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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일본 엔닌이 신라 장보고에게

“청해진대사의 어진 덕을 삼가 우러러 볼 따름입니다”

“아직껏 귀하를 직접 뵈옵지는 못했으나 높으신 이름을 오래 전부터 듣고 있었기에 우러러 존경하는 마음이 더해갑니다. 봄이 한창이어서 이미 따사롭습니다. 바라옵건대 대사의 존체에 만복이 깃들이기를 기원합니다.
저 엔닌은 대사의 어진 덕을 입었기에 삼가 우러러 뵙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품어온 뜻을 이루기 위해 당나라에 왔습니다. 부족한 이 사람은 다행히 대사께서 발원하신 적산원(赤山院)에 머물러 있을 수 있었던 것에 대해 감사와 기쁨 이외에는 달리 표현해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840년 2월, 엔닌(圓仁, 794~864)이 처한 상황은 절박했다. 당나라 땅을 밟은 지 두 해가 돼가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여행허가서가 없으면 불법을 배우기는커녕 순례도 못하고 돌아가야 했다. 황제가 이미 일본 유학승을 불허한 상황에서 이를 돌이키기란 쉽지 않았다. 이제 그가 의지할 곳은 장보고(張保臯, ?~846)와 그를 따르는 재당(在唐) 신라인들뿐이었다. 하지만 엔닌은 확신했다. 그동안 자신이 보아온 신라인들이라면 어떻게든 당 관청에서 여행허가서를 받아 내리라는 것을. 엔닌은 자신의 원이 이뤄진다면 일본에 돌아가서도 장보고와 신라인에 대한 은혜를 결코 잊지 않겠다고 거듭 다짐했다.

현장의 ‘대당서역기’,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과 더불어 동양의 3대 여행기 중 하나로 꼽히는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의 저자 엔닌. 뛰어난 여행가였던 엔닌은 794년 시모스케국(下野國) 쓰가군(都賀郡)에서 태어났다. 백제계 이주민의 후손이었던 엔닌은 9살 때 집안과 인연이 깊었던 다이지지(大慈寺)에 맡겨졌다. 그곳에서 불경을 공부하던 엔닌은 ‘법화경’의 ‘관세음보살보문품’에 깊이 매료됐다. 어린 엔닌을 유심히 지켜보던 승려 고우치(廣智)는 그가 여느 아이들과 확연히 다름을 알았다. 엔닌이 15살 되던 해인 808년, 고우치는 그를 데리고 천태종 총본산인 히에이산(比叡山) 엔랴쿠지(延曆寺)에 올랐다. 천태종을 개창한 초대 좌주(座主) 사이초(最澄, 767∼822)는 흔쾌히 엔닌을 제자로 받아들였다.

엔닌은 사이초의 해박함과 진리에 대한 열정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사이초는 제자들에게 “불교를 믿고 따르는 사람이야말로 나라의 보배다. 속세에서도 쓸모 있는 사람이 돼야한다”고 당부하고는 했다. 엔닌은 스승의 말처럼 나라와 백성들에게 두루 쓸모 있기 위해서는 먼저 널리 배워야한다고 생각했다. 엔닌은 엄격한 스승 밑에서 천태사상을 비롯해 선, 계율, 밀교를 차근차근 익혀나갔다.

▲ 일본 천태종 3대 좌주이자 동양의 3대 여행서로 꼽히는 ‘입당구법순례행기’의 저자인 엔닌.

817년 도다이지(東大寺)에서 구족계를 받을 무렵 엔닌은 천태종이 처한 불운한 상황을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밀교가 일본불교의 흐름을 주도할수록 천태종은 비주류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이같은 상황을 타계하고자 스승 사이초는 7살 아래인 진언종 개조 구카이(空海, 774∼835)에게 제자의 예를 갖춰가며 도움을 요청했다. 심지어 26명의 직제자들이 구카이 밑에서 밀교를 수학할 수 있도록 청하는 일도 있었다. 구카이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상황에서 그의 결별선언은 사이초와 제자들로 하여금 깊은 좌절과 열등감에 시달리도록 했다.

