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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이인문, ‘수의독서’

기자명 조정육

만족하면 모두가 부처, 분노하면 모든 것이 과보

▲ 이인문, ‘수의독서’(산정일장도 중), 비단에 연한 색, 110.7×42.2cm, 국립중앙박물관.

“여래의 복전은 하나인데 어찌하여 중생이 받는 과보는 각기 다릅니까?” 화엄경

자족하는 삶 그러낸 ‘수의독서’
자연에 순응하는 이상향 표현
살아 숨 쉬는 것이 바로 행복
삶에 만족해야 남 귀하게 여겨

자전거를 끌고 냇가에 나갔다. 풀 냄새가 확 끼쳤다. 둘러보니 도로가의 풀을 말끔히 깎아 놓았다. 오늘 작업을 했는지 풀냄새가 진동한다. 추석이 가까워졌으니 벌초할 때가 됐다. 이즈음이 되면 풀은 더 이상 자라지 않고 성장을 멈춘다. 위로만 뻗어 오르던 영양분은 뿌리에 저장된다. 멀대처럼 키만 크고 쓸모없어진 풀은 깎아내도 된다는 뜻이다. 뱀 나올 것처럼 무성한 풀을 베어내고 나니 어지럽던 도로변이 시원하다. 면도한 사람처럼 깔끔하다. 주변이 정리되니 여유가 생긴다. 냇가에서 여름을 보낸 나무들을 찬찬히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간다. 상처받은 마음이 조금 위안을 받는다.

냇가에 나오기 전 대형마트에 갔었다. 야채코너를 둘러보고 있는데 복숭아를 세일한다는 방송이 나왔다. 감과 복숭아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이다. 복숭아코너로 갔다. 나처럼 복숭아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지 순식간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살펴보니 복숭아가 알이 조금 작다. 다음 기회에 사야지.

“악!”

돌아서서 나오려다 옆 사람과 부딪쳤다. 육십 가까이 된 남자였다. 검은색 반팔과 반바지 추리닝을 입은 그 남자는 키가 커서 별 상관이 없었는데 키가 작은 나는 안경이 벗겨졌다. 눈 주위가 얼얼했다. 그런데 그 남자가 한다는 말이 가관이었다.

“미안합니다. 근데 내 잘못이 아닙니다. 나는 가만있는데 그쪽에서 잘못한 겁니다. 그러게 뭐하려고 가만히 있는 사람한테 갖다 들이박습니까, 박기를!”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시시비비부터 가리지 않았을 것이다. 우선 상대방의 아픔에 동참하는 것이 먼저다. 그런데 이 남자는 아니었다. 우선 잘잘못부터 따졌다. 그렇지 않아도 얼굴을 다쳐 아파 죽겠는데 책임소재만 따지는 그 사람에게 화가 났다.

“아저씨. 지금 사람이 다쳤는데 어떻게 말을 그렇게 하세요? 사과부터 하는 게 순서 아닌가요?”

내가 언성을 높였다. 그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삿대질을 하며 큰 소리를 쳤다.

“사과 했잖아요. 그쪽에서 분명히 잘못했는데, 내가 먼저 미안하다고 사과했잖아요. 그러면 됐지. 잘못은 그쪽에서 해 놓고 왜 나한테 난리야. CCTV 돌려봐?”

이제는 아예 반말이다. 그때 처음 봤다. 그 남자의 눈빛을. 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그렇게까지 분노스러운 것일까. 섬뜩한 눈빛이었다. 피 흘리는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는 그의 눈빛에는 평생을 살아오면서 한 번도 털어내지 못한 듯한 불평과 절망과 피해의식이 밀도 높게 중첩돼 있었다. 누구라도 걸리기만 하면 물어 뜰을 것 같은 난폭함이었다. 짐작컨대 그는 나보다 더 아픈 사람이었다. 상처가 많은 사람이었다. 나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그를 위로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애매한 말로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됐습니다. 그만 합시다.”

문수보살이 다섯 번째 목수보살에게 물었다.

