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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의현 총무원장 사퇴

개혁 바라는 사부대중 원력에 절대 권력 항복 선언

▲ 이날 새벽 총무원 청사를 지키던 경찰병력이 철수하자 개혁회의 스님들이 환호하고 있다. 실천불교전국승가회 제공

1994년 4월12일 밤 10시30분경 서울 조계사는 술렁였다. 4월10일 승려대회 이후 개혁회의 측과 긴 대치국면을 이어가던 경찰내부에서 이상 기후가 감지됐다. 개혁회의 측에 ‘경찰이 곧 철수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흘러들었다. 밤 11시15분경 이기태 서울지방경찰청장이 조계사를 찾았다. 이 청장은 청사에 있던 총무원과 개혁회의 측 스님들을 잇따라 만났다. 그는 청사를 나서며 개혁회의 측에 “경찰병력을 철수할 것”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4월13일 새벽 0시30분 경찰의 보호를 받으며 총무원 청사에 남아 있던 스님들이 조계사를 빠져 나갔다. 곧이어 조계사와 총무원 청사를 꽁꽁 에워싸고 있던 경찰도 경내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개혁회의 측은 “우리가 이겼다”며 환호했다. 새벽 1시경 경찰병력이 조계사 경내에서 완전 철수하자 스님들과 신도들은 일제히 박수를 치며 승리의 기쁨을 나눴다. 스님들과 신도들은 청사 입구 계단에서 만세를 부르며 감격에 겨워 서로 얼싸 안았다.
 
사면초가 몰린 의현 원장
4월13일 대각사서 사퇴
8년간 총무원장 삶 마감
 
3대 종회의원으로 정치입문
탁월한 정치 감각 고속질주
7대 종회서 두 번 종회의장
 
1986년 25대 총무원장 당선
인사권 통해 종단권력 장악
BBS 개국 등 불교외연 확대
 
개혁회의 측은 즉각 청사 건물을 접수했다. 개혁회의 대변인 명진 스님은 성명을 통해 “의현 총무원장을 위해 대리전을 해온 경찰의 철수를 일단 환영한다”며 “그러나 신성한 경내에 경찰을 투입한 최형우 내무장관은 즉각 사퇴하라”고 촉구했다.
 
이 시각 의현 총무원장의 행방은 묘연했다. 이미 그는 측근과 함께 총무원 청사를 벗어나 사태 추이를 관망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사면초가에 놓여 있음을 직감했다. 종단 여론은 개혁세력으로 기운지 오래였고, 공권력도 더 이상 그의 편에 서지 못했다. 사퇴 수순을 밟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4월13일 새벽 서울 종로 대각사 한주 원두 스님이 의현 총무원장에게 연락을 했다. 총무원장 사퇴를 권유했다. 더 이상 사퇴시기를 늦춰서는 안 된다고 설득했다.
 
원두 스님은 “4월12일 종회의장 종하 스님이 15일 중앙종회를 소집했다. 중앙종회에서 총무원장을 선출했기 때문에 사퇴를 수습하는 것도 중앙종회의 몫이었다. 따라서 중앙종회가 열리기 이전 사퇴 발표를 하는 것이 순리라고 봤다. 의현 총무원장도 이에 동의했다”고 회고했다.
 
의현 총무원장은 이날 새벽 4시경 총무국장 기연 스님과 함께 대각사를 찾았다. MBC 기자에게 연락해 기자회견을 열기로 했다. 오전 6시경 의현 총무원장은 카메라 앞에 섰다. 그는 “이번 사태에 책임을 통감하고 총무원장 사직원을 포함한 모든 권한을 서암 종정에게 올린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그동안 사퇴발표를 미뤄온 것은 자리에 욕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사퇴 후 종단의 혼란을 염려해서 였다”며 “불교계의 유구한 법통과 정통성을 승계하기 위해 사퇴서를 종정에게 제출한다”고 말했다. 지난 8년간 파란만장했던 총무원장으로서의 삶을 마감하는 순간이었다.
 
▲ 개혁세력으로부터 퇴진 압박을 받았던 의현 총무원장이 4월13일 오전 6시 대각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총무원장 사퇴를 선언했다.

