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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울진 천축산 불영사

기자명 김택근

불영계곡에 드리운 부처님 그림자 따라 전설 만들어지니

▲ 천년고찰로 수많은 설화가 스며있는 불영사는 현재 아름다운 내일을 위한 불사가 한창이다. 국제명상원 건립 등 창조적 변형을 통해 전통사찰의 창조적 계승을 이어가겠다는 발원이다.

봉화에서 울진으로 가는, 천축산 숲 사이를 헤쳐나간 36번 국도는 구불구불하다. 폭염 아래서도 푸른 숲이 싱그럽다. 발아래 펼쳐져 있는 불영계곡은 깊고 길다. 안내판을 따라 조심스럽게 36번 국도를 벗어나니 이내 비구니 사찰 불영사(주지 일운 스님) 일주문이 나타났다.
 
의상대사가 동해로 가던 길에
계곡에서 오색 서기 피어올라
연못의 아홉 마리 용 쫓아내자
부처님 형상 그림자 드리워져
구룡사서 불영사로 바꿔 불려

묘엄 스님 맏상좌 일운 스님
어른스님 추천으로 인연 맺어
대웅보전 복원에 시주 잇달아
이후 20년 넘게 복원불사 진행

감사의 마음 담은 음식 나누고자
불영사 사찰음식축제 탄생시켜
참가인원, 해마다 폭발적 증가
산사음악회·청소년백일장 개최도

일반인들 치유공간 명상원 불사
1200평 규모에 지상 3층 건물
“한국불교 미래의 자산 될 것”
 
일주문을 지나 금강송의 안내를 받으며 한참을 걷다보면 불영사(佛影寺)가 보인다. 입구에 거대한 느티나무 두 그루가 장엄하다. 경내에 들어서자 온통 밭이다. 고구마, 감자, 상추, 고추, 옥수수, 아욱, 깻잎 등이 실하고 풋풋하다. 채소들은 그대로 녹색 숨결이며 불영사의 호흡이었다. 어떤 성물보다 귀하게 여겨졌다. 창건설화가 담겨있는 불영지(佛影池)는 어리연꽃으로 덮여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대웅보전(보물 제1201호)이 서 있다.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도 여름(1993년 7월)에 불영사에 들러 글을 남겼으니 선생의 감탄의 말로 대웅전 모습을 그려보겠다.
 
▲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은 “대웅보전이 참으로 아담하고 깨끗하다. 연꽃무늬 그림은 시스티나 성당보다 더 아름답다”는 감탄의 글을 남겼다.

“몇번 불에 타버려 이조 때 다시 지었다는 불영사의 대웅전은 참으로 아담하고 깨끗했다. 못 하나 안 들이고 나무만으로 얽어 짠 오밀조밀한 보꾹에 연꽃무늬의 그림이 조화롭게 그려져 있었다. 시스티나 성당이나 베드로 성당의 천정화보다 더 아름답다. 누가 보꾹을 만들고 누가 그림을 그렸는지 이름도 모르는 목수와 화가가 그린 솜씨라 생각하니 더 값어치가 있어보였다.” (‘우리들의 하느님’에서)
 
불영사는 신라 651년(진덕여왕 5년)에 의상대사가 세웠고, 이에 대한 창건설화가 전해진다. 대사가 동해 쪽으로 가고 있는데 문득 계곡에서 오색의 서기(瑞氣)가 피어올랐다. 다가가 살펴본즉 연못 안에 아홉 마리의 용이 살고 있었다. 대사가 가랑잎에 ‘火’자를 써서 연못에 던졌더니 갑자기 물이 끓어올라 용들이 견디지 못하고 도망쳤다. 대사가 그 자리에 절을 짓고 구룡사라 했다. 그런데 독룡들이 살던 연못에 부처님 형상의 바위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서쪽 산등성이에 있는 부처바위가 비쳤기 때문이다. 그러자 사람들은 구룡사를 불영사(佛影寺)로 바꿔 불렀다.
 
천년고찰이기에 설화 또한 많이 스며있다. 하나만 풀어보자.
 
조선 초기 울진 현령이 되어 임지로 내려가던 ‘백극재’가 갑자기 병에 걸려 죽었다. 부인은 남편의 죽음이 믿기지 않았다. 도저히 남편을 그냥 보낼 수 없었다. 부인은 시신을 불영사로 옮기고 남편의 극락왕생을 축원했다. 사흘 밤낮을 꿇어앉아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다 설핏 잠이 들었는데 산발한 혼백이 나타나 소리쳤다.
 
“십세(十歲)에 맺힌 원한을 풀라.”
 
