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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백암산 백양사

기자명 김택근

태백의 기운 도량에 모이니 선풍이 백학인 듯 날개를 펴다

▲ 수 많은 고승을 배출한 백양사. 날개를 펼친 학의 모습을 하고 있는 대웅전 뒷편의 백학봉이 때마침 흰구름에 둘러싸여 있다. 주지 진우 스님은 백두대간의 기운이 마지막에 모여드는 곳이 이곳 백양사라고 설명했다.

정읍 내장산을 넘어 백양사로 가는 산길이 있다. 산길이라지만 이제 봇짐지고 넘던 길이 아니다. 차가 콧김을 불며 오르내리는 2차선이다. 비오는 날 차를 얻어 타고 그 길로 들어섰다. 그렇게 백암산 백양사(주지 진우 스님)를 찾아갔다. 나무들은 길 쪽으로 팔을 길게 뻗고 있어 곳곳이 나뭇잎 터널이었다. 비에 묻어 녹음이 뚝뚝 떨어졌다. 한데 오를수록 비가 사납게 쏟아졌다. 산 중턱에 이르자 폭우가 내리쳤다. 승용차가 길을 더듬거렸다. 계곡마다 물 더미가 흰 이빨을 드러냈다. 푸른 숲 사이에서 튀어나오는 저 흰 물줄기는 산의 분노일까, 하늘의 노여움일까.
 
백제 무왕 33년 여환조사가 창건
선조 7년 이르러 환양선사 법문에
흰 양이 업장 소멸 ‘백양사’로 개명
 
용성·운봉·전강·고암 스님 등
고승들 상주하며 선풍 드날린 도량
 
만암 스님의 10년 불사로 중창 후
법맥 이어받은 5대 종정 서옹 스님
정통 간화선 보편적 수행으로 정착
‘참사람 결사운동’으로 현대화도
 
“백두대간 준령 마지막 이르는 곳
시민선방 ‘마음 치유 센터’ 건립해
참사람 운동 세간으로 이어갈 것”
 
돋아난 소름을 앞세우고 산길을 빠져나왔다. 백양사가 가까워지자 날씨가 ‘흰 양’처럼 순해졌다. 막 비로 씻어서인지 길가에 서있는 늙은 나무들의 자태가 곱다. ‘白巖山古佛叢林白羊寺(백암산고불총림백양사)’, 일주문이 나타났다. 일주문에서 절 입구까지 1.5km 길은 갈참, 단풍, 비자나무가 가지를 맞대고 서 있다. 이 길은 우리나라 ‘100개의 아름다운 길’에 뽑혔다.
 
▲ 사찰 입구의 누각 쌍계루.

총림은 승속이 화합해 한 곳에 머무름이 수목과 같음을 이름이니, 고불총림에는 고승들이 이룬 성불 세계의 향과 빛이 모여 있을 것이다. 백양사는 우리나라 5대 총림이며 조계종 최초의 총림이다. 절 입구에 이르니 누각이 서 있다. 유명한 쌍계루(雙溪樓)이다. 그 앞에서 산을 올려다보니 멀리, 아니 가깝게 백학봉이 금방이라도 내려설 듯 장엄하다. 학이 날개를 펴는 형상이라서 백학봉(학바위)이라 부른다. 쌍계루는 백학봉을 등지고 연못을 내려다보고 있다. 연못에 백학봉과 쌍계루가 비친 모습은 남도 제일의 풍경이며, 이 일대 경관은 조선 8경 중의 하나였다. 쌍계루 벽면에는 포은 정몽주 등 시인묵객들의 시판이 걸려있다. 목은 이색, 면앙정 송순, 하서 김인후, 사암 박순 등 고려 말부터 조선시대까지 유명한 학자와 문인들이 이곳을 찾아 백학봉과 쌍계루의 풍광을 읊었다. 정몽주는 '쌍계루에 부쳐(寄題 雙溪樓)'라는 시제로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시를 써 달라 백암승(白巖僧)이 청하니, 붓을 잡고도 재주 없음이 부끄럽구나.
 
청수스님이 누각 세워 이름이 무겁고, 목옹(牧翁 이색)이 기문을 지으니 뜻이 더 깊네.
 
노을빛 아득하게 저무는 산이 붉고, 달빛이 배회하는 가을 물이 맑구나.
 
오랫동안 인간에게 시달렸는데, 어느 날 옷을 떨치고 자네와 함께 올라볼까.
 
求詩今見白巖僧 把筆沈吟愧未能 / 淸叟起樓名始重 牧翁作記價還增
 
烟光縹緲暮山紫 月影徘徊秋水澄 / 久向人間煩熱惱 拂衣何日共君登
 
▲ 쌍계루 안에는 포은 정몽주가 쓴 ‘쌍계루에 부쳐’와 하서 김인후의 글이 나란히 걸려있다.

