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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시가체

판첸라마의 도시가 품은 사원서 잃어버린 영광을 목격하다

▲ 역대 판첸라마의 주석처였던 타쉬룬포 사원. 달라이라마에 이어 겔룩파 서열 2위였던 판첸라마는 이곳에 머물며 시가체 일대를 지배해왔다. 현재 히말라야 고원을 둘러싼 현실이 각박해질수록 타쉬룬포를 향한 티베트인들의 마음은 굳건해지고 있다.

옅게 드리운 구름이 이제 막 떠오르려는 태양을 잠시 숨겨놓는다. 가리어진 빛은 구름 위 하늘로 자욱하게 퍼져나가며 어스름을 뿌린다. 밤의 차가움에 움츠러들었던 대지가 미약한 빛을 머금고 조심스럽게 생명력을 발산한다. 햇살이 드러나자 모든 광경은 순식간에 확연해진다. 티베트인들의 오체투지가 향하는 곳, 시가체(Shigatse) 타쉬룬포(Tashilhunpo) 사원 지붕의 황금빛이 햇살을 타고 광장으로 흘러내린다. 빛이 선명해질수록 기꺼이 몸을 낮춘 티베트인들의 기도 또한 선명해진다. 어둠은 영원하지 않다. 이들은 찬란하게 떠오른 가피를 온몸으로 흡수하며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암흑을 광명으로 거둬내고 있었다.

환생제 수립한 5대 달라이라마
통치력 강화 위해 판첸라마를
타쉬룬포 사원 법왕으로 지정
그 후 역대 판첸라마 주석처로

높이 27m 이르는 미륵불상에
갖가지 보석 장엄 화려함 자랑
불상 앞 역대 판첸라마 사진엔
중국측이 내세운 11대 사진도

시가체. 이곳은 ‘비옥한 토지의 정원’이라는 그 뜻처럼 곡창지대를 품고 있어 티베트 서남부의 농축산품 집산지 역할을 하고 있다. 라싸에서 서쪽으로 280km 떨어져 있으며 해발고도는 3900m에 이른다. 라싸가 관세음보살의 화신 달라이라마의 도시라면 시가체는 아미타불의 화신 판첸라마의 도시다. 판첸라마는 티베트를 통치했던 달라이라마처럼 정치적 권한은 없었지만 종교적 권위를 바탕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1624년 겔룩파 정부를 수립한 제5대 달라이라마 롭상 갸쵸는 라싸 서쪽지역의 통치력을 강화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한다. 당시 시가체는 티베트의 패권을 두고 라싸의 중앙정부와 마찰을 빚곤 했다. 롭상 갸쵸는 자신의 스승인 판첸 로산 추키겐첸이 죽자 전세영동(轉世靈童)을 선정한 뒤 타쉬룬포 사원의 법왕으로 지정한다. 이어 겔룩파를 창종한 쫑카파의 제자 케도프제를 제1대 판첸라마로 소급한다. 이로써 달라이라마와 판첸라마는 윤회를 거듭하며 라싸와 시가체를 각각 지배하게 된다. 그렇게 티베트불교의 상징이자 구심점으로 오랜 세월 추앙받아왔지만, 현재 히말라야고원에서 그들의 모습은 서서히 지워지고 있다.

▲ 법회를 봉행한 후 타쉬룬포로 들어가는 순례단.

이른 새벽, 숙소를 나선 순례단은 버스를 타고 타쉬룬포 사원 앞 광장에 도착했다. 순례단 스님들은 가사를 수하고 부처님을 향한 티베트인들의 기도에 동참한다. 티베트인들은 잠시 기도를 멈추고 머나먼 동방에서 온 스님들을 축원한다. 부처님은 티베트에서도, 대한민국에서도 한결같은 모습으로 나툰다. 말이 통하진 않지만 구름 걷힌 대지를 어루만지고 있는 태양빛처럼 따사로운 부처님 가르침이 순례단과 함께 하길 기원하고 있음은, 가지런히 모은 손과 빛나는 눈망울로 짐작할 수 있음이라.

기도를 마치고 타쉬룬포 사원으로 이동한다. 합장한 순례단이 질서정연하게 걸어가고 티베트인들은 마니차를 돌리며 뒤를 따른다. 지극한 신심은 긴 행렬을 이루며 사원 안으로 그 마음을 밀어 넣는다. 잠시 카메라를 놓고 순례단의 환희로운 걸음에 동참한다. 고산증세의 고통도 이 순간만큼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대신 이 자리 모든 이들에게서 모여진 신심이 가슴을 뜨겁게 덥혀준다. 지치고 힘든 여정에도 순례의 걸음을 멈추지 않았던 것은 지금의 이 뜨거움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문을 통과하자 타쉬룬포 사원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붉은색 법당 오른쪽으로 세 개의 황금빛 지붕 법당이 들어서있다. 그 옆에는 대형 탕카를 걸 수 있는 높이 32m, 폭 42.5m 벽이 있다. 매년 티베트력 5월14~16일 이곳에서는 탕카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입구에서 전경을 조망한 후 좁은 길을 따라 법당으로 향한다. 불을 지피는데 쓴다는 나무가 길 곳곳에 박혀있다. 날카롭게 뻗은 가지 아래로 간신히 몸을 낮춰야만 통과할 수 있다. 하심하지 않으면 보여줄 것도, 들려줄 것도 없다는 준엄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 역대 판첸라마의 사리와 가사를 봉안한 탑.