엔닌이 29살 되던 해인 822년, 스승 사이초의 쓸쓸한 입적을 지켜봐야 했던 그는 천태종의 중흥을 이루리라 다짐했다. 엔닌은 엔랴쿠지에 머물며 법을 설하고 수행을 지속했다. 때로 호류지(法隆寺)나 시텐노지(四天王寺) 등 큰 사찰의 초청으로 ‘법화경’을 강설하기도 했다. 몸을 돌보지 않고 수행에 전념하던 엔닌은 40살 되던 해 큰 병이 들었다. 점차 심해지더니 오래지 않아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병세가 깊어졌다. 모두들 엔닌이 세상을 떠날 거라며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생사의 문턱에서 그는 불보살의 가피를 입었고, 병석에서 훌훌 털고 일어설 수 있었다. 그 사건은 엔닌의 신심을 더욱 도탑게 했다. 불법에 대한 그의 열정도 점점 커져갔다.

835년, 42살의 엔닌은 당에 들어가 법을 배울 수 있는 구법승에 선출됐다. 숱한 생사의 기로에 서야만 하는 고난의 시작이었다. 다음해 견당선의 돛이 펼쳐졌다. 엔닌과 그의 제자들은 배에 올랐다. 허나 태풍은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거센 폭풍우로 연거푸 두 번 실패했고, 배 4척 중 3척이 심하게 파손됐다. 배 수리가 끝난 838년 6월, 견당선 3척이 다시 하카타항(博多港)을 출발했다. 바람은 잔잔했고, 모든 것이 순조로워보였다. 당나라가 멀지 않았을 때였다. 거센 폭풍우가 밀어닥쳤다. 일행은 간신히 양주(揚州)에 도착했지만 배는 부서지고 짐들은 유실됐다. 엔닌도 물건 대부분을 잃었다. 그 중에는 지쿠젠국(筑田國) 태수 오노노 수에츠그(小野末嗣)가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 장보고에게 편의를 당부하는 추천서도 포함돼 있었다. 엔닌은 크게 낙담했다.

견당사 일행은 당의 수도인 장안으로 향했다. 그러나 엔닌은 양주 개원사(開元寺)에 머무르며 교류를 넓혀나갔다. 대부분 승려들이었지만 상인들도 적지 않았다. 그중에는 신라 무역상인도 여러 명 있었다. 그는 성지를 순례할 수 있는 여행허가서를 얻으려 애썼지만 소용없었다. 엔닌과 견당사 일행은 839년 2월 운하를 따라 장안으로 갔다. 엔닌은 그곳에 도착해 있던 일행들과 합류해 귀국하려는 배에 올랐다.

“내가 바다를 건너 먼 이국에 온 것은 불법을 배우고, 성지를 순례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원을 이루지 못하고 이렇게 떠나게 되다니.”

엔닌은 이대로 돌아갈 수 없었다. 고민을 거듭하던 엔닌은 제자 등 일행 3명과 산동에서 몰래 내렸다. 일단 당에 남아 순례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엔닌은 그때 초주(楚州)로 목탄을 수송하던 신라인들을 만났다. 그들을 따라 마을에 갔지만 당의 관리에게 발각돼 다시 견당선으로 이송됐다.

42살의 엔닌 구법승으로 선발
세 번 출항한 끝에 당에 도착
여행허가증 못 받은 상황에서
장보고 등 신라인 도움 얻어

신라인 없었다면 순례 불가능
840년 2월17일 보낸 편지에서
장보고 대사에 깊은 감사 표명

엔닌은 모든 걸 체념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그러나 운명이었을까. 때마침 부는 역풍으로 배가 산동반도로 되돌아왔다. 그 다음날인 6월8일부터 엔닌은 적산법화원에서 신라인들의 보호 속에 머물렀다. 장보고가 세운 법화원은 산중 사찰이었지만 규모가 상당히 컸다. 토지를 갖고 있었고 거기서 매년 500섬의 쌀을 소출한다고 했다. 모든 예불의식은 신라 풍속을 따랐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신라어로 진행됐다. 적산법화원은 당나라 땅의 작은 신라였다.

