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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계심평등(契心平等)

기자명 혜국 스님

“망상에 끌려 다니는 건 도둑놈을 주인으로 받드는 격”

▲ 중국 최초의 사찰인 낙양 백마사 법당 앞에서 향을 사르며 기도를 하고 있는 중국 불자.

“계심평등(契心平等)하야 소작구식(所作俱息)이로다, 마음에 평등한데 계합(契合)하면 짓고 짓는 바가 모두 다 쉬리라.”

그렇습니다. 불평등한 것은 평등하게 할 수 있지만 본래 평등한 것을 다시 평등하게 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앉아있는 사람에게 다시 앉으라고 억지를 쓰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니까요. 그러하기에 선가(禪家)에서는 마음 닦아서 도를 깨닫는다는 것도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이미 완전한 부처인데 다시 부처가 되기 위해 수행한다는 것이 머리 위에 머리를 하나 더 만들려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본래 평등한 것을 다시
평등하게 할 수는 없어

완전한 부처인데도 다시
부처되기 위해 수행하는건
머리 하나 더 만들려는 것

문둥병 앓는 승찬 스님
“저는 무슨 업으로 인해
죄 받고 있나요” 여쭈니
스승 혜가 스님 말씀이
“죄 어디 있나 가져오게” 

그렇기 때문에 선(禪)에서는 “바로 쉬어라”, “몰록 쉬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깊이 새겨봐야 합니다. 이미 부처이니 마음도 닦지 말고 마구 살아도 된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예를 들면 여기 천억원 상당의 금이 묻혀있는 금광이 있는데 그만한 금이 묻혀 있다는 걸 확실히 믿는 사람은 그냥 파 들어가기만 합니다. 결코 한눈을 팔거나 다른 곳에 눈 돌릴 겨를이 없습니다. 천억원 상당의 금이 묻혀있는 것을 확실히 믿고 있으니 그렇겠지요.

마찬가지로 내가 부처임을 확실히 믿는 사람은 번뇌 망상만 몰록 내려놓으면 됩니다. 마치 거울에 묻은 때만 깨끗이 닦으면 거울은 항상 비추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그것이 본래 거울이 아니고 돌을 닦거나 나무를 닦아서 거울을 만들려고 했다면 그러한 노력은 거울이 될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본래 부처이기에 번뇌 망상만 몰록 쉬어버리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번뇌 망상을 닦아낸다는 말도 잘 들어야할 말입니다. 닦아서 부처되는 게 아니라는 말도 한번 깊이 생각해 보고 분명하게 깨닫고 나면 부처님의 대자대비와 이런 말씀을 하신 스승들의 큰 은혜를 알 수 있을 때가 올 겁니다. 그러나 망념이 본래 공(空)한 것을 깨닫고 단박에 쉰다면 걱정이 없겠지만 이론적으로만 부처라고 알고 망상에 끌려 다닌다면 도둑놈을 주인으로 모시는 격이 되고 맙니다.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망념을 내지 말라”는 그 말은 일어난 망념에 끌려 다니지 말고 그 망념을 없애려고도 하지 말고 주인이 주인노릇만 잘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든든한 주인이 방안에 두 눈 부릅뜨고 있는데 그 방에 도둑질하러 들어가는 허름한 도둑놈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떻게 보면 궤변처럼 들릴지 모르겠으나 결코 궤변이 아닙니다. 꿈을 깨고 나서 꿈속에 있었던 일을 사실로 알고 따라하는 이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와 같이 번뇌 망상이 한낱 꿈인걸 알고 나면 꿈속 일을 꿈을 깨고 나서도 따라다니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래서 꿈을 깨고 나서 꿈이 환영임을 알고 나면 좋은 꿈도 꿈이요, 나쁜 꿈도 꿈인 줄 알고 일체 꿈에 속지 않으면 마음에 계합하여 평등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물며 꿈꾸는 이와 꿈이 둘다 꿈인줄 확연히 깨달으면 짓고 짓는 바가 다함께 쉬게 됩니다. 그 말은 주관과 객관, 능과 소 즉, 짓고 짓는 바가 둘이 아니라는 가르침입니다.

