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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선지사 주지 원천 스님

상생·평화 염원 담아 예수상 포함 500아라한 조성

▲ 김해 선지사 주지 원천 스님

1970년 도인 되겠다며 삭발염의
전강·경봉·성철 스님 찾아 정진

해인사승가대·중앙승가대 졸업
선교 겸비하고자 내전에도 매진

은사스님 부름 받아 선지사 중창
불사회향 후 결제 때마다 선방행

유일에 함몰되면 상생은 불가능

예수 봉안은 이 시대 상생메시지
 

 

 
허황옥과 김수로왕의 가야국 전설이 살아 숨 쉬는 김해金海. 하늘을 맴돌던 학이 먹이라도 찾은 듯 힘차게 내려앉는 형상의 선학산(仙鶴山) 자락에 선지사(仙地寺)가 자리하고 있다. 깊은 산중에 들어 선 느낌이지만 마을과는 불과 1Km도 떨어져 있지 않다. 수행 터로는 명당이다. 선지사에는 대웅전이 없고 대신 영산전이 있는데 기둥에 걸린 주련(柱聯)이 일품이다. 경전 속 한자 한 구절 예서나 초서체로 멋지게 써볼 법도 한데 아니다.

‘선지사 불심어린 천년고찰에/ 선학이 옛길 따라 산을 품었고/ 나한은 인연 따라 가야로 왔다/ 오백나한 기도성취 영험함에/ 부처님께선 복 받는다 하셨고/ 업장참회 발원은 성불의 시작’

 
▲ 사진 왼쪽부터 포대, 장유, 의상, 원효.

법당 문 여는 순간 500아라한이 자아내는 장엄함에 압도됐다. 이 공간에서 만큼은 번뇌마저도 숨죽일 듯하다. 그런데 이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옆에 앉은 아라한과 ‘내기’라도 한 판 하는듯한 아라한, 약간 토라진 아라한 등 각양각색의 표정들이 재밌다. 그러고 보니 원효 스님과 의상 스님이 나란히 앉아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원효, 의상이 아라한 자리에 못 앉을 이유는 없다고 이 절의 주지 스님은 주장하고 있는 것이리라.

아! 원효·의상 옆의 아라한은 허황옥(許黃玉, 33 ~ 189·가락국의 초대 왕인 수로왕의 부인)의 오빠 장유 화상(長遊 和尙·허보옥)이다. 먼 산을 보고 있는 그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불모산(佛母山)이 한 눈에 들어온다. 저 산은 장유 화상의 사리탑을 봉안하고 있는 장유사(長遊寺)를 품고 있다. 선지사 장유화상과 장유사 사리탑이 마주보고 있는 셈이다.

500아라한을 조성한 연유가 궁금해지는 순간 또 한 분의 아라한이 눈에 포착됐다. 긴 수염에 긴 머리, 그리고 지팡이. 누굴까? 알아채는 시간은 단 몇 초면 충분했다. 그리스도교를 일으킨 나사렛 예수(Nazareth Jesus) 다. 거조암을 비롯한 많은 사찰이 아라한을 모시지만 예수를 봉안하지는 않는다.

 
▲ 500아라한 속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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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찰 최초로 500아라한 지위에 예수를 올려놓는 담대함을 보인 스님은 선지사 주지 원천元泉 스님이다.

경북 상주가 고향인 원천 스님은 어려서부터 목가적 풍경에 도취하며 도인이 되고 싶었다. 깨달음과는 거리가 먼 도인이다. 공중부양하며 손 한 번 쥐었다 펴면 먹을 것도 나오게 하는 그런 도인을 꿈꿨다. 그러다 할아버지가 운명하는 순간을 목격했다. 죽음이 뭔지도 몰랐던 나이. 사람들이 할아버지를 염(殮)할 때 ‘저렇게 세게 묶으면 많이 아플 텐데!’라 되뇌었던 그 아이는 점점 죽음이란 무엇인지, 삶이란 무엇인지에 천착하기 시작했다.

1970년 범어사로 향했다. 절에서 공양주 심부름을 하던 중 한 눈에 보아도 도인으로 보이는 어른에 마음이 꽂혔다. 조계종 전 종정 월하 스님의 상좌 운하(雲霞) 스님이었다. 어느 날, 죽 한 그릇 정성들여 끓여 운하 스님에게 드렸다. 거의 다 드실 즈음 부탁드렸다.

“제자가 되고 싶습니다.”