좁은 길 끝에서 역대 판첸라마의 사리와 가사를 봉안한 탑을 만난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시계방향으로 돌며 꼬라를 하거나 오체투지로 몸을 낮추고 있었다. 이곳에서 티베트인들은 무병장수를 기원한다고 한다. 그들과 함께 영탑전을 참배하며 숨을 돌린다. 잠시 휴식을 취한 순례단은 낮은 경사의 언덕을 올라 미륵전인 잠캉 첸모에 도착한다. 이곳에 모셔진 미륵불은 세계에서 가장 큰 청동미륵불로 알려졌다. 높이 27m에 얼굴 크기만도 4.2m에 달한다. 6700돈의 황금과 12만kg의 청동으로 만들어졌으며 온갖 종류의 다이아몬드와 진주, 루비로 장식됐다. 불상을 둘러싼 벽면 역시 금으로 채색된 불화로 장엄돼 보는 이들의 감탄을 자아내고 있다. 그 압도적인 크기와 화려함에 잠시 넋을 잃고 바라보다 불상 아래 놓인 사진 세장에 시선이 멈춘다. 9대, 10대 판첸라마와 중국이 11대 판첸라마라고 주장하는 기알첸 노르부.

▲ 타쉬룬포 미륵불상은 한눈에 다 볼 수 없을 정도의 크기를 자랑한다.

14대 달라이라마는 1959년 국경을 넘어 인도로 망명했지만 10대 판첸라마는 중국의 식민지가 된 티베트에 남았다. 문화혁명 당시 중국정부의 실정을 비판하며 티베트의 독립을 부르짖었고, 결국 실각해 9년8개월 동안 감금당한다. 자유의 몸이 된 후에도 중국정부에 대한 비판을 이어가는 등 티베트 독립을 위해 힘쓰다 1989년 1월28일, 타쉬룬포에서 갑작스럽게 입적한다. 6년 후, 인도에 망명 중인 14대 달라이라마는 1989년 4월25일 암도지방에서 태어난 겐뒨 최끼 니마를 11대 판첸라마로 지명한다. 그러나 중국정부는 당시 6세에 불과했던 겐뒨 최끼 니마를 납치해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감금했으며 전세영동을 찾는데 관여했던 스님들도 처벌했다. 최연소 정치범이 된 겐뒨 최끼 니마는 현재 생존여부조차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다.

이후 중국정부는 공산당원인 티베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알려진 기알첸 노르부를 11대 판첸라마로 내세운다. 타쉬룬포 대신 북경에서 교육을 받은 기알첸 노르부는 2010년 2월 중국불교협회 제8차 전국대표회의에서 부회장으로 당선됐으며 같은 해 3월에는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위원으로 추대되는 등 적극적인 대외활동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티베트인들은 기알첸 노르부를 판첸라마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미륵불 아래 사진에서 기알첸 노르부의 모습은 9대, 10대 판첸라마의 모습보다 작다. 언뜻 봐서는 얼굴조차 알아보기 힘들 정도다. 그 부조화에서 현재 티베트가 처해진 현실을 엿본다.

▲ 야크 기름 초를 공양 올리는 티베트인.

티베트인들이 공양 올린 야크 기름 초가 짙은 연기를 내며 타오른다. 그럼에도 티베트인들의 신심은 이처럼 밝게 빛나고 있었다. 잠캉 첸모의 묵은 공기가 목을 따갑게 한다. 밖으로 나가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을 맞는다. 가이드의 재촉에 쉴 틈도 없이 4대 판첸라마의 영묘탑으로 이동한다. 미륵불처럼 금과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영묘탑을 둘러보고 나가려는데 벽화에 휘갈겨 쓴 글씨가 눈에 띈다.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들은 ‘위대한 모택동 주석’이라는 글을 수백 년 된 벽화 위에 덧입혔다. 시간은 켜켜이 쌓여가며 벽화와 글을 하나로 만들었다. 이제는 누구도 이 풍경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만 같다.

빠른 걸음으로 타쉬룬포 사원을 빠져나온다. 시가체를 떠나 다시 라싸로 돌아가야 한다. 문을 통과해 길 건너 광장으로 향한다. 타쉬룬포의 황금빛 지붕은 햇살을 반사하며 여전히 광장을 비춘다. 티베트인들의 오체투지 역시 계속되고 있다. 이른 아침 이곳에서 목격한 그들의 기도는 분명 부처님을 향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무엇을 위함일까. 잃어버린 영광과 주어진 믿음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히말라야 고원에 한줄기 빛이 스며들어 어둠을 밝힌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암흑을 광명으로 거둬내는 티베트인들의 기도소리가 들린다.

시가체=김규보 기자 kkb0202@beopbo.com

[1263호 / 2014년 10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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