“보살님. 여래의 복전(福田)은 하나인데 어찌하여 중생이 받는 과보는 각기 다릅니까? 아름다운 모습을 갖춘 이가 있는가 하면 추한 자가 있고, 귀한 자가 있는가 하면 천한 자도 있으며, 부자가 있는가 하면 가난한 자가 있습니다. 여래는 평등하여 애증이 없을 터인데, 왜 중생은 이렇게 분별이 있습니까?”

그때 목수보살이 대답했다.

“예를 들면, 대지는 하나입니다. 사랑하고 미워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대지가 식물을 싹트게 하는 것처럼 복전도 또한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물이지만 담기는 그릇에 따라 그 모양이 달라지는 것처럼, 부처님의 복전도 중생의 업에 따라 다릅니다.”

내가 왜 그렇게 살았던가.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그렇게 부대끼며 살았던가. 눈 뜨기가 바쁘게 허겁지겁 달려 나가 한밤중이 되어서야 겨우 집에 돌아와 몸을 뉘었다. 뭔가를 이뤄보겠다고 몸부림치며 안간힘을 쓰는 동안 육신은 피로하고 영혼은 균형을 잃었다. 경박한 세월이었다. 그런데 이제 좀 편안히 쉴 수 있게 됐다. 모든 번거로운 삶에서 벗어난 것이다. 이제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삶인가. 아침이면 느긋하게 일어나 섬돌 위에 푸른 이끼가 차오르는 모습을 들여다보고 새소리가 오르내릴 때면 낮잠도 잘 것이다. 잠에서 깨어 심심하면 샘물 길어다 쓴 차 달여 마시고, 책을 읽다 피곤하면 숲길 걸으며 사색 할 것이다. 흐르는 시내에 앉아 발을 씻다 집에 돌아와 밥을 먹고 흥이 일면 글을 끄적거리며 깊어질 것이다. 다시 시냇가에 나가 촌늙은이와 농사 얘기를 주고받다가 석양이 산에 걸릴 때쯤 사립문 아래 서면 어느새 달이 앞 시내에 뚜렷이 떠오를 것이다. 얼마나 멋진 은퇴 후의 삶인가.

‘수의독서(隨意讀書)’는 고송유수관도인(古松流水館道人) 이인문(李寅文,1745~1824이후)이 그린 ‘산정일장도(山靜日長圖)’에 들어있는 작품이다. ‘산정일장’은 중국 남송(南宋)때의 학자인 나대경(羅大經,1196~1252)이 지은 ‘학림옥로(鶴林玉露)’ 중 ‘산거(山居)’편을 묘사한 작품이다. ‘산정일장(山靜日長)’은 ‘산은 태고처럼 고요하고, 해는 소년처럼 길다(山靜似太古 日長如少年)’라는 싯구절의 첫 부분을 취한 제목이다. 나대경은 벼슬을 그만두고 산 속에 은거했다. ‘산거’는 은퇴한 선비가 은거지에서 차 마시고 독서하고 시를 짓고 예술작품을 감상하며 여름을 보낸 내용을 적은 글이다. 나대경의 글에는 욕심을 내려놓고 편안한 마음으로 자연에 순응하며 사는 노년의 꿈이 반영돼 있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이상적인 미래다. 많은 사람들이 꿈꾸는 삶인 만큼 여러 작가들이 ‘산정일장도’를 남겼다. 장득만(張得萬,1684~1764), 김희겸(金喜謙, 18세기), 심사정(沈師正,1707-1769), 오순(吳珣, 18세기), 정선(鄭敾,1676-1759), 이재관(李在寬,1783~1837), 허련(許鍊,1809~1892) 등이 작품을 남겼다.

그 중에서도 이인문은 ‘산정일장도’를 가장 즐겨 그린 작가에 해당된다. 이인문의 작품으로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4폭을 비롯해 간송미술관과 개인소장품으로 각각 8폭이 전한다. 그 중 오늘 소개한 ‘수의독서’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작품이다. 모두 8폭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나 현재는 2, 4, 7, 8폭만이 전한다. ‘수의독서’는 그 중 2폭으로 나대경의 글 중 다음 구절을 형상화한 것이다.

