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킹스 스피치’
18. ‘킹스 스피치’
  • 정장진
  • 승인 2014.09.15 17:3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현실에 억압당한 욕망이 중생의 말과 행동을 비튼다

▲ 조지 6세는 왕좌에 대한 욕망을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를 극복하고 대중 연설에 성공한다.

2010년 작인 톰 후퍼 감독의 영화 ‘킹스 스피치, The King's Speech(왕의 연설)’는 말더듬이 왕자를 중심으로 영국 왕실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영화 주인공은 현재 88세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아버지인 조지 6세인데, 소재나 배경이 일정한 금기가 존재하는 왕실이었기에 제작하기 어려운 영화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국제영화제 상 싹쓸이한 수작
말 더듬는 영국 조지 6세 얘기
입에 구슬 7개 넣고 발음 교정
구슬 토한 뒤 언어치료사 만나
왕좌 두려움 극복…성공적 연설

말 더듬는 증상 고칠 수 있지만
구업 쌓는 습관은 고치기 어려워


영화는 주인공 조지 6세역을 맡았던 콜린 퍼스가 83회 미국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고 이외에도 각본상, 감독상, 작품상 등 무려 아카데미 4관왕에 올랐다. 아카데미상만이 아니라, 골든 글로브, 런던 비평가상, 일본 아카데미상을 비롯해 거의 전 세계 영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남우주연상은 조지 왕 역을 맡은 콜린 퍼스가 아니라 우리에게 영화 ‘샤인’에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신들린 듯이 연주했던, 언어 치료사 라이오넬 로그 역의 제프리 러시에게 돌아갈 수도 있었다. 어쨌든, 이렇게 많은 상을 수상한 것은 이 영화가 왕실 이야기나 말더듬이 왕자라는 다루기 힘든 소재를 다루었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낳는다.

처칠이 등장하기도 하는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실제로 조지 6세는 정말로 말을 더듬었다. 왕이 말을 더듬는다. 고쳐지지 않는 이 병은 왕자가 어릴 때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영화는 말더듬이 왕이 연설을 잘하는 왕이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가 아니다. 영화는 오히려 말을 잘 한다는 것이 무엇이며 그것이 정치와 어떻게 관련되는지, 나아가 전국에 중계되는 라디오 연설이라는 새로운 미디어의 출현과 현대정치의 관련까지 속속들이 보여준다.

인간은 이승에서 삼업(三業)을 쌓는다. 불자들은 알리라. 신업(身業), 구업(口業), 의업(意業)으로 이루어진 삼업중 하나가 구업이며, 말로 쌓는 업이 얼마나 큰 업인지를. “마치 맑은 거울에 비친 그림자가 여러 가지듯이 업의 본성도 그와 같다. 종자와 밭이 서로 모르지만 싹이 트듯이 업의 본성도 그와 같다. 많은 새가 저마다 다른 소리를 내듯이 업의 본성도 그와 같다. 지옥의 고통이 따로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듯이 업의 본성도 그와 같다”는 ‘화엄경’ 보살명난품을 떠올리지 않아도 우린 말로 쌓는 업이 어떠한 것인지를 잘 알고 있다. 기독교 성서에서도 “입으로 들어오는 것이 악한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악하니라”고 했고, 지혜의 서(書)로 알려진 구약 솔로몬의 잠언을 보면,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라고도 했다. 우린 알고 있다. 세월호 사태가 불거지면서 수많은 정치가들의 막말이 얼마나 많은 구업을 쌓았는지를. 이 구업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또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마음에 없는 것이 혀로 나오는 법은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정권의 입이라는 대변인들부터가 그렇지 않았는가. 윤창중에서부터 “세월호 실종자 가족들 가운데 선동이 있다”고 막말을 한 다음 사과한 뒤 얼마 가지 않아 권은희 새누리당 대변인까지. 기이한 일은 막말의 구업이 유독 기독교를 믿거나 새누리당 인사들의 입을 통해 쌓이고 있다는 것이다. “기차 타고, 경주나 가지, 가난한 집 아이들이 왜 제주도로 가서….”