엔닌은 적산법화원 주지 법청(法淸)에게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법청은 그가 무사히 당에서 구법활동을 할 수 있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신라인 장영(張詠), 왕훈(王訓), 최훈(崔暈) 등도 적극 거들고 나섰다. 허나 조정에서 이미 일본 유학승 불허가 확정된 탓에 이에 대한 번복이 결코 쉽지 않았다. 마지막 결정을 가름할 그 무엇이 필요했다. 엔닌은 장보고를 떠올렸다. 엔닌에게 장보고는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그가 일본을 떠나기 전부터 장보고는 당, 신라, 일본의 해상을 장악한 국제적인 인물로 잘 알려졌다. 지쿠젠국의 태수가 장보고에게 추천서를 올리라고 했던 것도 그가 허락한다면 안전은 보장된다는 믿음에서 비롯됐다. 엔닌은 법화원에 머무르며 장보고에 대한 세세한 얘기를 전해들을 수 있었다. 그는 신라인의 영웅이었고, 바다 위의 제왕이었다.

당시 신라는 중앙집권체제가 무너져가면서 왕위계승쟁탈전이 치열했다. 백성들은 갈수록 피폐해졌고 스스로 살길을 모색해야 했다. ‘궁복(弓福)’ ‘궁파(弓巴)’로 불린 장보고도 그런 백성들 중 하나였다. 젊은 시절 장보고는 중국으로 건너가 서주(徐州) 무령군(武寧軍)에서 장교로 근무했다. 활과 창 쓰기에 능하고 지략까지 갖춘 그는 30살 때 군사 1000명을 거느리는 지휘관이 될 수 있었다. 폐쇄적인 골품제도가 뿌리 깊은 신라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장보고는 824년 무렵 안정된 삶과 출세를 포기하고 귀국했다. 신라인을 붙잡아 노예로 팔아넘기는 중국인 노예무역선을 소탕하기 위해서였다. 완도지역에서 자신의 세력기반을 구축한 그는 828년 흥덕왕(興德王)을 만났다.

“중국 도처에는 신라인이 잡혀와 노비가 되고 있습니다. 청해(淸海)에 진(鎭)을 설치한다면 해적들이 우리 백성을 더 이상 잡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왕은 장보고의 의견을 받아들였고, 그를 청해진 대사로 임명했다. 병사와 토착주민 1만 명을 동원할 수 있는 권한도 부여했다. 장보고는 출몰하는 해적선을 직접 소탕하고 노예무역과 연결된 해상세력들을 엄격히 단속했다. 그의 활약이 두드러질수록 서남해안 일대의 도적들이 설 곳이 없었고 노예무역도 점차 근절됐다.

▲ 엔닌의 순례를 적극 도왔던 청해진대사 장보고.

장보고는 당과의 교역을 위해 수시로 교역사절단을 파견했다. 또 등주 적산포를 거점으로 당에서 활동하고 있는 신라인들을 규합해 조직화했다. 그는 당의 물품을 구입해 일본에 판매하는 중개무역을 본격화했다. 이를 위해 장보고는 직접 일본을 방문하기도 했다. 교역은 대성공이었다. 중국과 일본의 최고 실권자들까지 장보고와 줄을 놓으려 백방으로 노력했다.

장보고가 정치에 개입한 것은 836년 12월, 흥덕왕이 세상을 떠난 뒤 벌어진 왕위쟁탈전 때였다. 민애왕의 찬탈 소식을 들은 흥덕왕의 손자 우징(祐徵)이 장보고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우징은 자신이 왕위에 오르면 그의 딸을 왕비로 삼겠다고 약속했다. 장보고는 “의로운 일을 보고 가만히 있으면 용기가 없는 것”이라며 정치의 한복판에 뛰어들었다. 전쟁에 능숙했던 장보고는 우징에게 천군만마였고, 839년 1월 우징이 왕위(신무왕)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전적으로 장보고 덕분이었다.

