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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 문수원 수안 스님

육도윤회 돌아도 종이 위 그림 한 생각 쉬고 멋지게 놀다 가야지

 
현재 한국 선화계를 이끄는 선두 주자는 양산 문수원의 수안 스님이다. 선화에 깃든 예술적 품격과 가치를 한국은 물론 일곱 번의 해외 전시를 통해 유럽과 러시아에 유감없이 전한 인물이 수안 스님 아닌가.

그런 수안 스님에 대해 누군가 필자에게 물어온다면 장황한 설명은 걷어치우고 1985년 세간에 선보인 수안 스님 시집 ‘오소라’ 가운데 한 편을 보여주고 싶다. 스님이 1981년 10월 부산 전시회를 열며 전한 초대의 글 ‘오소라’ 전문이다.

10대 생계위해 가구점 들어가
허드렛일 도우며 목공일 배워
인곡스님 인연으로 18세 출가
무자 화두로 10여년 묵언정진
전각대가 운여 선생에게 사사
40년 정진 속 시서화각 우뚝

박종철 사건 목도 ‘나’ 부수려
‘맷돌 중’ 자처하며 하심 정진
다즐링서 칸첸중가 본 후부터
‘지구 전체가 곧 나의 전시장’
마음 비워 동자 미소 지으며
대긍정심의 허허 대장부되라

‘듬성 듬성한 / 노송 사이로/ 흐르는 달빛을 벗삼아/ 허름한 庵子(암자)에서/ 생각나면 그리고/ 파고 칠했던/ 작품들을/ 한데 모아/ 雜華展(잡화전)을 하오니/ 오셔서 보시고/ 머금어 보소서.’

어떤 마음으로 그림과 전각을 하시는 분인가? ‘암자에서 생각나면 그리고, 파고, 칠한다’. 도반이 누군가? ‘노송, 달빛’이다. 다양한 일용품을 파는 잡화전(雜貨廛)에 기대 ‘잡화전(雜畵展)’도 아닌 ‘잡화전(雜華展)’을 연다! 자신을 한없이 낮추(雜貨)면서도 저잣거리의 웬만한 화랑에 걸리는 그림(雜畵)을 내놓는 건 아니란다. 화엄을 바탕으로 한 ‘수안 화풍(雜華)’을 펼쳐 보일 테니 와 보라는 것 아닌가. 한발 더 나아가 ‘보는데 그치지 말고 머금어’ 보란다.

▲ 문수보살의 혜안이 서려있는 영축산 아래의 문수원(文殊院) 전경.

통영에서 태어 난 스님은 진주에서 유년의 세월을 보냈다. 여섯 살 때 한의사였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집안 살림살이에 온통 빨간딱지가 붙었고, 어머니는 봇짐행상에 나섰다. 술지게미로 허기를 달래던 10대 초반의 어린 그는 가구점에 들어가 잔심부름하며 목공일까지 배워야 했다. 산사와의 인연은 그때 맺어졌다. 가구점 목수아저씨 따라 해인사로 향했는데 거기서 인곡 스님을 처음으로 뵈었다고 한다.

유년 회상에 잠시 잠겼던 수안 스님이 갑자기 벽에 걸린 달마를 가리키며 웃는다.

“목수아저씨 따라 인곡 스님에게 절을 올리니 큰스님이 벽에 걸린 그림에게도 절을 하라는 거예요. 눈은 부리부리한데 참 희한하게 생겼어.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지. 그런데 그 옆에 두 사람, 어른인지, 청년인지, 애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배꼽을 다 드러내 놓고 멀뚱히 서 있어. 어찌나 우습던지. 절 올리는 중에 참고 있었던 웃음보가 기어코 터지고 말았지!”

생애 처음으로 절에서 본 그림은 달마대사와 한산습득도였다. 예를 올리다 웃고 말았으니 혼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인곡 스님은 어린 그에게 과자와 홍시를 건넸다. 가뜩이나 배고팠을 것이니 그 맛 지금도 형언할 수 없을 터. ‘내일 또 오라!’는 인곡 스님 한마디에 짬만 나면 해인사로 향했다.

