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충남 계룡산 갑사
30. 충남 계룡산 갑사
  • 김택근
  • 승인 2014.08.19 09:4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영규대사 숨결 스며있는 호국도량에 구도의 깃발 휘날리다
▲ 부처님 진신사리의 빛이 뿜어져 나오던 상서로운 터는 아도화상에 의해 갑사로 거듭났다. 갑사는 통일신라시대 1000여 칸 당우를 자랑하는 나라의 으뜸사찰이었다.

입추를 갓지나 계룡산 갑사(주지 화봉 스님)를 찾았다. ‘춘마곡 추갑사(春麻谷 秋甲寺)’라는 말이 있다. 봄에는 공주 마곡사, 가을에는 갑사의 정취가 빼어나다는 것이다. 갑사로 가는 길가에는 은행나무들이 아직은 푸른 잎을 흔들고 있었다. 그 모습이 동요처럼 경쾌했다. 머잖아 저 계룡산에서 가을이 내려오고 이 길에도 노란 물이 들 것이다. 동요는 느린 가곡으로 바뀔 것이다. 일주문에 이르니 거대한 느티나무가 곁에 서 있다. 마치 일주문을 지키고 있는 듯했다. 일주문을 지나 사천왕문까지는 늙은 나무들이 하늘을 가린 채 사람들을 굽어보고 있다. 갑자기 산중 깊숙이 들어온 느낌이다. 문득 사하촌의 점집과 당집들이 떠올랐다. 과연 계룡산에는 어떤 특별한 기운이 있는 것일까
 
신라서 고구려로 돌아가던 아도화상
부처님 진신사리 석탑 발견 후 창건
통일신라시대 화엄10대 사찰로 번창
 
갑사 인근서 태어나 출가한 영규대사
임진왜란서 활약하며 호국영웅 칭송
왜군의 보복으로 모두 불태워졌지만
‘힘센 소’ 출현 재건불사 돕는 가피도

현 주지 화봉 스님 선방 다시 개원해
큰 법기 길러내는 수행정진도량 발원

1600년 동안 제 자리를 지킨 갑사는 말 그대로 으뜸 사찰이었다. 계룡산에 남아있는 전통 사찰 중에서 제일 오래되었고(동학사 724년, 신원사 652년 창건), ‘과거’ 또한 찬란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화엄종 10대사찰이었다. 그 위세만큼 창건설화 또한 원대하다.
 
갑사는 아도화상이 420년(백제 구이신왕 원년) 창건했다. 아도화상이 신라 최초 사찰인 선산의 도리사를 세우고 고구려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백제 땅에 들어 계룡산에 이르자 산중에서 서기가 뻗어 올랐다. 스님이 찾아가보니 자연석탑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아도화상은 그 속에 진신사리가 있음을 알고 탑 아래서 예배를 드리고 갑사를 창건했다.
 
그렇다면 계룡산 자연석탑에 웬 진신사리가 들어 있었을까. 부처님이 입적하고 400년이 지나 인도를 통일한 아쇼카왕은 부처님의 법을 널리 펼치고 싶었다. 왕은 사리보탑에 있던 부처님의 사리를 동서남북을 관장하는 사천왕들을 시켜 마흔여덟 방향에 봉안토록 했다. 이때 다문천왕이 동방 남섬부주 가운데서도 명산인 계룡산의 자연 석벽에 사리를 봉안했다. 그것이 바로 지금의 갑사 신흥암 천진보탑이라고 한다.
 
▲ 대적전은 고풍스러운 모습으로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556년(위덕왕 3년) 혜명대사가 중건하고, 통일신라시대 의상대사가 다시 중창하니 당우가 1000여 칸이었다. 이로부터 전국의 화엄10대 사찰의 하나가 되어 나라의 사찰로 크게 번창했다. 이때의 위용은 대적전 주변의 웅장한 초석들과 화려한 부도(보물 제257호), 철 당간지주(보물 제256호) 등에 남아있다.
 