부인이 이상히 여겨 관을 열어보니 남편이 살아나 숨을 쉬고 있었다. 부부는 다시 살아났다는 뜻의 ‘환생전’을 세우고 경배했다. 이 같은 이야기는 이문영, 김창흡 같은 학자들이 기록하고 있어 단순한 설화로만 보기 어렵다.
 
불영사는 불에 약했다. 창건 이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쳤다. 1396년(태조 5년)에 나한전만 빼고 모두 소실된 것을 이듬해에 소설(小雪)이 중건했다. 임진왜란 때는 영산전만 남고 모두 전소된 것을 1609년에 성원(性元)이, 1721년에는 천옥(天玉)이 중건했다. 그리고 이후 심산유곡에 있던 불영사는 점차 쇠락해갔다.
 
▲ 일운 스님은 물을 찾는 것을 시작으로 스무 개가 넘는 전각을 새로 짓거나 보수하는 등 복원불사를 진행해왔다.

비구니 일운 스님이 불영사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91년의 일이다. 스님은 비구니계의 거목이었던 묘엄 큰스님의 맏상좌였다. 청도 운문사에 출가하여 묘엄 스님의 제자가 되었다. 율과 경을 가르치던 묘엄 스님이 자신의 참선(禪) 공부를 위해 권속 30여명과 운문사를 나올 때, 일운 스님도 스승을 따라 나섰다. 그 후 묘엄 스님과 그 일행이 봉녕사를 대가람으로 일굴 때까지 현장에서 스승을 섬겼다.
 
1980년대 불교계가 한창 정화운동을 할 시기에 일운 스님은 정화운동을 바라보다가 진정한 정화는 수행자 개개인 자신의 깨달음과 그리고 그 주변의 정화임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잠시 봉녕사와 스님을 떠나기로 마음을 정했다. 일운 스님은 1980년도 중반에 대만으로 유학길에 오른다. 그곳에서 불학연구소 석사과정을 3~4년 동안 수학하고, 그 다음해 스님은 대만 제자 7명을 데리고 1991년 한국에 돌아와서 봉녕사에서 국내 처음으로 봉행한 5백 제승(濟僧)법회를 실질적으로 주관했다. 그 후 문중 어른 스님들의 추천으로 불영사에 주석하게 되었다.
 
불영사 계곡에는 맑은 물이 흘렀지만 정작 불영사에는 먹을 물이 부족했다. 첫 번째 한 일은 물을 찾는 일이었다. 그 이후로 불사를 하나씩 하기 시작했다. 우선 야영장을 철거하고, 일주문을 세우고, 대웅보전을 복원하여 보물로 지정하고, 후불탱화도 보물로 지정되었다.
 
대웅보전을 복원할 때는 처사 한 사람이 열성적으로 도움을 주었다. 절 식구들이 모두 감동할 정도였다. 그 소식을 듣고 조계총림 방장인 보성 큰스님이 축봉(竺峰)이란 법명을 내려주셨다. 보성 큰스님은 불영사 불사에 관심이 크셨다. 그런데 대웅보전을 해체하면서 나온 상량문을 살펴보니 중창을 주도했던 스님 중에 축봉 스님이 있었다. 300년의 시차를 두고 똑같은 ‘축봉’이 불사를 주도한 셈이었다.
 
대웅보전을 복원하고 나니 시주자들이 잇달아 나타났다. 전설같은, 동화같은 일들도 벌어졌다.
 
스님은 스무 개가 넘는 전각을 새로 짓거나 보수했다. 비구니 선원인 천축선원은 청정한 도량을 세우겠다는 서원이 깃들어 있다. 이제 비구니 안거의 명소가 되었다. 천축선원, 극락전, 무위당, 반야당, 청풍당, 희운당, 단하당, 청납당, 설선당, 법운당, 향운당, 청향헌, 불영산방, 설법전, 세심당 등이 세워졌다. 어떻게 20여 년 동안 그 많은 불사를 했을까. 얼마나 어려웠느냐고 물으면 그저 웃을 뿐이다.
 
“지금에 집중했습니다. 한 번도 어렵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일이 안되면 쉬었습니다. 그럼 풀렸습니다.”
 
인연이 톱니바퀴처럼 맞아 떨어져 아무런 장애가 없었다고 한다.
 
▲ 불영사 경내는 고구마, 감자, 상추, 고추, 옥수수 등 밭들로 가득하다. 채소들은 불영사에서 어떤 성물보다 귀하게 여겨진다.