당대 선지식 인곡 스님이 홍시만 주었을 리 없다. ‘여기 바다에 사는 물고기와 땅 위에 사는 여우, 하늘의 비둘기…. 여섯 동물이 한 줄에 묶여 있다. 그런데 제각각 갈 곳이 다르니라. 서로 제가 가야할 곳으로 가겠다고 애쓰고 있으니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그 땐 눈만 껌벅껌벅 했지. 그래도 그때 하신 말씀이 지금도 새록새록 나는 거 보면 아이들에게 전하는 법문도 허투루 하지 말고 잘 해야 되요. 육근육식이 뭔지 몰랐어도 참 재미있게 들었거든.”

차 한 잔 따르고는 다시 회상에 잠긴다. “그래요. 처음엔 홍시 먹으러 갔지. 그런데 절이 참 좋아져. 숲에서 이는 바람 소리, 스님들이 내시는 염불 소리, 그냥 좋아. 홍시보다 더 좋더라구!”

학교서 월사금 가져오면 ‘국민학교 졸업장’ 준다는데 ‘절에 있으면 그것도 필요없다’며 스스로 거절하고는 급기야 1957년 열여덟 나이에 해인사로 입산해 행자생활을 시작했다. 사문의 길에 들어선 후엔 ‘무(無)’자 화두든 뒤 10여년동안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표충사 한계암에서는 ‘정신병환자 요양원’이라는 팻말과 함께 철조망 쳐놓고는 묵언패 달고 정진했던 수안 스님이다.

▲ 2001년 러시아 모스크바 크렘린궁 초대전 작품. 여백의 미가 한껏 표출된 가운데 뒷모습을 통한 수행자의 고독이 느껴진다.

납자 발길은 어느덧 경봉 스님이 주석하고 있던 극락암에 닿았다. 매일 새벽녘이면 삼소굴 앞에 멈춰 섰다가 차수 한 후 경봉 스님을 향해 절을 올렸다. 큰스님에 대한 존경의 표현만은 아니었다.

“‘마음의 눈을 열겠습니다. 지켜봐 주십시오.’ 깨달음을 향한 의지를 스스로 다져보는 겁니다.”

어느 날, 삼소굴 주변에 허접한 대나무가 보였다. 경봉 스님도 별 쓸모가 없다 생각하셨는지 며칠째 그 자리 그대로다. 작은 칼로 이러지러 툭툭 쳐가며 다듬어 죽비 형태를 갖춰 놓고는 한국전통의 기와 마구리 문양에 ‘와당(瓦當)’ 글자까지 새겨 경봉 스님께 드렸다. 한눈에 보아도 큰스님께서 놀란 눈치다. 허접한 대나무가 죽비된 것도 신통한데 문양과 함께 새긴 글씨가 일품이었으니 말이다.

‘수안 수좌는 감자 수좌라! 손이 영특해. 내 도장도 한 번 새겨보라.”

감자라는 작물의 쓰임새가 다양하듯 ‘감자 수좌’라 하면 ‘수안 스님 손에 무엇이든 쥐어지기만 하면 작품이 나온다’는 칭찬이다. 천부적인 수안 스님의 능력을 한 눈에 알아본 사람은 경봉 스님이었던 셈이다.

“큰스님, 그래도 전각은 못 합니다.”

“아니, 수안 수좌는 할 수 있다. 배우면 되는 것 아닌가.”

은사 석정 스님이 당대의 내로라하는 전각 대가를 연결해 주었는데 그 중 운여(雲如) 김광업 선생에게 수안 스님의 마음이 꽂혔다.

‘전각은 돌 위에 시를 쓰고, 글씨를 만들고, 그림도 그려내는 것이니 동양예술의 극치다. 일원상부터 그려보라. 그리고 3만개의 전각을 하고나면 대가가 될 것이다.’