마음 가는대로 ‘주역’, ‘국풍’, ‘좌씨전’, ‘이소’, ‘사기’ 그리고 도연명과 두보의 시, 한유와 소동파의 문장 몇 편을 읽는다(隨意讀周易 國風 左氏傳 離騷 太史公書 及陶杜詩 韓蘇文數篇)

나대경이 읽는 책은 동양의 고전이다. 고전은 내 삶의 걸음걸이가 위태로울 때 바로잡아주는 선로(線路)다. 선배들이 그어 놓은 선을 따라가다 보면 비틀거리던 걸음걸이도 반듯해질 수 있다. 그 선로가 ‘주역(周易)’같은 철학책이고 ‘국풍(國風)’같은 시집이다. ‘좌씨전(左氏傳)’과 ‘사기(史記)’같은 역사책이고 ‘이소(離騷)’같은 문학작품이다. 또한 도연명(陶淵明)과 두보(杜甫)의 시, 한유(韓愈)와 소동파(蘇東坡)의 문장이다.

우리의 삶이 흔들리는 것은 바빠서가 아니다. 왜 살아야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무엇을 위해살아야 하는지 삶의 목적을 모르고,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삶의 자세를 모르기 때문이다. 자신의 존재이유를 모르니 남의 삶과 비교한다. 삶의 가치를 모르니 여차직하면 타인과 부딪친다. 걸핏하면 시비를 건다. 그런 의미에서 ‘산정일장’은 나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의 모범답안이다. 자족적인 삶을 위한 친절한 안내서다. 자족적인 사람은 인생을 함부로 살지 않는다. 자신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만이 남도 귀하게 대할 수 있다.

‘산정일장’의 화제(畵題)는 당대 이름을 떨친 서예가 유한지(兪漢芝, 1760-1834)가 썼다. 그런데 유한지가 화제를 쓰면서 2폭과 4폭의 발문을 바꾸어 썼다. 그래서 독서하는 즐거움을 그린 ‘수의독서’에는 다음과 같은 ‘맥반흔포(麥飯欣飽)’가 적혀 있다.

대나무 그늘진 창 아래로 돌아오면 촌티 나는 아내와 자식들이 죽순과 고사리 반찬에 보리밥 지어내니 기쁜 마음으로 배불리 먹는다네(旣歸竹窗下 則山妻稚子 作筍蕨供麥飯 欣然一飽)

소박한 밥상이다. 기쁜 마음으로 받고 싶은 밥상은 상다리가 부러지게 잘 차린 밥상이 아니다. 나물 몇 가지라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밥상이다. 소중한 사람과 함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면 소박한 밥상에 불만이 없다. 부실한 반찬에 불만이 쌓이면 소중한 사람과 함께 있는 행복을 간과한다. 본질을 잊어버린다. ‘산정일장도’의 주인공이 은거하면서도 행복한 이유다. 그는 자신이 누린 행복에 대해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다.

아마 피해의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남자가 나에게 필요이상으로 적대적인 감정을 담아 사납게 대했던 것은. 아무 때나 전투적인 자세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그의 피곤한 삶이 눈에 선하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렇게 살 것인가. 때론 날카롭게 하늘로만 향하던 분노의 줄기들을 과감하게 잘라낼 때도 있어야 한다. 가을이 되면 벌초를 하듯이. 다른 사람은 다 행복하게 사는데 나만 이런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하는 대신 누구에게나 삶은 힘들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생로병사는 특정한 사람만의 원죄가 아니다. 특정 종교를 믿지 않아 벌 받는 죄가 아니다.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누구나 겪어야 하는 필연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다. 물을 담는 그릇이 다르듯 중생의 업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이 석가모니부처님이 왕좌를 버리고 출가한 이유다.

어제 나와 부딪혀 화를 낸 위태로운 눈빛의 그 남자도 편안한 노년을 보내기 바란다. 그가 살아오면서 받았을 상처가 부디 그의 인생 후반기를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거름이 되기를 기원한다.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자족하기를 바란다. 가능하다면 자족적인 삶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면 좋겠다. 나의 존재로 인해 다른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도록 남을 배려하는 삶을 향해서.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주는 냇가의 나무와 풀들처럼 말이다. 자전거를 타고 그저 나무 곁을 휙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를 주는 나무처럼 말이다.

조정육 sixgardn@hanmail.net

 

[1259호 / 2014년 9월 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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