불영사 식구들은 아침에 흰죽을, 점심에는 밥을, 저녁은 먹지 않거나 약석(藥石)으로 조금만 먹었다. 청정한 몸을 위해서는 먹는 것이 중요했다. 공양도 수행이었다. 음식에는 모든 것이 들어 있었다. 그러니 고마운 마음으로 즐겁게 먹어야 한다. 입으로만 먹지 말고 귀로도, 코로도, 눈으로도, 뜻으로도 먹어야 한다. 스님은 그런 음식을 세상 사람들과 나눠먹고 싶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사찰음식축제다. 사찰음식축제는 폭발적인 호응을 얻어 해마다 참가 인원이 늘어났다. 1000명이 다녀갈 것으로 예상했는데 3000명이 왔고, 3000명을 예상하면 5000명이 왔다. 지난해에는 5000명을 예상했는데 무려 7000명이 운집했다. 전국에서 몰려든 사람들의 가을 옷차림은 불영사의 또 다른 단풍이었다.
 
산사음악회와 청소년백일장도 열었다. 불영사와 마을, 스님과 주민들은 자연스레 하나가 되어가고 있다. 2013년 5월 울진 읍내에 심전문화복지회관을 지어 복지공간을 마련했다.
 
일운 스님은 또 하나의 의미 있는 불사를 진행하고 있다. 일반인들의 치유공간인 명상원 설립이 그것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조용히 사색할만한, 영혼을 쉴만한 공간이 없다. 자연과 우주가 나에게 보내는 말과 의미를 우리는 잊고 산다. 명상이 사라진 곳에는 욕망만이 자라고 있다. 스님은 불영사의 별과 달과 바람을 나눠주고 싶다. 자연과 우주에 대한 경외심을 찾아주고 싶다. 그래서 여백을 잃어버린 현대인의 마음을 씻기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불영사가 부처님의 그림자를 산문 아래로 내려 보내는 것이었다.
 
지난 5월 이미 ‘국제명상원 선(線), 선(善), 선(禪)’을 주제로 설계도를 공개했다. 부처님의 눈썹을 형상화한 명상원 건물의 곡선에서 선(線)을, 지악봉선(止惡奉善)에서 선(善)을, 최종 목표인 참선의 경지에서 선(禪)을 따왔다. 결국 선(線)속에서 선(善)을 찾아 선(禪)에 이르기를 서원함이다. 1200평 규모에 지상 3층 건물로 명상실과 강당, 전시실, 세미나실, 식당 등 부대시설을 갖추게 된다. 많게는 100명 정도가 한꺼번에 명상을 할 수 있고 2017년 개원을 목표로 하고 있다.
 
국제명상원은 일주문 밖 불영계곡 입구 동쪽에 들어선다. 명상원 주위에는 불영계곡과 우거진 금강송이 불영사를 외호하듯 사천왕처럼 서 있다. 원시의 물소리와 맑은 새소리가 들린다. 청정한 기운이 감돌아 마음을 씻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옛 것을 보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쩌면 창조적으로 변형시키는 것이 전통사찰의 참다운 계승일 것이다. 전설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국제명상원은 불영사 미래의 자산이 될 것이다. 한국불교 미래의 자산이 될 것이다.
 
일운 스님은 2011년 5월 염불만일수행 결사회를 결성했다. 벌써 3년이 지났다. 안으로는 수행으로 망상을 다스리고, 밖으로는 지구촌 이웃의 어려운 이들을 돕기 위한 결사이다. 2000여명의 회원들은 매달 일만원의 회비를 내면서 결사에 동참하고 있다. 캄보디아 학생 100명에게 장학금을 보내고, 미얀마 우물파기 사업도 돕고 있다. 일운 스님은 아침마다 회원들에게 문자메시지로 행복마음편지를 보내고 있다.
 
“날마다 좋은 날이며 순간순간 기적은 일어나고 있습니다. 멋지고 아름다운 삶을 지금 현재 살아가고 있다고 매 순간 내 마음에 이야기해야 합니다.”
 
“지금 일념에 집중하면 그 자리가 바로 최고의 자리입니다. 지금 이 순간이 없는 내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내일을 위하여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십시오.”
 
“마음속 에너지는 결코 고갈되지 않으며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습니다. 매 순간 여러분과 함께하며 여러분의 진실한 믿음에 반응합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친절한 말을 하고 정직한 행위를 하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기본 도덕입니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최고의 자리에 모여 있는 불영사. 그곳에서 부처님의 긴 그림자를 보았다.
 
김택근 본지 고문 wtk222@hanmail.net
 
[1255호 / 2014년 7월 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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