언어 치료사인 라이오넬 로그를 만나기 전, 왕실의 언어치료사는 고대 그리스 때부터 그랬다고 하면서 말더듬이 왕자의 입에 구슬 7개를 넣는다. 그 상태로 문장을 읽으면서 발음을 해보라는 것이다. 사실 고대 그리스 때부터 스피치, 즉 웅변은 수와 관계된 4대 학문인 카드리비움(quadrivium, 4개의 길)과 함께 7대 학문을 구성하는 문법, 논리학, 수사학으로 이루어진 삼대 학문인 트리비움(trivium, 3개의 길)의 최종 결과물로 인식되었다. 로마에 들어와서도 마찬가지였고 이런 전통은 중세 이후에도 계속되어 한국에서 문리대 혹은 문과대학으로 불리는 대학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구역질 하고 7개의 구슬을 토해 내며 이 훈련을 그만 두고 만난 사람이 언어치료사 로그다. 하지만 로그는 언어 치료분야의 학위도 없고 영국 출신도 아닌 호주 태생인데다가 자격증마저도 없다. 말하자면 일반의사로 치면 무면허 돌팔이 의사인 셈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치료법은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고 독특하다. 영화는 이 장면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언어와 정신, 정치와 언어, 불교에서 말하는 구업과 그 업의 역사적 성격 등을 차분하게 그리고 흥미진진하게 풀어나간다.

장가도 들고 자식까지 있지만 계속 말을 더듬는 왕자를 처음 만난 로그는 “생각할 때도 말을 더듬어요? 혼자 중얼거릴 때도 더듬어요?”라고 묻는다. 왕자는 대답한다. “아니요.” 하지만 말을 더듬는 바람에 ‘버벅 버티’로 불리는 왕자의 이 대답은 정확한 것이 아니었다. 대개 이 왕자처럼 말 더듬는 이들은 자신도 모르는 다른 이유를 갖고 있게 마련이다. ‘버벅 버티’도 그랬다. 아주 어릴 때부터 왼손잡이라고 야단을 맞고 난 다음 오른 손만 써야 했고 안짱다리여서 이 역시 오랜 시간 부목을 대고 온갖 고통을 참아가며 고쳐야만 했다. ‘버벅 버티’는 왕의 계승권자인 장남이 아니라 차남이었고 왕자들을 돌보는 유모들 역시 이 철저한 법칙에 따라 장남만 감싸고 돌기도 했다.

불쌍한 왕자는 욕도 제대로 못하고 노래도 큰 소리로 부르지 못했다. 오직 그에게는 형인 장남의 유고 시를 대비해 왕자로서 훈련을 해야만 했다. 로그가 다시 질문을 한다. “노래를 할 때도, 욕을 할 때도 더듬어요?” 아니다. 그래서 욕을 해보고 노래를 불러보라고 한다. 하지만 왕자의 입에서 나오는 욕이란 것이 욕이라고 할 수도 없는 지극히 얌전한 거친 말 정도다. 차남 ‘버벅 바티’의 삶은 형을 위해 희생된 삶이었고 왕실의 보이지 않는 장막에 짓눌린 허깨비 같은 것이었을 뿐이다.

자신의 후계자를 염두에 두어야 할 때가 다가오자 부왕인 조지 5세가 걱정이 되어 ‘버벅 버티’를 다그친다. 이미 왕위 계승권자인 형은 미국 볼티모어 출신의 이혼녀 심슨 부인과 바람이 나서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초초해진 조지 5세가 말한다. “옛날 왕은 위엄 있게 군복 입고 말만 타면 됐지만 이젠 집집마다 찾아가 환심을 사야 돼. 왕실 위상은 완전 바닥이 됐지. 우린 이제 광대야. 누구나 실업자가 될 수 있지. 네 형이자 미래의 왕은 남편 있는 여자만 쫓아다니고. 심슨 부인이라는데 한 번 이혼한 유부녀! 히틀러와 스탈린이 온 유럽을 삼키는데 누가 우릴 지켜. 독일군과 공산당 사이에서 네 형이 저 모양이니 네가 맡을 수밖에.”