원천 스님은 수계 직후(1972) 해인사 하안거 결제부터 삼서근(麻三斤) 화두를 잡고 좌복에 앉았다. 당대 내로라하는 선지식 전강, 경봉, 성철 스님을 직접 모시며 가르침을 받았다. 내전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79년 해인사승가대학을 졸업한 스님은 1986년 중앙승가대학을 졸업(4기) 한 후 부산대 행정대학원에서 행정관리도 공부했다. 나름 선교를 겸비하려했던 의지가 엿보인다.

1986년 은사 운하 스님의 부름이 있어 찾아뵈었다.

“덕천사를 맡아라!”

운하 스님이 선학산 절터를 매입한 건 1950년 3월. 터를 정비해 당우를 세우고 덕천사라 이름 했지만 사격은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덕천사 법등이 원천 스님에게 이어진 셈인데 이때부터 불사인연이 닿기 시작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서울의 대원경 보살과 인연이 맺어졌다. 원천 스님의 정진력과 원력에 감복한 대원경 보살이 덕천사 불사 후원에 적극 나선 것이다. 대원경 보살이 작고하자 고명딸인 경명화 보살이 뒤를 이었다. 절 불사가 한창이던 2001년 8월 ‘덕천사’는 ‘선지사’로 사명이 바뀌었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 경내에서 나온 유물을 고증한 결과 선지사는 통일신라 시대에 처음 조성한 것으로 밝혀졌다.

 

1999년 6월, 도량 터를 닦던 중 지하에서 ‘선지사(仙地寺)’ 문자가 확연히 새겨진 기와 등 와당 30여점이 나왔다. 인제대 가야문화연구소가 이 유물에 대한 학술고증에 나섰는데 선지사는 통일신라 때 건립되었고, 고려를 거쳐 조선 중엽까지도 존재했다는 놀라운 결과를 내놓았다. 선학산 주변 일대의 지명이 옛날부터 ‘선지리’였다는 사실이 고증결과를 방증한다.

원천 스님의 지중한 원력과 인연이 빚어 낸 천년 가야고찰 선지사는 결국 전통사찰 110호, 도문화재 330호로 지정됐다. 웬만한 불사는 마쳤으니 산사에 머물며 법을 폄직한데 돌연(2002년 1월) 길을 떠났다. 안거에 들어 간 것이다. 이후 해제 때만 선지사에 주석하고는 결제가 다가오면 미련 없이 도량을 떠났다. 비워진 도량은 경명화 보살과 견공(犬公) ‘선정(禪靜)’이 지켰다. 선방으로 걸음 한 연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원천 스님은 빙그레 웃는다.

“영산전 불사 마치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공부를 마쳤나? 아니다. 아직도 한참 멀었다.’ 공부 안 한 산승이 도량에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판단했습니다.”

10년 원력을 세웠다. 20안거를 성만하기 전까지는 결코 결제를 게을리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자신에게 걸었다. 사중 일로 어쩔 수 없이 내려온 적이 있어 10년 20안거 성만은 12년이 지난 후에야 마쳤다. 길었던 고독의 끝자락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원천 스님은 한바탕 크게 웃고는 “내 메모 하나 보라”며 선시 한 편을 내 보였다.

 

‘삼십오년 납선객(三十五年 納禪客)/ 남북동서 왔다갔다 했구나. (南北東西 往來頻)/ 그림자 없는 나무에 꽃 만발하니 (無影樹中 花發開)/ 주린 즉 밥 먹고 곤한 즉 잠잔다(飢卽食兮 困卽睡).’

 

성철 스님이 내려 준 ‘삼서근’ 화두를 잡은 후부터 지금까지 정진해 온 원천 스님의 살림살이다.

“두 어깨에 짊어졌던 짐을 조금은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중에게 전할 법문 한 토막도 가끔 스쳐갑니다.”

‘짐은 내려놓고 법은 얻었다’는 뜻에서 ‘비움’과 ‘채움’의 절묘한 조화가 엿보인다. 종전엔 느낄 수 없었던 여유와 한적함을 얻은 듯해 보였다. 이젠 선지사 도량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 순간, ‘예수’가 떠올랐다. “왜 예수인가?”를 묻는 질문에 원천 스님은 “상생·평화”라 간단명료하게 답한다.

선지사 와당 유물이 나오던 당시, 즉 김영삼 정권 때는 유독 많은 훼불사건이 발생했다. 사찰방화는 물론 부처님 머리가 잘려 나가기도 했다. 대부분 이웃종교의 광신도가 벌인 훼불행위였는데 이를 지켜보는 불교계로서는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뿐만 아니라 교육, 체육, 법조계에서도 특정종교 편향 사건이 자주 일어났다.

▲ 경남 유형문화재 아미타불.