지금도 구체적인 형상이 떠오르지 않을 때엔 일원상을 그린다. 원을 그리고 그리다 보면 형상이 떠오른다고 한다. 때로는 시와 그림이 동시에 떠오를 때가 있다고 하는데, 그런 그림이 전시장에 나가면 수안 스님 손에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참, 묘한 일이다.

석정 스님 곁에선 그림으로 향한 붓길을 좀 더 다져갔다. 스승 그늘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선사들의 필법을 연구하고, 배울만한 사람이라 생각하면 승속을 불문하고 거침없이 다가가 친분을 맺어가며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 갔다. 누군가 ‘떠돌이 중’이라 놀려도 괘념치 않았다. 화폭에 숨겨진 길을 터득해 가는 것 또한 납자가 걸어야 할 선의 길과 다르지 않다는 걸 자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이나 그 때나 수안 스님은 오로지 길을 걸을 뿐 그 외의 것들은 걱정치 않는다. 직접 만나면 ‘전시한다’ 말은 전해도 지인들에게 초대장 보내는 일은 아예 염두에조차 두지 않는다.

“제천(諸天) 여의식(與衣食)이라 했습니다. 정진하는 비구에게는 하늘의 신들이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준다 했으니 걱정할 것 없지요.”

그러고 보니 중국의 선화대가 석도(石濤·1630~1724) 스님이 걸었던 길과 매우 유사하다. ‘하늘땅을 스승으로 삼고 기괴한 산봉을 모두 모아 밑그림을 만든다’는 고전화풍을 과감하게 내던지고는 ‘무법의 법이 최고의 법(무법이법내위지법·無法而法乃爲至法)이고, 화법은 내가 세운다(법자아립·法自我立)’ 선언했던 그 석도 스님 또한 방랑길 속에서 배우고 터득해 가며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유감없이 표출했다.

“석도 스님 진본 화첩 하나 보고 싶어 중국 양저우박물관으로 냅다 간 적 있지요. 상하이에서 난징을 거쳐 버스로 몇 시간 타고 가서야 화첩과 마주했는데 그림 딱 한 점 있었습니다. 산수화를 보는데 눈에 이슬까지 맺혀졌어요.”

순간 궁금했다. 수안 스님 화폭에 무엇을 담고 싶은지. 찰나의 망설임도 없는 터져 나온 일갈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비워라!” 소참법문 청했지만 ‘소참 붙일 것도 없이 비워라’ 한다. 뭔가 알아서 비울 생각 말고 당장 실천에 옮기라는 뜻이다. 수안 스님도 폐부를 찌르는 아픔을 뒤로하며 자신을 비우려 한 적이 있다. 1980년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박종철 고문 사건.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그 사건이다. 생면부지인 파릇한 20대 청춘이 그렇게 세상을 떠나는 걸 목도했다. 시대의 아픔이었다.

“그 때 나도 이미 죽었다는 것을 알았지요. 그 젊은 청춘의 사십구재 때 그를 위한 그림을 그린 뒤 나를 버렸습니다.”

서울 봉원교육원장의 요청으로 잠시 사무일을 봐준 적이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직원들이 자꾸 스님의 눈치를 보더란다. 실무를 책임지고 있는 직원들이 자신있게 건의하고 토론해 가며 결정해야 하는데 그게 아니다. 본의 아니게 그들의 사기를 꺾고 있는 형국이다. 그 자리 내놓았다.

“떠나면서 나를 부수려 했지. 맷돌로 나를 갈아 없애고 싶었지. 그 이후 내 스스로 ‘맷돌 중’이라 했어요. 근데 허허허…. 얼마나 쪼개졌는지 몰라. 나를 으깨어 세상에 얼마나 보탬 주었는지….”

