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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한결같음이란

기자명 혜국 스님

마음만 진실하면 사람과 부처 모두 진실하다

▲ 중국 최초의 절 백마사 입구. 중국 후한 명제 때 서역에서 스님들이 불상ㆍ경전을 흰 말에 싣고 중국에 도착하자 황제의 명으로 건립됐다.

“일여체현(一如體玄)하여 올이망연(兀爾忘緣)이라.”
 
한결같음은 본체가 현묘(玄妙)하여 올연히 인연을 잊는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일여(一如) 즉 ‘한결같음’이란 ‘신심명’ 처음 시작할 때 “지도(至道)는 무난(無難)이라 유혐간택(唯嫌揀擇)이니” 할 때 그 간택심이 끊어진 자리를 말함입니다. 그러니 현묘하고 현묘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일체만법이 “한결 같다” 함은 근본자리 즉 말길이 끊어진 자리를 표현하는 말이거든요. 그래서 도(道)라고도 하고 여여(如如)라고도 하며 다른 종교에서는 신(神)이라고도 하고 참선에서는 본래면목(本來面目)이니, 불성(佛性)이니, 마음(心)이니 여러 가지로 표현하지만 결국 말로서는 표현할 수 없는 자리를 그냥 이름 지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선(禪)에서는 “석가도 몰랐거니 가섭이 어찌 전할건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참으로 대단한 말이거든요. 이런 말을 듣고 “아~ 석가모니 부처님도 정말 몰랐을까?”하면 그야말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렇게 어리석은 일이라고해도 중생들은 뭐든지 생각을 따라가고 논리적으로 증명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저 드넓은 허공을 누가 우리에게 전해준 사람이 있으며 누가 저 허공을 물려받은 사람이 있는가를. 그런데 천삼라(天森羅) 지만상(地萬象) 일체 모든 것이 허공을 의지해 살고 있지 않습니까? 도(道) 또한 그렇습니다. 전해 줄 수도 없고 전해 받을 수도 없지만 분명히 전해주고 전해 받았거든요. 그 말은 눈을 뜨고 보니 전하는 자와 받는 자가 하나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본체가 참으로 현묘하여 올연히 인연을 잊는다고 하신 겁니다. 참으로 현묘합니다. 한 생각 밉다는 생각을 내는 찰나 미운 감정이 일어나고 한 생각 고맙다는 생각을 내는 순간 바로 고마운 감정이 일어나니까요. 찰나 간에 천리만리 다녀오고 별별 묘용이 다 일어나니 어찌 현묘하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이러한 신통묘용이 일어나는 근본자리를 놓치고 한 생각 일어난 다음 그 환영을 보느라고 신통묘용인줄을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일체만법 한결같음’은
말길 끊긴 바로 그 자리
 
청정하고 진실한 마음고향
결코 떠나본일 없으니
만약 꿈에서 깨고 나면
돌아감 없이 돌아가게 돼
 
인이 곧 과요 과가 곧 인이니
인과가 동시임을 깨달아야
 
그래서 원오 스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마음 그대로가 부처이며 부처 그대로가 사람이어서 사람과 부처가 차이가 없어야 비로소 도(道)라고 했으니 이는 참으로 진실한 말이다. 마음만 진실하면 즉, 일여(一如)가 되면 사람과 부처가 모두 진실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조사들은 오직 사람의 마음을 곧바로 가르쳐 견성성불(見性成佛)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누구나 완벽하게 갖추고 있는 이 마음은 오랜 세월 전부터 청정무구(淸淨無垢)하고 애당초 집착이 없으며 고요하고 고요하되 역력하게 비추면서 응연하여 마침내 주관과 객관이 없어서 완전하다고 이렇게 일여(一如)의 세계를 보여주셨습니다.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다만 자성(自性)을 바로 보지 못하고 내 본래 면목을 배신하고 허망한 생각을 일으키고 가엾은 지견을 일으켜서 모든 존재에 표류하게 되니 이것을 윤회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항상 본지풍광(本地風光)을 쓰고 있으면서 단 한순간도 어두운 적이 없었으나 육근육진(六根六塵)에 부질없이 속박을 받고 있는 것이다. 만약 몰록 발심만 한다면 그대로 죄업의 때가 낀 누더기를 벗어 버리고 적나라하게 반드시 깨치게 된다. 이것은 밖으로부터 오는 것도 아니요, 안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라고 고구정녕 일러주셨던 겁니다.
 
다음은 “만법제관(萬法齊觀)에 귀복자연(歸復自然)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만법이 다 현전함에 돌아감이 자연스럽도다, 이게 말로 표현하려니까 돌아간다, 돌아온다, 현전하다, 현전하지 아니하다 하지만 일체만법은 있는 그대로 숨김없이 드러나니 돌아갈게 없이 본자리라는 얘기입니다.
 