때는 2차 세계대전 사이인 1930년대이다. 왕의 계승을 해야 하는 형은 신나게 즐기고 난 후 경비행기를 타고 왕궁에 도착한다. 그리고 직접 운전대를 잡는다. 이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형은 스포츠카와 비행기를 즐기는 타입의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잠시 왕이 되려고도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지만 끝내 포기하고 심슨 부인과 결혼하는 쪽을 택한다. 그런 형이지만 잠시 언어 치료를 받는 동생의 저의를 의심하기도 한다. “민심을 얻으려고? 버벅 버티 동생이 형을 왕좌에서 몰아내려고? 언어 교정을 받고 연설을 배우는 거야?”

형의 이 힐난을 로그도 ‘버벅 버티’에게 한다. 그러자 말더듬이 왕자는 버럭 화를 낸다. 왕이 되고 싶지 않았고 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면 왜 그토록 화를 내는 것인가. 말더듬는 병만 치료하려고 했을까? ‘버벅 버티’는 왕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찬탈이나 왕자의 난 같은 사악한 욕망을 품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왕이 되고 싶었으며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욕망을 드러낼 수는 없었고 도저히 용납되는 일도 아니었다. 그래도 말더듬는 병은 고쳐놓아야 했다.

‘버벅 버티’의 말더듬는 병, 그 근저에는 말할 수도 없고 마음속으로 품어서도 안 되지만 자신도 어쩔 수 없고 객관적으로도 형이 양위를 한다면 가능하기도 한 이 왕좌에 대한 숨은 욕망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유모로부터 사랑을 받기 위해 노력하던 아주 어린 시절부터. 왼손잡이가 병신이라고 놀림을 당하고 안짱다리를 고쳐야 할 불구로 보는 왕실에서 어린 왕자는 심한 갈등의 틈바구니 속에서 말도 제대로 못해보고, 왕이 되고 싶다는 욕망을 죄로 여기며 자란 것이다. 왕이 되고 싶다. 이 말은 고사하고 왕이라는 말 자체가 입 밖으로 꺼내서는 안 될 단어였다. 이 금기가 그의 입을 틀어막았고, 언제든지 그 말이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올 수도 있다는 두려움으로 자리를 잡았다. 무서운 것은 이 두려움이다.

▲ 조지 6세를 가르친 언어치료사 로그.

언어치료사 로그는 이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결코 입 밖에 내서는 안 될 왕이라는 말의 이 금기를 스스로 인식하지 않는 한 말더듬는 병은 치료가 안 되는 것이다. 바람 난 형이 양위를 하자, ‘버벅 버티’는 왕이 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조금 버벅 거리기는 하지만 로그 도움으로 대관식도 무사히 마쳤다. 대관식 후 두 사람은 대관식을 촬영한 필름을 같이 본다. 대관식에 이어 히틀러의 연설 장면도 나온다. 조지 6세가 된 ‘버벅 버티’는 한 팔을 들어 휘휘 저어가며 고래고래 고함을 치는 히틀러를 보면서 말한다. “청산유수로 말은 잘 하네.”

그리고 전쟁이 터진다. 2차 세계 대전이다. 왕은 이제 전 국민을 상대로 개전을 알리고 용기를 북돋우는 일장 연설을 해야 할 처지가 된다. 그에게는 대관식 이후 첫 대국민 연설이자 전 연합군에게도 방송이 되는 엄청난 연설이었다. 로그가 마이크 앞에 서서 마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것처럼 원고를 보고 읽어 내려가는 왕의 발음을 도와준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방송이 끝나자 모두들 왕을 축하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듣기 좋은 말은 “축하합니다. 폐하는 방송 체질입니다”라는 것이었다. 히틀러도 구업을 쌓았다. 히틀러의 구업은 역사의 업이 되었다.

말은 더듬을 수 있다. 어렵지만 고치면 된다. 사악한 뱀의 혀처럼 날름대며 구업을 쌓는 히틀러 같은 이들 보다는 말을 더듬고 글은 투박해도 착하게 사는 이들이 우리 곁에는 많다. 댓글과 막말은 구업의 21세기 버전들이다. 한국의 정치가들이 그리고 우리가 ‘킹스 스피치’를 봐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장진 문화사가 jjj1956@korea.ac.kr

[1261호 / 2014년 9월 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 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