승불교는 무기(無記)에 해당하는 부처님의 사후관은 한계가 있다고 보고 육신의 유무에 관계없이 항상 존재하는 부처님을 설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사고나 필요에서 나온 것이 아닌 고차원의 수행을 통해 확인됐다. 대승불교에서 부처님은 법신과 화신으로 나뉜다. 법신은 제법의 연기성을 불격화 시킨 것으로 법계에 두루하며 부처님이 세상에 오시건 오시지 않건 상주하는 몸이다. 법신의 측면에서 보면 석가모니 부처님은 법신이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화신의 몸으로 왔기 때문에 나고 죽음이 있다. 하지만 생멸을 떠난 중도의 몸인 법신은 법계에 항상 머물러 있기 때문에 육신의 유무에 따른 제약을 받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불신이 외도들이 말하는 의미의 상주와는 다르다. 대승불교에서 설하는 불신은 인도 전통 종교에서 말하는 브라만이나 크리슈나처럼 실체가 있으면서 영원한 것과는 다르다. 대승불교의 불신은 단상(斷常) 이변과 유무(有無) 극단을 초월한 중도의 묘한 몸으로 법계에 상주한다. 어찌됐든 모호하기만 했던 부처님의 사후문제에 대해 대승불교는 확실한 답을 내놓고 있는 셈이다. 대승경전의 실교(實敎)라 칭하는 ‘법화경’은 사후의 부처님에 대해 더욱 명료하게 밝히고 있다. ‘법화경’은 여래의 수명을 영원한 것으로 설하고 있으며 부처님의 태어남과 죽음은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 나타난 방편으로 실제에 있어서는 완전한 소멸에 드는 법이 없다고 가르친다. 심지어 이 경에서는 과거의 모든 부처님은 하나의 진실한 법신이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나툰 것으로 서로 별개의 존재들이 아님을 밝힌다. 부처님이 입멸하는 원리도 부처님은 신통의 능력으로 몸을 지닌 채 세상에 오래 머물 수 있지만 중생들이 부처님에 대해 갈앙심을 일으키도록 하기 위해 몸을 버리는 형식을 취했다고 말한다. 법신은 항상 청정하여 생멸을 떠났지만 다만 중생들을 제도하고자 방편으로 삶과 죽음의 모습을 보였다고 설하는 것이 대승불교의 부처님 사후관이다. 대승불교는 초기불교의 애매하고 부정적인 여래의 사후관을 이렇게 바꾸어 놓았다. 가끔 불자들은 타 종교인들로부터 부처는 어디에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받게 된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미 죽어서 화장을 시켰는데 어디에 태어났느냐는 것이다. 이런 물음에 대해 많은 불자들은 당혹해 하는 경우가 있다. 마음에 있다고 답해야 할지 극락세계에 머물러 있다고 해야 할지 우주에 두루 존재하고 있다고 해야 할지 곤란하다. 만약 초기불교의 무기 방식으로 여래의 사후존재 여부를 설명한다면 불교는 저들에게 비웃음을 살수도 있다. 일단은 대승불교의 논리대로 법신과 화신으로 불신을 설명하고 부처님의 사후존재 여부를 밝힌다면 무리가 따르지 않는다. 현재 한국불교의 신앙형태에 우려가 되는 것은 부처님에 대한 존재감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부처님을 하나의 위대한 인격체로만 알뿐 생사를 벗어난 영원한 몸임을 알지 못한다. 인간 부처와 진리의 부처를 구분하지 못하고 부처님을 사람으로만 취급하려는 데에서 나온 결과이다.
 
이제열 법림법회 법사 yoomalee@hanmail.net
 
[1255호 / 2014년 7월 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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