“호의정진(狐疑淨盡)하면 정신조직(正信調直)이라, 여우같은 의심이 다하여 맑아지면 곧은 믿음이 바르게 되나니.”

여우같은 의심이란 내가 부처임을 확신하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내가 바로 부처라는 믿음이 완전하기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그 믿음이 확실해지면 부처님의 고마움을 가슴 깊이 새기게 됩니다. 불자들 가운데에서도 내가 부처임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밖으로 구하는 이가 많습니다. 내가 완전하다면 밖으로 구할게 아니라 그 완전함을 놓치지 않으면 되는 겁니다. 물론 이 말도 ‘삼십방’을 맞을 소리입니다. 완전한데 무엇을 놓치고 안 놓칠게 따로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말에 속지 말라는 겁니다. 참으로 이것은 본인이 참구(參究)해봐야 알 일이고 본인이 본인 마음을 봐야만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말로서는 아무리 잘 설명한다고 해도 감정의 세계 즉, 상(相)의 세계일뿐 감정이 일어나기 이전 순수, 절대 순수인 공(空)의 세계는 말로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여우같은 의심 즉, 생각이 끊어진 세계, 고요를 보려면 고요가 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완전한 고요에는 번뇌 망상이니 생각이니 남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 남아 있다면 고요가 아니니까요. 이렇게 말하면 혹자는 번뇌 망상이 본래 공(空)한데 무슨 소리냐고 하시겠지만 그 또한 그렇지 않습니다. 부디 본래 공(空)을 깨달아 한번 자유인이 되어 봅시다. 본래 공(空)임을 깨달으면 여우같은 의심이 본 마음과 둘이 아닌 한자리이니 곧 맑음이요, 고요 그 자체입니다. 그런 체험을 한번 제대로 하고 나면 곧은 믿음이 바르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곧은 믿음이란 두 번 다시 흔들림 없는 믿음이요, 내가 부처임을 철저히 믿는 마음이니 바른 믿음이요, 곧은 믿음이라고 이름하게 되는 겁니다.
 
“일체불류(一切不留)하야 무가기억(無可記憶)이로다, 일체가 머물지 아니하여 기억할 아무 것도 없도다.”

깨달음이란 살아있는 겁니다. ‘살아 있다’는 말은 아무 것도 없는 텅빈 허공성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머물려 해도 머물 수가 없습니다. 무주위본(無住爲本)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허공이 머무는 바는 있을 수 없는 까닭입니다. 허공에 무엇이든지 머물러 있을 수 있다면 그건 모양이 있는 상법(相法)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들 마음이 좋은 일에도 나쁜 일에도 일체 머물지 아니하면 기억할게 있을 수 없겠지요. 왜냐하면 나의 본래 모습 즉, 고요란 눈에 끌려 다니는 일도 없고 귀에 끌려 다니는 일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치를 말로 설명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옛 스승들은 이런 일을 한마디로 일러주셨습니다.

마조 스님은 말씀하시기를 “지장의 머리는 희고 회해의 머리는 검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연을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참으로 수행을 열심히 하던 한 수행자가 마조라고 하는 큰 스승을 찾아갑니다.
예를 갖추고 여쭙기를 “일체 생각을 여읜 우주의 대진리 즉, 4구(四句) 백비(百非)를 떠나서 우주의 대진리를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청하니 마조 스님이 대답하기를 “나 오늘 피곤해서 못하겠네. 저 지장 스님을 찾아가서 물어보게”라고 하십니다.