▲ 철통 24개를 이어놓은 철 당간은 높이만 15미터에 이른다. 1893년 벼락을 맞아 부서져 높이가 조금 낮아졌지만 지금도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철 당간(幢竿)은 으뜸사찰 갑사의 상징이다. 신라시대 철 당간지주로는 유일하게 남아있다. 나무들을 뒤로 물리고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서있다. 과연 신라 때 만들어졌을까 의심이 들 정도로 강건하다. 지름 50센티미터의 철통 24개를 이어놓았는데 그 높이가 무려 15미터에 이른다. 아직도 당시의 힘이 느껴진다. 1893년(고종 30년) 4개의 철통이 벼락을 맞아 부서져 높이가 조금 낮아졌지만 그 위용은 여전했다. 숱한 비바람에도 부식되지 않았고, 벼락에도 넘어지지 않았다. 새삼 그 옛날 장인들의 솜씨에 고개가 숙여진다. 불심에서 길어냈기에 비범했을 것이다.
 
‘저 철 당간에 거대한 당(깃발)이 매달리면 그 아래 수천, 수만 명이 모여 두 손을 모았을 것이다.’
 
그 때의 열기는 산을 허물 정도였을 것이다. 대중의 기도는 하늘을 움직이고 목탁소리는 산을 내려가 마을을 품었을 것이다. 이 장엄함을 지켜본 철 당간은 그저 침묵하고 있다.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도 갑사는 푸르렀다. 임진왜란 때도 화를 면했던 갑사는 1597년 정유재란(선조 30년)으로 치명적인 화를 입었다. 옛날의 영화는 모두 불에 타버렸다. 그러나 전각을 잃고 역사 속 영규대사를 얻었다. 의승군장 영규는 지금도 갑사 곳곳에 머물고 있다.
 
갑사 인근에서 태어난 영규대사는 갑사로 출가하여 서산대사의 법을 이었다. 왜의 침입을 예견하고 근처 암자인 청련암에서 병법과 무술을 익히며 병장기를 준비했다. 마침내 왜란이 일어났다. 조선군은 연전연패했고 왕은 의주로 피난을 갔다. 임금이 백성을 버렸다. 영규 스님은 사흘 밤낮을 통곡한 후 승군을 모집했다. 그러나 불살생(不殺生)을 지키던 승려들에게 전투는 극히 낯설었다. 주저하는 승려들 앞에 영규 스님이 나섰다. 법당 앞 철 당간을 차고 올라가 용머리 위에서 소리쳤다. 그것은 또 다른 당(깃발)이었다.
 
“내 목숨 하나 내놓으면 부처님과 신장님들이 손이 되고 발이 되어 중생을 구할 것이다. 두려워 말라. 나와 함께 중생을 구하러 가자.”
 
포효하는 승군장 영규를 법당 안 부처님이 보고 계셨다. 전국에서 스님이 목탁 대신 죽창과 곡괭이를 들고 모여들었다. 헤아려보니 800명이 넘었다. 의승군은 조헌의 의병들과 합세하여 왜군이 점령하고 있던 청주성을 탈환했다. 패주한 관군 대신 백성이 승전보를 띄운 눈물겨운 전투였다. 다시 왜군이 전라도를 치러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의승군과 의병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금산에서 적을 기다렸다. 1592년 8월18일, 왜군의 공세는 거셌다. 의병장 조헌이 전사하자 의병들은 동요하고 진영에 두려움이 엄습했다. 사방에서 퇴각을 간청했다. 영규가 소리쳤다.
 
“죽음이 곧 사는 것인데 물러나 어찌 홀로 살자 하겠는가.”
 
전투는 처절했다. 의승군과 의병들은 한 곳에서 최후를 맞았다. 그들의 피로 호남평야를 지켰다. 이순신 장군의 ‘전라도 승전’은 금산 전투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왜란이 끝나고 왕이 몇 번이나 바뀐 후 나라에서는 영규대사를 새삼 기렸다. 1738년(영조 14년) 갑사에 표충원을 세우고 서산, 사명대사와 함께 영정을 모셨다.
 
이렇듯 영규대사는 억불정책의 사슬을 뚫고 별로 떴지만, 호국의 영웅을 배출한 갑사는 폐사의 운명을 맞아야 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다시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왜군은 갑사의 모든 것을 불태워버렸다. 영규대사를 키운 갑사에 보복을 한 셈이었다. 아도화상 이래 쌓여있던 불적(佛跡)들이 한 순간에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그렇다고 그곳에 스며있던 기도와 서원까지 소실될 수는 없었다. 갑사는 다시 일어서야 했다.
 
