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쾌락관
15. 쾌락관
  • 이제열 법사
  • 승인 2014.08.19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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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움, 끊어야 할 대상인가 불성의 작용인가
▲ 그림=김승연 화백

중생은 괴로움을 싫어하고 즐거움을 좋아한다. 사람이건 미물이건 이고득락(離苦得樂)을 추구한다. 괴로움을 따르고 즐거움을 배척하는 존재란 없다. 그런데 이런 보편적 가치로서의 즐거움을 불교에서는 ‘감각적 쾌락’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감각적이라는 말은 중생의 인식기관인 육근(六根), 즉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를 의미한다. 중생은 육근을 통해 대상인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이라는 육경(六境)을 인식한다. 그리고 인식된 대상에 따라 사랑과 미움, 기쁨과 슬픔, 고통과 행복의 감정을 일으킨다. 따라서 감각적 쾌락이란 지나친 향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들의 일상 가운데서 일어나는 육체적이나 정신적인 즐거움과 행복감을 총칭하는 말이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기쁨이 생기거나 아름다운 꽃을 보고 사랑하는 마음이 들거나 감미로운 노래를 듣고 감상에 젖는 것도 감각적 쾌락이다. 칭찬에 마음이 들뜨고 돈이 생겨 행복감이 일어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따지면 중생들이 추구하는 모든 삶의 지향점 중에 감각적 쾌락 아닌 것이 없다.
 