고려 말 나라를 움직이는 실세들이 쌍계루에서 그 아래 연못으로 시심(詩心)을 던졌음을 알 수 있다. 연못가 나무들은 수령이 700살은 족히 되었다고 한다. 700년 전이면 풍운이 일었던 고려 말이니 노거수들은 쌍계루에서 시를 짓고 읊던 정몽주의 모습을 지켜봤을 것이다. 오랫동안 세속에 시달려왔으니 이제 권력다툼에서 벗어나 청수스님과 더불어 산에나 오르고 싶다던 쌍계루의 꿈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다시 속세로 내려간 정몽주는 개경에서 최후를 맞았다. 그 후 쌍계루도 불에 탔다가 다시 세워졌다. 그 아래 연못은 그런 모습들을 담았다가 다시 흘려보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연못에 이름이 없다. 이름 하나 붙여주면 어떨지.
 
폭우가 쏟아진 직후라서 연못에는 참선수행도량인 운문암 계곡과 천진암 계곡에서 내려오는 두 물줄기가 거세게 합쳐지고 있었다. 비구 선원 운문암과 비구니 선원 천진암의 선기(禪氣)가 하나로 합쳐지는 듯했다. 뒷산 백학봉은 거대한 바위를 구름이 감싸 안고 있었다. 해 뜰 때는 온통 햇살이 바위를 물들여 금산(金山)으로 변한다더니 이렇듯 구름이 내려오니 백산(白山)으로 우뚝하다. 날이 개이고 물이 조신하게 흘러들어오면 다시 백학봉이 날개를 펴고 이 연못에 날아들 것이다.
 
백양사는 백제 무왕 33년(632년)에 여환조사가 창건했다. 창건 당시에는 백암사였고 고려 덕종 3년(1034년) 중연선사가 중창하면서 정토사로 개명했다. 또 병란이 일어나 절이 불타버리자 각진국사가 중창하고 호남제일선원이라 명했다. 그 후 조선 선조7년 환양선사가 백양사(白羊寺)로 이름을 바꿨다. 개명 관련 설화가 있다. 환양스님이 영천암에서 금강경을 설할 때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법회 3일째엔 웬 양이 나타나 영천암 마당에 무릎 꿇고 스님의 설법을 들었다. 하얀 양은 백학봉에서 내려와 설법을 듣고 법회가 파하면 숲으로 사라졌다. 7일 동안의 법회가 끝난 날 밤 스님의 꿈에 흰 양이 나타났다.
 
“저는 천상에서 죄를 짓고 축생의 몸을 받았습니다. 이제 스님의 설법을 듣고 업장 소멸하여 다시 극락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양은 스님께 공손히 절을 올렸다. 이튿날 스님이 살펴보니 영천암 마당에 흰 양이 죽어 있었다. 이후 절 이름을 백양사라고 고쳐 불렀다.
 
그러나 백양사는 점점 쇠락해갔다. 일제시대에는 극락전과 초가 요사채만 남아있었다. 천 년 고찰이었지만 가난을 이겨낼 수 없었다. 빈 절과 다름없던 백양사를 다시 세운 사람이 만암 스님이다. 선과 교 모두를 원만성취한 스님은 1916년 백양사 주지로 취임했다. 이듬해부터 백양사에는 새바람이 불었다. 10여년에 걸쳐 중창불사가 이뤄졌다. 현재의 가람들은 이 때 지어졌다. 특히 스님의 불사는 사찰이 자급자족을 하면서 이뤄졌기에 불교사에 그 의미가 각별하다. 양봉(養蜂) 또는 죽기(竹器) 제작으로 불사 자금을 조달했고, '반선반농(半禪半農)'을 실천했다. 또 크고 작은 일을 대중공사에 붙여 당시 스님들 사이에선 ‘구암사에서 글 자랑 말고, 백양사에서는 대중공사 자랑 말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스님은 마침내 1947년 선원, 강원, 율원을 갖춘 고불총림을 개창했다.
 
중창불사를 마친 후에는 인재 불사에 눈을 돌렸다.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 초대 교장직을 역임했고, 광주 정광중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만암 스님은 여환, 중연, 각진, 환양에 이어 백양사 5창주로 추앙받고 있다.
 
만암 스님의 법맥은 맏상좌 서옹 스님에게 이어졌다. 정통 간화선을 한국불교의 보편적 수행법으로 정착시킨 스님은 효봉, 청담, 고암 스님에 이어 대한불교조계종 제5대 종정으로 추대되었다. 종정에서 물러난 후에는 수행의 고향인 백양사로 돌아와 운문선원 조실로 수좌들의 선 수행을 지도했다. 스님은 1995년 ‘참사람 결사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스님이 지칭하는 참사람은 임제선사의 무위진인(無位眞人)에 현대적인 의미를 부여한 것으로 ‘자각한 사람의 참모습’을 뜻했다. 백양사가 지향하는 ‘참사람의 향기, 아름다운 인연’은 서옹 스님의 유지를 받든 것이다.
 