▲ 잿더미가 된 갑사의 재건설화를 간직하고 있는 공우탑.

겨우 화를 면한 스님들이 불사를 시작했다. 1604년(선조 37년) 인호, 경순, 성안, 보윤 스님이 주축이 되어 다시 땅을 고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할 사람이 없었다. 젊은 스님과 신도들은 난리통에 죽거나 불구가 되어 있었다. 부처님을 다시 모시겠다는 서원은 간절했지만 정작 일손이 없었다. 이때 가피가 있었다. 바로 ‘힘센 소’가 나타난 것이다. 지금 갑사에는 조선시대 양식의 공우(功牛)탑이 서 있다. 비록 석탑엔 세월의 때가 끼었지만 이끼를 걷어내면 그 안에 흥미롭고도 신기한 얘기가 들어있다. 주지 화봉 스님이 이야기를 꺼내 들려줬다.
 
왜란이 끝난 어느 날 불사 현장에 소 한 마리가 나타났다. 생김새가 늠름했고 힘 또한 엄청났다. 소는 사람이 하지 못하는 일을 척척해냈다. 홀연 사라지더니 어딘가에서 목재와 기와를 실어오기도 했다. 아무리 봐도 예사 소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소를 보며 힘을 냈다. 남녀노소 너나없이 불사에 참여했다. 그렇게 무사히 불사를 마쳤고 사람들은 소를 칭송했다. 그런데 법당에 부처님을 모신 직후 갑자기 소가 죽어버렸다. 사람들은 필경 부처의 현신일 것이라며 죽음 앞에 경배했다. 그리고 그 공을 새겨 탑을 세웠다. 힘센 소는 아마도 힘이 셌던 영규대사인지도 모른다. 필자의 상상이지만 자신의 무공(武功) 때문에 짓밟힌 갑사를 자신이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소가 되어 나타났는지도 모를 일이다. 문득 영규대사의 진영을 보니 황소를 닮은 듯했다.
 
갑사에는 또 동종(보물 제478호), 월인석보판본(보물 제582호) 등이 있다. 동종은 1584년(선조 17년)에 주조되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공출되었다가 다시 돌아왔다. 범종을 녹여 전쟁도구를 만들려했던 저들의 행위가 가증스럽지만 우여곡절 끝에 제 자리로 돌아온 범종의 여정이 위대하다. 문득 종소리가 듣고 싶어졌다. 노을이 깔린 만추에 홀로 갑사에 들어 범종 소리를 듣는다면 세상의 속살이 훤히 보이지 않을까.
그렇다고 보이는 것만이 전승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화봉 스님은 갑사의 선맥 계승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했다. 혜명, 의상대사에서 시작된 선승의 계보는 불에 타서 알 수 없지만 그렇다고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스님은 그래서 갑사를 구도의 명당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 하안거 동안 갑사에 방부를 들인 스님들이 운력을 하고 있다.

스님은 갑사에 주지로 부임했을 때의 느낌이 생생하다. 경내에 들어서자 너무도 편안했고 싱그러웠다. 아침엔 경내가 골고루 양명(陽明)했다. 새 기운이 솟는 듯했다. 자리 하나는 그야말로 갑(甲)이었다. 문제는 사람이었다. 앞으로 이곳에서 큰 법기(法器)들이 나와야 했다. 갑사가 선방을 다시 연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지난 하안거에는 선객 10명이 정진했다.
 
“터가 으뜸이 아니라 공부하는 스님이 으뜸인 절이 될 것입니다.”
 
모두 기도하고, 서로 배우고, 늘 정진하는 도량. 단순하지만 가장 이상적인 사찰의 모습이다. 화봉 스님은 큰스님들이 갑사에 주석하며 계룡산 일대를 호령하고 그 기운이 내려가 세상을 맑게 만드는 그 날을 그린다.
 
갑사가 다시 갑사가 되는 그날, 그 날엔 저 철 당간의 침묵이 폭발할 것이다. 천년의 기다림이 거대한 깃발로 휘날릴 것이다. 밤이 되면 공우탑에서는 수많은 소들이 나와 별빛을 받으며 남몰래 일할 것이다.
 
김택근 본지 고문 wtk222@hanmail.net

[1257호 / 2014년 8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 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