의현 총무원장은 현대불교사에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1962년 통합종단 조계종이 출범한 이후 처음으로 총무원장 4년 임기를 채웠을 뿐 아니라 재선에 이어 3선 연임까지 시도했다. ‘불교교단의 치부를 도려낸 자정운동’(이재형, 불교평론 50호)에 따르면 통합종단 이후 33대 총무원장까지 평균 재임기간은 1년6개월에 불과했다. 그런 상황에서 의현 총무원장의 재임에 이은 3선 연임 시도는 놀라운 일이었다. 힘 있는 문중 출신도, 정치적인 지지 세력이 공고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의 탁월한 정치적 수완이 밑바탕이 됐기 때문이다. 그는 종단 내 불안한 정치적 입지를 정치권과의 유착으로 보완했고, 정적에 대한 효과적 제압을 통해 자신의 체제를 착실히 다졌다. 그러나 ‘권불 10년’이라는 말처럼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그의 장기집권체제도 1994년 종단의 민주화를 갈망하는 사부대중의 원력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다.
 
1952년 해인사에서 상월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의현 스님은 1969년 조계종 제2대 중앙종회의원에 당선되면서 종단 정치에 입문했다. 30대 초반의 나이였다. 이후 3대에 이어 4대, 5대, 6대, 7대, 8대 중앙종회의원으로 선출됐고, 1967년 대승사 주지를 시작으로 은해사, 동화사 주지를 맡았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종단 정치를 시작했지만 특유의 친화력과 뛰어난 정치적 감각으로 종단 정치의 중심을 향해 고속 질주했다.
 
그가 종단 정치의 전면에 얼굴을 드러낸 것은 1981년 6월 제7대 중앙종회 의장으로 피선되면서부터다. 이 무렵 조계종은 혼돈의 연속이었다. 종권을 두고 끊임없는 대립과 반목이 이어졌다. 제대로 임기를 채운 총무원장이 단 한명도 없었고, 종회의장 역시 이와 비슷했다. 청담 스님 등 몇몇 스님을 제외하고 임기를 채운 종회의장은 극히 드물었다. 의현 스님도 이를 비켜가지 못했다.
 
10·27법난 직후인 1981년 6월 법전 스님에 이어 종회의장에 당선된 의현 스님은 종단 혼란으로 불과 6개월 만에 의장직에서 물러났다. 의현 스님은 다시 1983년 1월 녹원 스님에 이어 7대 중앙종회 네 번째 의장에 당선됐다. 그러나 1983년 8월 신흥사에서 주지직을 두고 살인사건이 발생하면서 종단은 거센 후폭풍에 시달려야 했다. 총무원장 사퇴와 함께 비상종단이 출범하면서 중앙종회가 해산됐다. 이번에도 그는 7개월 만에 종회의장직에서 물러났다. 이런 쓰라린 경험은 훗날 의현 총무원장이 종권에 대한 강한 집착을 갖게 한 요인이 됐을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종회의장 사퇴로 한동안 종단정치의 중심에서 멀어져 있던 그는 1986년 8월 녹원 총무원장에 이어 제25대 총무원장에 당선되면서 재기에 성공했다. 그는 8월25일 중앙종회 제86회 임시회에서 밀운 스님을 48표대 17표로 이기고 당선됐다. 비록 큰 표차로 당선되긴 했지만 뚜렷한 지지기반이 없었던 그의 종단 내 위상은 미약했다. 심지어 그의 당선을 두고 ‘갑작스런 녹원 스님의 총무원장 사퇴로 운 좋게 순번을 탔을 뿐’이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였다. 그랬던 그가 이후 8년의 장기집권에 성공한 것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의 정치적 감각은 1986년 9월7일 해인사 승려대회에서 빛을 발했다. 이 무렵 사회적으로 신군부 독재정권에 항거해 민주화를 이루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종단 내적으로도 민중불교운동을 토대로 교단의 자주화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세력들이 유입되고 있었다.
 