백양사는 다른 총림에 비해 규모가 작다. 전각들도 그만그만하다. 하지만 보이는 것만이 사찰의 영역은 아닐 것이다. 백양사에서 정진했던 선사들이 별처럼 빛나고 있으니 고불이란 이름이 결코 가볍지 않음이다. 백양사의 선원인 운문암은 남쪽서 으뜸가는 참선 도량이다. 고려 각진국사를 비롯 조선시대에는 소요, 태능, 편양, 진묵, 연담 스님 등이, 조선 말기에는 백파, 학명 스님 등이 정진했다. 근세 이후에도 용성, 운봉, 전강, 고암, 서옹 스님 등이 선지를 밝혔다. 일제 강점기에도 고승들이 상주 수행했던 도량이었다.
 
▲ 백양사 대웅전 바로 옆에는 칠성각이 자리하고 있다. 백두대간의 꼬리에 위치한 백양사는 칠성신앙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이처럼 백양사에서는 선지식들이 끊임없이 나타나 불교계를 이끌고 세상을 제도했다. 그리 크지 않은 백양사에 어떻게 대장부들이 모여들었을까. 주지 진우 스님은 백양사가 태백의 기를 온전히 받는 천하의 명당자리라 전국에서 법기(法器)들이 찾아오는 것이라 했다.
 
“우리나라를 만든 환인석재는 우리조상들이 믿어온 하늘님(하느님)이라 합니다. 불교에서는 도리천의 군주인 제석천왕이 곧 환인이라 합니다. 하늘은 한울의 이음으로서 큰 집 곧, 우주를 뜻하기도 하고, 하늘의 상징은 곧 칠성이라 여겨왔습니다. 여기에 홍익인간의 정신인 한얼은 크게 밝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한자로는 태백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태백의 첫 머리의 시작을 백두라 하고, 백두대간의 끝자락인 노령산맥의 맥이 백양사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태백, 즉 백두대간의 꼬리에 백양사가 위치한다는 것은 그 모든 힘이 이곳으로 뭉쳐진다 할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예부터 칠성신앙은 백양사에서 시작하여 신앙되어 왔고 대웅전 바로 옆에 칠성각이 자리한 사찰은 백양사 밖에 없다 할 것입니다.”
 
스님은 백두대간 준령이 노령산맥으로 이어지고, 그 기운이 마지막으로 떨어진 곳이 바로 백양사라고 했다. 그 지점이 백양사 경내에서도 정확히 어디냐고 묻자 확신에 찬 답이 돌아왔다.
 
“극락전과 칠성각 사이입니다.”
 
설명을 듣고 보니 백두대간의 기운을 뒷산 백학봉이 받아서 날마다 백양사로 나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백학봉이 막 날개를 펼친 학의 모습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마 주지스님마저 잠들면 학바위가 몰래 경내로 내려왔다가 새벽 도량석이 어둠을 가르면 다시 올라갈 것이다.
 
이렇듯 선풍이 치솟던 백양사에 얼마 전 궂은 일이 있었다. 양들이 살고 있던 백양사에 ‘늑대의 습격’ 같은 것이었다. 그 사건으로 고불총림의 이미지는 여지없이 훼손되었다. 누가 늑대인지, 누가 양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제 늑대의 기운이 사라지고 있다. 지선 스님이 방장을 맡고, 선승 진우 스님이 주지를 맡은 후 모든 것은 진정되었다.
 
▲ 백양사 주지 진우 스님은 백양사의 선풍을 산문 밖으로 내보내려는 원대한 구상을 하고 있다.

진우 스님은 백양사의 선풍을 산문 밖으로 내보내려는 원대한 구상을 하고 있다. 바로 일주문 밖에 있는 상가를 물리고 그 자리에 ‘마음치유센터(가칭)’를 세울 계획이다. 이른바 시민선방이다. 습득할수록 공허해지고, 마실수록 갈증을 느끼는 현대인을 치유할 방법은 불교 안에 있다는 것이다. 진우스님은 사찰 안에서 스님들만 해탈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깨달은 것을 공유해야 마땅하다고 여긴다. 그것은 백양사가 펼치고 있는 참사람운동의 맥이면서 또 진정한 ‘상구보리 하화중생’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IT(정보기술)문명에 찌든 사람들을 치유할 고도의 정신문화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한다. 엄청난 자금이 소요되지만 백양사가 나서면 각계에서 공명(共鳴)이 있을 것이라 했다.
 
산문을 나서니 비가 그친 ‘아름다운 길’에 햇살이 그득했다. 백양사 계곡을 타고 내려온 물이 소리치며 따라오고 있었다. 늘어 선 늙은 나무들 모습이 양처럼 순했고 또 경건했다.
 
김택근 본지 고문 wtk222@hanmail.net

[1259호 / 2014년 9월 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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