840년 2월17일, 엔닌이 장보고에게 편지를 쓸 무렵은 장보고의 최전성기였다. 신라 최고의 실력자였을 뿐 아니라 당에서 일본에 이르는 바다 전체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엔닌은 편지에서 오래전부터 대사를 존경했으며 대사가 세운 적산원에서 머물 수 있도록 배려해줘 감사하다고 말했다. 또 지쿠젠 태수가 대사에게 전하라던 편지를 폭풍우 속에서 잃어버렸음도 전했다. 엔닌은 굳이 여행허가서에 대한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법화원의 신라인들에게 벌써 전해 들었을 것임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엔닌이 장보고에게 편지를 보내고 얼마 뒤 전혀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이 일어났다. 3월9일 당 관청이 그에게 여행허가서를 발급한 것이다. 그 배경에 장보고의 배려가 있었음이 분명했다. 엔닌에게 장보고는 관세음보살의 화신이었다.

그는 애초 천태산을 가려던 계획을 접고 좀 더 가까운 오대산으로 향했다. 그렇더라도 800km가 넘는 험난한 길이었다. 엔닌은 그 여정에서도 신라인 사찰인 신라원(新羅院)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오대산에 도착한 그는 3개월 간 그곳을 순례했다. 오대산은 문수신앙의 중심지였을 뿐 아니라 수많은 천태의 현자들이 머물던 성지였다. 엔닌은 그곳에서 지원(志遠) 등 여러 선지식을 만나 일본 천태종이 오랫동안 풀지 못했던 난제들에 대한 답을 얻었고, 중대를 비롯한 오대산 다섯 봉우리에 모두 올라 참배도 했다.

840년 7월1일 엔닌은 다시 장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가장 큰 관심은 밀교였다. 8월20일 장안에 도착한 엔닌은 자성사(資聖寺)에 상주하며 유명한 밀교 승려들을 찾아가 배움을 청하고 중요한 경전을 필사했다. 특히 당시 최고의 밀교 고승이었던 원정(元政)에게서 ‘금강계대법(金剛界大法)’을, 의진(義眞)에게서는 태장(胎藏)·소실지대법(蘇悉地大法)을 익힐 수 있었다. 이는 진언종의 구카이도 배울 수 없었던 새로운 밀교 수법(受法)으로 스승 사이초의 한이 풀리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렇게 장안에서 1년을 보낸 엔닌은 이제 고국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는 관청에 귀국을 허가해달라는 문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좀처럼 허가가 나지 않았다. 엔닌은 초조해졌다. 불교를 대하는 황실의 태도가 악화된 것도 그를 불안하게 했다. 결국 842년 중국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불교탄압 중 하나인 무종(武宗)의 회창폐불(會昌廢佛)이 시작됐다. 갈수록 탄압은 거세졌고, 수많은 사찰들이 사라졌다. 845년에는 50세 이하의 승려들을 모두 환속시켰고, 이를 따르지 않는 자는 그 자리에서 목숨을 빼앗았다. 사찰은 이제 요주의 대상이었고, 남아있는 비구·비구니들도 함부로 절 밖을 나가면 그 자리에서 죽이도록 했다. 얼마 후 그 법은 외국인 승려였던 엔닌에게도 적용됐다. 그는 속복을 입고 머리를 기를 수밖에 없었다. 그와 친분 있는 고위 관료들도 더 이상 그를 도울 수 없었다. 그는 다시 신라인들을 떠올렸다.