의현 총무원장은 이런 시대흐름을 꿰뚫어 봤다. 그는 해인사 승려대회에서 총무원장으로서는 처음으로 “10·27법난을 신군부에 의한 폭거”로 규정하고 “호국불교의 개념을 특정 정권의 비호가 아닌 국민을 위한 것으로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그동안 보수성이 강하고 정권과의 유착관계를 보인 불교계 최고 수장의 이 같은 발언은 종단 안팎에서 큰 관심을 모았다. 그의 대중적 지지도도 높아졌다.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불교의 자주화를 외치던 그는 불과 1년도 안 돼 정권과 타협했다. 그는 1987년 초 청와대에서 종교지도자 모임을 가진 이후부터 노골적인 ‘친여 성향’을 보였다. 같은 해 12월 대선에서는 ‘불자’라는 이유로 ‘노태우 대통령 만들기’에 발 벗고 나서면서 여권과의 돈독한 관계를 형성했다. 정교유착으로 자신감을 얻은 그는 종단 내부에서도 자신의 입지를 넓혀 나갔다. 특히 1988년 3월 임시종회에서 종단 대표권자를 종정에서 총무원장으로 변경하는 종헌개정을 단행했다. 주지 임면권도 종정에서 총무원장으로 바꾸면서 실질적인 총무원장 중심 체제로 다져 나갔다.
 
이 종헌개정으로 의현 총무원장은 사실상 종단의 모든 권력을 틀어쥐었다. 주지 임면권은 자신의 지지 세력을 넓히고 정적을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 수단이 됐다. 자신의 측근을 본사주지로 임명하고, 본사주지는 다시 당연직 중앙종회의원이 됐다. 간선직 중앙종회의원 선출위원장까지 맡으면서 사실상 중앙종회도 그의 영향력 아래에 뒀다. 이 시기 종단 내에서는 그에 맞설 마땅한 정적도 보이지 않았다. 종단 내에서 그의 재임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1990년 6월22일 중앙종회 제100회 임시회에서 월탄 스님을 제치고 재임에 성공하면서 조계종의 새 역사를 썼다.
 
재임에 성공한 그는 종단 내 절대 권력자였다. 종단의 행정과 사법, 입법권까지 장악했고, 정치권과도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면서 장기집권 체제를 굳건히 다졌다. 그러나 순탄할 것만 같았던 그에게도 위기가 찾아왔다. 그는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영삼 후보를 지지하면서 종단 내부에서 거센 반감을 샀다. 선거 때마다 총무원장이 특정후보를 지지하는 것에 따른 피로감이기도 했다. 특히 개신교 장로였던 김 후보를 조계종 총무원장이 드러내놓고 돕는 것에 불자들은 공분했다. 종단 내부에서 의현 총무원장에 대한 비판과 함께 종단개혁을 촉구하는 움직임이 싹트기 시작했다. 실천승가회·선우도량 등 신진개혁세력들의 성장도 점차 그를 위협했다.
 
이런 가운데 1994년 1월 상무대 비리의혹 사건이 불거지면서 정치적 위기를 맞았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무리하게 추진한 3선 연임은 자충수가 되고 말았다.
 
8년 재임기간동안 그는 역대 어느 총무원장보다 많은 불교계 숙원사업을 이뤄냈다. 불교방송국 개국과 불교텔레비전 설립을 추진했으며 불교규제 법령 철폐에도 앞장섰다. 경승단 발족을 비롯해 중앙승가대 4년제 정규대학 승격 등을 이뤄내면서 불교외연 확대에도 큰 공을 세웠다. 그의 강한 업무추진력과 지도력이 뒷받침됐기에 이뤄낼 수 있었던 성과였다.
 
그는 총무원장 사퇴 이후 ‘월간조선’과의 인터뷰(1996년 8월호)에서 “저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든 총무원장 시절 제 머리 속에는 오로지 불교 발전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정교유착에 대한 지적에 대해서도 그는 “정치인, 권력자들을 만나야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불교 재산을 되찾고, 불교방송국을 설립하는 등의 불교계 숙원사업들도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용(御用)을 했다면 그것은 불교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항변했다.
 
그럼에도 그는 정교유착과 장기집권에 따른 종단 내 비리의혹 등에 대한 비판에 직면했다. 이에 개혁세력의 열망에 떠밀려 그는 8년간 총무원장으로서의 공과를 뒤로 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났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257호 / 2014년 8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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