초기불교에는 괴로움의 대상
대승에서는 열반의 다른 모습
쾌락, 넘어야 할 과제지만
본질을 깨닫는 것으로 해결
 
그런데 이와 같은 감각적 쾌락을 바라봄에 있어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간에 적지 않은 시각차가 존재한다. 먼저 초기불교에서 바라보는 감각적 쾌락은 대단히 부정적이다. ‘니까야’와 ‘아함경’ 같은 경전에는 중생들이 생사의 괴로움을 그치지 못하는 이유는 감각적 쾌락을 떠나지 못하고 탐착하는 것이 원인이라고 설하고 있다. 초기불교 경전에서는 존재의 괴로움에 관해 강조한다. 이때 괴로움은 겉으로 드러난 괴로움이 있고 드러나지 않은 괴로움이 있다. 생로병사(生老病死)·애별리고(愛別離苦)·원증회고(怨憎會苦)·구부득고(求不得苦)·오음성고(五陰盛苦) 같이 중생들이 괴롭다고 느끼는 것은 드러난 괴로움이다. 그러나 중생들이 추구하는 감각적 쾌락은 드러나지 않은 괴로움이다. 초기교설에서는 중생들이 좋아하는 감각적 쾌락도 괴로움의 범주에 들어간다. 삼법인의 하나인 일체개고(一切皆苦)설은 중생들이 느끼는 행복도 결국 괴로움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초기불교의 수행은 드러난 괴로움은 물론 드러나지 않은, 어떤 측면에서 교묘하게 포장된 괴로움인 감각적 쾌락까지도 끊는데 목적이 있다. 초기불교에서 얻어지는 해탈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소멸이며 벗어남이 되는 셈이다. 초기불교의 이런 입장은 발붙일 곳이 없을 만큼 매우 단호하다. 이는 감각적 쾌락을 보편적 가치로 삼고 있는 중생들에게는 적지 않은 당혹감을 준다. 따라서 초기불교의 이런 입장은 너무나 명료한 진리라고는 하지만 감각적 욕망에 길들여져 있는 중생들로서는 선뜻 이해하기도 실행하기도 어렵다. 초기불교가 모든 중생에게 적용되는 교설이기는 하지만 결국 출가중심의 수행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초기경전인 ‘니까야’에는 희극배우들이 모여 사는 마을의 촌장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날 희극배우들이 모여 사는 마을의 촌장이 부처님께 찾아와 묻는다. “저희들은 수많은 사람들을 웃게 하고 즐겁게 하는 업을 지었으니 당연히 그 복으로 죽어서 천상에 태어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부처님이 대답한다. “촌장이여 그대가 내말을 들으면 통곡하고 후회할 것이오. 그대는 감각적 쾌락에 붙들려 생사 윤회하는 사람들에게 감각적 쾌락을 증가시키는 업을 지었기 때문에 천상에 가지 못하고 필경 웃는 지옥에 떨어져 고통을 받을 것이오.” 그러자 촌장은 크게 슬퍼하며 후회하고 물러간다. 초기불교가 감각적 쾌락을 얼마나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지나친 해석일지 모르나 부처님 말씀이라 할지라도 이 논리대로라면 세상의 모든 문화의 창조와 예술 활동은 기반이 무너진다. 문화와 예술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추구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또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생업이나 존재 목적을 포기해야만 한다. 이 말씀 그대로라면 배우·가수·화가·시인·디자이너·문학가 등 존재자체가 의미가 없으며 불교에 귀의시키기도 어렵게 된다. 감각적 즐거움과 타협 않는 초기불교의 이런 태도는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려는 중생들의 가치에 너무도 상반하는 것이다. 초기경전의 가르침대로라면 꽃향기 하나도 마음 놓고 맡을 수 없다. 향기에 의해 얻어지는 마음의 기쁨은 곧 감각적 쾌락으로 갈애와 집착을 수반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초기불교의 입장과 달리 대승불교는 감각적 괘락에 대한 해석을 달리한다. 대승불교에서도 감각적 쾌락을 끊으라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대승불교 역시 중생들의 오욕락(五欲樂)을 경계하고 벗어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중생들의 보편적 가치로서의 감각적 쾌락을 수용하는 태도를 취한다. 중생계와 열반계를 서로 대립적 관계로 보고 있는 초기불교와 달리 대승불교는 중생계와 열반계를 평등관계로 본다. 중생의 보편적 가치를 인정하고 들어가는 것이다. 대승불교는 열반과 해탈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생들이 악을 짓지 않는 한도 내에서 감각적 행복을 누리는 것도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보살도를 수행으로 삼는 대승불교에서는 중생들을 기쁘고 행복하게 하는 일이야 말로 부처님의 진정한 가르침이라고 설한다. ‘유마경’의 유마거사가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해 술집을 드나들고 기악을 즐기고 도박장을 출입했다는 내용은 세상의 감각적 쾌락을 인정하고 있다는 뜻이다. ‘정토경’의 열반세계가 서방극락세계가 꽃과 나무와 보석과 광명으로 이루어지고 갖가지 음악이 울려 그 곳에 태어난 중생들이 한없는 기쁨을 누린다고 설명되는 것을 보면 대승불교는 결코 감각적 쾌락을 무시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대승불교의 경전이라면 부처님이 희극배우마을의 촌장 이야기를 들었을 때 지옥에 갈 것이라는 말 대신 일단 그 직업을 칭찬하고 그 길을 통해 갈 수 있는 보살도와 해탈도를 가르쳤을 것이다.
 
초기불교가 세간을 끊고 출세간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면 대승불교는 세간을 통해 출세간에 드는 것이다. 따라서 중생의 보편적 삶의 기준을 허물지 않고 좀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키려는 입장을 취한다. 대승불교는 감각적 쾌락을 고통의 또 다른 얼굴로 보지 않는다. 중생들의 감각적 쾌락은 본질적으로 열반의 성품인 불성의 작용이라고 본다. 대승불교에서도 감각적 쾌락은 끝내 넘어서야 할 과제이다. 그러나 그 본성을 깨닫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도리어 감각적 쾌락 속에서도 감각적 쾌락에 빠지지 않는 자유자재한 삶이 전개한다고 가르친다.
 
이제열 법림법회 법사 yoomalee@hanmail.net

[1257호 / 2014년 8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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