한 번 더 있다. 히말라야 산맥 한 번 보고 싶어 인도 다즐링을 찾았다. 다즐링에서도 오지로 들어섰는데 차도 고장나고 마실 물도 다 떨어져 갔다. 몸 속 깊숙이 밀려오는 한기에 한껏 몸을 움츠려야 했다. 그때 광대한 빙하 5대 보고 중 하나인 명산 카첸중가가 눈에 들어왔다. 방금 전 본 카첸중가와는 사뭇 달랐다.
‘지구를 내 전시관으로 삼자!’ 사후에라도 자신의 작품을 보여줄 수 있는 개인전시관 하나 갖고 싶다는 작은 소망마저도 ‘거추장스러운 것일 뿐’이라며 내던진 것이다. 사실 수안 스님에게 개인전시관은 ‘욕심’이 아니라 ‘포교’의 다름 아니다. 수안 스님 작품에 왜 동자가 많이 등장하는지 알면 그 연유를 납득할 수 있다.

수안 스님이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딱 하나. 붓을 잡은 후 불전에서 최초 발원한 그 한 마디에 귀를 기울여 보자. ‘부처님 마음 전하는 제 그림이 남북한 5000만 동포 모두에게 전해져 불국토를 이루게 해주십시오!’

▲ 2009년 KBS부산총국 개국 74주년 기념 초대전 작품. ‘동심’과 ‘불심’에 담긴 ‘천진무구’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듯하다.

화폭에 담긴 동자는 천진불이면서 문수보현동자다. 그 속에 담긴 ‘미소’ 하나만이라도 전하고 싶은 게다. 부처님께서 꽃을 들어 보이셨을 때 가섭 존자가 보였던 그 미소다. 어리광피우는 아이 보며 엄마가 보이는 그 미소다. 내 옆 사람의 손을 함께 잡고, 작은 것 하나도 나누며 머금는 그 미소다. 그러기에 수안 스님은 ‘힘들어도, 한스러워도, 미소 지으며 웃자’고 한다.

“짜증내면 짜증나는 일만 생기고, 웃으면 웃을 일이 생깁니다. 그러니 비우고 허허 웃어야 해요. 그게 진짜 대장부입니다!”

선화 그리겠다는 후학 위한 조언을 부탁드렸다. 일말의 의심도 하지 말라는 듯 강인한 어조로 답한다. “비워라! 비우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선화 그린다면 남 것 베낀 것과 다를 바 없어요.” 석도 스님이 지금 현현한다 해도 수안 스님의 선기만큼은 어쩌지 못할 듯싶다. 순간, 중국의 석도 스님과 한국의 수안 스님 사이에 극명하게 다른 점 하나가 스쳐 갔다. 석도 스님은 만년에 양주에 정착하면서 승복을 벗고 환속한 후 직업화가로 살다 생을 마감했다. 경봉 스님 문하에 머물 당시 수안 스님은 극락암 33조사각에서 절을 올리며 원을 세웠다.

“비구로 살다 죽겠습니다. 밭둑이나 논두렁에서 생을 마치더라도 그 자리가 화엄으로 장엄되게 해 주십시오!”

누구라도 한번쯤 수안 스님을 친견해 본다면 단박에 알아챌 수 있다. 지금도 그 마음 변치 않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맷돌 중’이 아니다. 시서화각을 확연하게 꿰뚫은 ‘허허 대장부’ 수안 수좌다.

2015년 2월 호주에서 개인전을 연다고 한다. 이번엔 호주 정법사 불사지원을 위한 전시회다. “선 하는 사람이 같은 작품 내 놓을 수 없다”며 은산철벽과 마주하고 있다. ‘무’자 화두가 아닌 영산회상염화미소, 다자탑전분반좌, 사라쌍수곽시쌍부의 ‘삼처전심(三處傳心)’이다. 교외별전에서 어떤 잡화(雜華)를 건져 올릴 지 기대된다. 합장하고 돌아서는 데 못내 못미더웠는지 한 말씀 하신다.

“육도윤회 돌고 돌아도 종이 위 그림이야! 한 생각 쉬고 보면 삶 자체가 멋이야! 지구라는 푸른 별에서 멋지게 놀다 가시게.”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1263호 / 2014년 10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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