학인은 바로 지장 스님을 찾아갑니다. 서당 지장 스님께 그대로 다시 여쭈니 “왜 마조 스승님께 묻지를 않고 여기로 왔는가?”라고 되묻습니다. 그러자 “예, 마조 큰스님께 여쭈니 스님께 여쭈라고 해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지장 스님은 “나 오늘 머리가 아파서 답해 줄 수가 없네. 회해 스님께 가서 여쭈어 보게”라고 이르십니다. 학인은 다시 백장 회해 스님을 찾아갑니다. 똑 같이 다시 여쭈니 회해 스님께서 답하시기를 “나 그거 모르겠네”라고 하십니다. 모르겠다는 겁니다. 하는 수 없이 학인은 다시 마조 스님을 찾아가니 마조 스님이 하시는 말씀이 “서당 지장의 머리는 희고 백장 회해의 머리는 검다”라고 하시는 겁니다. 이렇듯 옛 스승들은 설명이나 방편(方便)보다는 바로 진리를 보여주셨던 겁니다.

서당 지장 스님이나 백장 회해 스님은 모두 마조 스님의 제자로서 대단한 선지식이었습니다. 서당 지장 스님은 우리나라에 최초로 선법(禪法)을 전수받아 오신 도의 국사의 스승이고 백장 회해 스님은 백장청규(百丈淸規)를 정하여 선원 풍토를 안정시킨 분입니다. 이러한 분들이 그냥 현학적인 말을 쓰기를 좋아하거나 아니면 학인들을 골려주려고 하는 말들이 아닙니다. 참으로 귀하고 귀한 말임을 알 때 “일체가 머물지 아니하여 기억할 아무 것도 없도다”하는 세계가 바로 우리 살림살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래서 금강경 오가해(五家解)에서 “수지왕사(誰知王舍) 일륜월(一輪月) 만고광명(萬古光明) 장불멸(長不滅)”이라고 하셨으니, “그 누가 알리요. 왕궁에 떠있는 영원한 저 달을, 만고에 광명이요, 영원히 멸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또 “나도 없고 남도 없을 때 어떠합니까?”하고 물으니 “대나무 그림자 댓돌을 쓸어도 먼지하나 일어나지 않고 밝은 달 물속을 투과해도 물결하나 일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신심명’의 첫 구절에서 “지도무난(至道無難)이요, 유혐간택(唯嫌揀擇)이라”하신 말씀이 골수였다면 오늘 배우는 “일체불류(一切不留)하야 무가기억(無可記憶)이요, 허명자조(虛明自照)하야 불로심력(不勞心力)이로다”는 그에 못지않은 알맹이입니다.

기억이라는 말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일단 기억한다는 말은 내 마음 속에 사진이 찍혀있다는 얘기이고 그 말은 내 마음이 청정하지 못하다는 얘기 즉, 텅빈 허공성이 안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라는 기억, 어머니라는 기억이 모두 일회용입니다. 전생에 아버지 어머니를 모르는 것을 생각해보면 왜 일회용이라고 하는지 알 수 있기 때문에 일체가 머물지 아니하여 기억할 아무 것도 없는 겁니다. 바로 허명자조(虛明自照)이기 때문입니다. 머무르는 바가 있는 기억은 일체 모두 일회용입니다. 만약 머무르는 바가 없는 청정공이 되면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에 영원합니다.

여기에서는 일회용이니, 영원이니 하는 것이 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일회용으로 태어나서 영원성이라는 ‘신심명’을 배운다는 것, 이것은 그야말로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입니다. ‘신심명’을 지은 삼조(三祖) 승찬 스님께서 문둥병이라는 통한의 기억 때문에 이조 혜가 스님을 찾아가서 “스님, 저는 무슨 업(業) 즉, 무슨 기억 때문에 이런 극심한 죄를 받아야 합니까”하고 눈물로서 여쭈니 일체 머무르는 바가 없는 이조 혜가 스님은 “그 죄가 어디 있는가? 가져와 보게”하고 되묻습니다. 이 한마디에 “일체불류(一切不留)라 무가기억(無可記憶)”을 깨달은 겁니다.

 

[1262호 / 2014년 9월 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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