귀국 조치가 떨어지자 엔닌은 장안을 떠나 초주(楚州)로 향했다. 그곳에서 다시 만난 설전(薛銓)과 유신언(劉愼言) 등 신라인들이 엔닌의 귀국을 도우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엔닌이 해주를 거쳐 문등현에 도착했을 때는 거지꼴이나 다름없었다. 옷은 해지고 제대로 먹지 못해 몸은 극도로 야위었다. 다행히 엔닌은 그곳에서 자신을 적극 도와줬던 장영을 만났다. 그는 엔닌에게 머물 곳을 마련해주고 일본에 돌아갈 수 있도록 직접 배를 건조했다. 그러나 장영을 시기하는 사람들이 참소를 하는 바람에 엔닌은 결국 그 배를 탈 수 없었다. 그 무렵 엔닌은 장보고가 신라의 중앙귀족들이 보낸 자객에 의해 암살당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암살 명분은 장보고가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는 것이다. 엔닌은 통탄했다. 장보고는 타고난 신분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모순된 세상을 바꾸려고 했던 진정한 영웅호걸이었다. 엔닌은 그런 위대한 인물이 정략에 휘말려 목숨을 잃어야 하는 현실세계가 안타깝고 혐오스러웠다.

엔닌이 입당한지 10년 째 되던 847년 9월2일, 그는 마침내 적산포(赤山浦)에서 신라인 해상업자인 김진(金珍), 김자백(金子白), 흠양휘(欽良暉) 등의 도움을 얻어 귀국길에 오르게 됐다. 엔닌은 귀국에 앞서 다시 삭발을 하고 승복을 입었다. 장영 등 신라인들은 엔닌이 무사히 일본에 도착할 수 있기를 기원하고 귀한 선물까지 주었다. 신라인이 모는 배는 한반도 서남해를 거쳐 9월18일 무사히 하타카항에 도착했다. 10여년에 걸친 험난한 여정, 오직 불법을 익히겠다는 열정으로 나섰던 파란만장한 순례가 막을 내린 것이다.

54살의 나이에 일본 땅을 다시 밟은 엔닌은 최고의 고승으로 받들어졌다. 854년 4월, 엔랴쿠지 3대 좌주가 된 그는 천태사상과 밀교를 선양하는데 주력했다. 또 틈틈이 집필에 매진해 ‘입당구법순례행기’ 외에도 ‘금강정경소(金剛頂經疏)’ ‘현양대계론(顯揚大戒論)’ ‘도법관정비록(都法灌頂秘錄)’ 등 여러 저술을 남겼다. 엔닌은 제자들에게 장보고와 적산원에 대한 얘기를 자주했다. 이들 기념하는 선원(禪院)을 세웠으면 하는 속내도 털어놓았다.

864년 1월14일 72살로 엔닌이 입적하자 제자들은 스승의 바람대로 히에이잔 서쪽 기슭에 적산선원을 건립했으며, 신라신사를 짓고 신라명신상(新羅明神像)을 모셨다. 일본 조정은 엔닌이 입적하고 한 달여 지난 2월16일 법인대화상(法印大和尙)의 위를 수여했고, 866년 7월14일에는 ‘자각대사(慈覺大師)’라는 시호를 내렸다.

엔닌이 장보고에게 보낸 편지는 ‘입당구법순례행기’에 수록돼 있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참고 자료 : ‘입당구법순례행기’(엔닌 저, 신복룡 역, 선인), ‘당·일에 비친 장보고’(김문경, 동양사학연구 제50집), ‘장보고의 생애와 활동’(정청주, 여수대 논문집 제14집), ‘장보고의 법화원 건립과 그 기능’(정순모, 중국학논총 제18집), ‘일본에서의 신라신과 장보고-적산명신과 신라명신을 중심으로’(이병노, 동북아문화연구 제10집), ‘엔닌의 여행과 동아시아세계 인식’(이유진, 동양사학회 학술대회 발표논문집), ‘헤안 초기의 동아시아세계의 교섭과 현황-장보고와 엔닌을 중심으로’(이병로, 일본어문학 제53집), ‘7세기 재당 신라원의 분포와 성격에 대하여’(변인석, 한국고대사탐구 9집)
 

[1260호 / 2014년 9월 1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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