예를 들자면 꿈속에서 천리만리 헤매다가 천신만고 끝에 고향에 돌아오는 꿈을 꾸고 깨어났는데 꿈을 깨고 보니 자기가 자던 그 방이거든요. 꿈속에서는 식은땀이 흐를 만큼 고생을 하고 죽을힘을 다해 도망치다가 일어나보니 꿈속에서 있었던 환영입니다. 한 발자국도 나가본 일이 없으니 돌아왔다는 말 자체가 맞지 않을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신심명’에서는 표현하기를 “돌아감이 자연스럽도다”하신 겁니다. 정말 자연스럽거든요.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나의 본래 청정한 마음고향을 떠나본 일이 없습니다. 꿈속에서 헤맸을 뿐 꿈만 깨고 나면 돌아감 없이 돌아갔기에 자연스럽다고 표현했지만 그냥 자연(自然) 그 자체인 것이지요. 일체만법 전체가 내 마음 나타난 작용이라는 걸 알면 세계관과 인간관이 확연히 바뀌게 됩니다. 그러면 돌아갈게 없이 본래 내 고향, 내 모습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부처님 은혜가 막중하다는 사실을 절절이 알게 됩니다. 그러니 그 자연스럽다는 말까지도 돌아간다는 말까지도 군더더기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만법이 본래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고 나의 모습이요 나의 그림자이거든요. 내 자신이 꿈만 깨면 만법은 본래 현전한 그대로 그 자리에서 한 치도 벗어난 일이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늘 드리는 말씀이지만 우리 마음은 일찍이 단 한순간도 우리를 버린 일이 없다, 그리고 떠난 일도 없다, 다만 내가 내 마음을 버렸을 뿐이다, 그래서 원망하고 미워하며 어리석은 탐진치 삼독(三毒)의 꿈을 꾸면서 그 꿈을 진짜로 알고 웃고 우느라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생사라고 이름 하는 윤회나 시간과 공간만 하더라도 보는 이에 따라 다릅니다. 보통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깨달은 이에게는 시간이란 없는 겁니다. 본인이 지나가고 있는 거니까요. 아침이니 점심이니 저녁이니 하고 사람들은 분별을 하는데 태양에는 항상 그 광명 그대로이지 아침, 저녁이 없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망상에서만 과거가 있을 뿐이지 일찍이 과거를 직접 만나본 이는 없습니다. 어떻게 흘러가버린 강물을 만나겠습니까? 영원한 현재라지만 현재란 과거와 미래가 있을 때만 현재일 뿐이지 과거와 미래가 없으면 현재 또한 없습니다. 아침이니 점심이니 하는 시간은 지구가 지나간 거리 즉, 시간이 지나간 것이 아니라 내가 지나간 것이지 나란 곧 지구를 말하는 것 아닙니까? 태양은 그 자리 그대로 아침저녁이 본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법이 그대로 현전함에 돌아감 없이 돌아감이라 그냥 자연일 밖에요.
 
그다음은 “민기소이(泯其所以)하야 불가방비(不可方比)라, 그러한 까닭을 없이하면 견주어 비할 바가 없음이라.”
 
천번만번 방황해도 방황이 아니요, 돌아와도 돌아온 게 아니라는 그 소이 즉, 그렇게 되는 그 이유를 깨달을 것 같으면 무엇과도 견줄 수가 없으며 그 무엇에 비유 할 수도 없다는 겁니다. 그러기에 조사 스님들은 말씀하시기를 허공세계는 생겼다가 사라진다고 해도 이 도리는 애초부터 변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모양이 있어야 변하든 말든 할 텐데 모양도 빛깔도 없기에 그 밝음은 취할 수가 없고 ‘취모검’과 같이 당당해서 뉘라서 당하겠느냐”, 이렇게 표현을 하셨거든요. 이러한 모든 표현들이 추상적인 얘기도 아니고 현학적인 얘기도 아니고 마음에 눈을 뜬 분이 본 그대로 말씀을 하신 일이기 때문에 말길이 끊어진 자리요, 마음길이 멸(滅)한 자리인 겁니다. 도무지 말로서는 표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한 겁니다. 여여(如如)하여 허공성이니 어찌 허공을 비교하겠느냐 이런 얘기죠. 그래서 “까닭을 없이하면”하는 이 말씀을 잘 아셔야 합니다. 즉, 환영에 속지만 않으면 말길이 끊어진 여여(如如)라는 말씀을요. 그래서 스승들은 말씀하시기를 허망한 속박을 벗어나고 생사(生死)의 소굴에서 해탈하려면 “첫째로 발심(發心)이 투철해야 한다. 그리고 영원토록 물러나지 않겠다는 신심(信心)을 갖추어야 한다”고 하신 겁니다. 21세기는 정신문화가 깨어나야 하는 시대입니다. 나를 예외로 하고 남이 바로 서기를 바라는 교육은 평생 가도 누구하나 달라지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남은 어떠한 길을 가든지 나 하나만이라도 바로 살아야 한다는 자기 확신이 서야 합니다.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이 우주 자연을 위해서 투쟁(鬪爭)의 마음을 버리고 상생(相生)의 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누구나 각자, 모두가 자기 자신이 되기 때문에 반드시 평화가 올수밖에 없습니다. 이웃나라가 잘돼야 우리나라가 잘되고 이웃이 잘돼야 내가 하는 일이 잘 된다는 자연의 이치를 요즈음 그대로 우리가 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신심명’에서 이렇게 강조하는 나와 남이 둘이 아니라는 사실을 마음으로부터 행(行)으로 옮겨야 합니다. 가족 중에 어느 한분이 중병이 들어 입원하게 되면 온가족이 같이 힘들어지는 이치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 인연법은 연기법(緣起法)이니까요. 나와 남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남이 잘되어야 곧 내가 잘되는 것이고 내가 행복해야 내 가족이 행복한 그 이치를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까닭이 없어지면 견줄 일도 없고 비할 바도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법을 배우는 이들은 반드시 오늘 하루 사는 삶에 분명히 인과(因果)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인과라는 것이 내 삶이 내가 걸을 때 그림자가 따르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분명하게 믿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우리 불자들은 인과(因果)를 반드시 믿으셔야 됩니다. 그리고 인(因)이 곧 과(果)요, 과(果)가 곧 인(因)이라는 인과(因果) 동시(同時)를 깨달아야 합니다.

[1258호 / 2014년 8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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