불교인들이 화를 다스리고 있어 다행이지 그 화가 폭발하는 날에는 ‘큰 일’날게 분명했다. 더욱이 우리나라 인구 중 절반이 종교인인데 만의 하나 이 사람들이 서로 반목만 거듭할 경우 ‘국가적 재앙’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갈등의 골이 더 깊어지기 전에 그들에게 무엇인가 전해야 했다. 깊은 사유 속에서 건져 올린 게 상생·평화였다.

“부처님께서 전하신 자비와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랑을 안고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 무엇부터 실천해야하는 지를 일깨워주고 싶었습니다. 자비와 사랑을 여는 열쇠는 상생입니다. 내 생명 중요하면 타인의 생명도 소중한 것이고, 내 삶이 고귀하면 상대의 삶도 고귀한 것이며, 내 종교 중요하면 이웃종교도 중요한 겁니다. 둘 중 어느 하나가 무너지는 순간 갈등이 폭발합니다. 상생을 전제하지 않은 사랑과 자비는 진정한 사랑과 자비가 아닐 뿐더러 그 자체가 오만이요 독선일 뿐입니다. 상생이 빚어 낸 세계가 평화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상생을 위한 첫 걸음을 불자인 우리가 먼저 내딛을 터이니 이웃종교인도 우리의 손을 잡고 평화를 향해 함께 걷자는 제안이었던 것이다. 나아가 인간과 자연이 상생할 수 있는 지혜도 발현해 보자는 원력도 담겨 있다. 다문화시대를 열어가는 우리 사회에 원천 스님의 상생메시지는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원천 스님은 현재 중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공격을 놓고 “학살이나 다름없다”며 통탄했다.

“인명피해 규모도 엄청나지만 이스라엘의 공격방식을 보세요. 전차부대를 앞세워 이슬람사원, 일반주택, 자선단체, 학교, 병원, 자선단체 등은 물론 유엔이 운영하는 학교와 시설도 공격했습니다.”

가자지구 보건부(Gaza's health ministry)에 따르면 2014년 7월8일 시작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침공으로 1600여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그 중 20%가 18세 미만의 아이와 청소년들이다. 부상자만도 9000여명에 이르렀다. 이스라엘의 이번 공격에 대해 유럽과 남미를 비롯한 전 세계의 주요 국가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학살’이라 규정하며 비판하고 나섰다.

“단순히 땅을 차지하기 위한 공격이 아니라고 봅니다. ‘팔레스타인 아이들은 미래의 적’이라 한 이스라엘 정치인의 말을 허투루 들어선 안 됩니다.”

이스라엘 여성 국회의원 아일렛 새이크(Ayelet Shaked)는 페이스북에 ‘팔레스타인인은 모두 테러리스트이고, 그들을 낳고 기르는 부모는 테러리스트의 공급처와 다름없다’며 ‘모든 팔레스타인 엄마는 죽어야 한다’고 글을 올렸었다.

“이스라엘 특유의 선민의식이 작동한 겁니다. ‘하나님이 보장한 땅’을 갖기 위해 벌이는 일, 그게 학살이라 해도 정당하다는 것이지요. 그들이 말하는 ‘신’이 그들의 학살행위를 용납할까요? 아니라고 봅니다. 용납한다면 신이 아니라 ‘마(魔)’이지요. 유일(唯一)에 함몰되면 상생(相生)은 보이지 않습니다. ‘나’만 잘된다면 ‘상대’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극단적 사고가 부른 재앙이 지금 중동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원천 스님이 말한 상생을 터득하지 못하는 한 중동의 전쟁은 끝나지 않을 터다. 자리를 떠나려 하자 의미 있는 한마디를 던졌다.

“세속 탐욕은 물론 종교 권위까지도 일찌감치 벗어 던진 사람들의 표정이 저 영산전에 표출돼 있습니다. 우리도 그 미소를 만면에 뜨일 수 있습니다.”


 
▲ 선지사를 묵묵히 지켜온 ‘선정’.

 

선지사를 떠나기 전 영산전 주련을 다시 한 번 보았다.

‘업장참회 발원은 성불의 시작!’

성불은 말이나 의식만으로는 안 된다는 사실이 저 주련 새겨져 담겨있다. 상생평화도 마찬가지다. 원천 스님에게도 작은 소망이 하나 있다고 한다. 선지사 인근에 곧 신도시가 들어설 예정인데, 그에 맞는 유치원을 설립하고 싶단다. 이미 부지는 어느 정도 확보했다. ‘불교미래를 그려 갈 인재를 육성하고 싶다’는 원천 스님이니 그에 따른 인연도 곧 맺어질 것이다. 선지사는 이제 뒷산의 ‘선학(仙鶴)’과 함께 비약할 일만 남았다.

 

[1257호 / 2014년 8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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